서 연 회
서 연 회
  • 정선옥
  • 승인 2010.11.2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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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는 마음을 닦는 예술 ”


여성회관에 들어서니 어디선가 은은한 묵향이 흘러나온다. 어릴 적 하얀 화선지에 난을 치는 할아버지 곁에서 무릎 꿇고 앉아 팔이 아프도록 먹을 갈던 기억이 새삼스러워 조심스레 강의실 문을 여는데 삐걱거리는 문소리가 어찌나 크게 울리는지 숨이 다 멎을 지경이다. 그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하얀 화선지에 차분히 붓을 놀리는 서연회 회원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평생을 해도 다 못한다는 서예공부라는 말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의 회원들이 20년 가까이 공부중이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하루아침에 결과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일, 이년 붓글씨를 쓴다 한들 밖에 나가서 서예가라는 이름을 내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애초부터 쉽사리 뭔가를 이루려는 마음으로 시작한 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회원들의 얼굴엔 욕심이라는 것이 없어 보인다. 문 밖 소란스러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처럼 또 다른 세계에 몰두하고 있는 그네들의 얼굴이 초연하다.

필자가 어린 시절만 해도 초등학교 주변에는 서예학원이 주산학원만큼이나 많이 있었다. 기실 서예는 우리에게 그리 낯선 분야가 아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은 글씨를 연마함으로써 마음을 닦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병인양요 때 프랑스인 신부를 박해했다는 이유로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들은 다 허물어가는 초가삼간에 서책이 빼곡하고 붓글씨를 쓰는 선비들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름도 없는 작은 나라의 섬사람조차 학문에 힘쓰고 이를 귀히 여김에 감탄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서예는 학문과 예술을 겸해야 하는 고급예술이다. 단순히 글을 익혀 쓰는 것이 아니라 글씨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켜 또 하나의 경지를 일궈낸다. 書藝(서예). 글씨를 붓으로 쓰는 예술이라 하지 않았던가? 한 획 한 획이 글자의 의미에 따라, 그리고 붓을 든 이의 성품과 그때그때의 감정에 따라 자형이 달라지는 법이다. 회화의 경우 여러 번의 덧칠이 가능하지만 소위 개칠이라는 것이 서예에서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순간의 붓놀림조차 당연한 예술의 구성요소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점이 또한 회원들의 마음을 끄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집에 저마다의 서실을 구비하고 있다. 30대 후반에서 50대에 이르는 전업주부들이다 보니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지만 좀 더 집중을 하기 위해서다. 언제든 붓글씨가 쓰고 싶어질 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만의 공간에서 창작욕을 불태운다. 이러한 회원들의 열의는 다수의 공모전 입상과 초대작가라는 결실로 보상받는다. 그러나 정작 회원들은 딱히 서예가가 되겠다거나 예술가가 된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도를 닦는다는 생각으로 붓을 잡는다.

처음 서예를 배워보겠노라고 여성회관의 문을 두드렸을 때 회원들의 생각은 제 각각이었다. 정신집중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취미생활이 필요해서, 공부가 하고 싶어서, 멋져 보여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혹은 태어날 손자·손녀에게 공부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등 그 출발점은 달랐지만 지금 회원들이 바라보는 곳은 오로지 한 곳이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 무언가를 이루려 하기 보다는 자기수양과 자기만족을 추구한다.

거기에 회원들 간의 깊은 유대감이나 돈독한 우애는 덤이다. 서연회의 뜻을 물었더니 '글로 맺어진 인연'이란다.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관계'임을 자랑하는 서연회다. 인터뷰 하는 동안 내내 느낀 점이 있다면 20명 가까운 회원들이 붓글씨를 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강의실 안이 너무도 고요하더라는 것이다. 무례를 무릅쓰고 강의실을 찾은 이방인에게도 너무도 무관심한 그들은 조용하고 무심해 보이지만 오랜 시간을 문방사우와 함께 해 온 회원들에게서는 그윽한 묵향이 피어난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저들과 같은 묵향을 지닌 사람으로 늙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최근 캘리그라피(Calligraphy)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서예를 배우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천편일률적이고 딱딱한 활자체에 싫증이 난 사람들은 다시 옛것을 찾고 있다. 溫故知新(온고지신)이라는 선현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일례다. 고전을 지켜가는 것이 어찌 보면 고리타분해 보이고 뒤떨어진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언젠가는 옛것을 꺼내 앞날을 예측하는 이정표로 삼을 수밖에 없는 우리다.

일주일에 두 번씩 있던 강의가 한 번으로 준 것이 아쉽기만 하다는 회원들은 마지막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서예의 참맛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한다. 아직 부산한 어린 아이부터 연세 지긋한 어르신까지 누구에게나 좋은 취미요,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짧은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미·니·인·터·뷰


“문은 늘 열려있습니다”

김현금 회장
김현금 회장
일반적으로 서예는 따분하고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다른 취미처럼 웃어가면서 하는 공부도 아니고, 움직임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자신이 웬만큼 좋아하지 않으면 지속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공부해도 그 끝을 볼 수 없다는 서예인 만큼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또한 그 매력에서 쉽게 헤어날 수 없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서예는 단순히 붓으로 선인들의 글을 옮겨 담는 것이 아니라 한 자 한 자 화선지에 글자를 옮겨 적으면서 그 뜻을 음미하고, 내 것으로 만들고,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창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더 많은 분들에게 서예의 깊은 멋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성회관의 문은 늘 열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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