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종 진천읍장
김원종 진천읍장
  • 정선옥
  • 승인 2011.01.2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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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토크 서른아홉번째 손님


유난히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세밑. 지난 한 해 가장 눈에 띄는 행보의 주인공은 누굴까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득 떠오른 인물은 진천읍 어디서나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게 되는 김원종 진천읍장이었다. 취임 초부터 '하루 진천읍민 50명 만나기', '하루 진천읍 두 바퀴 돌기'를 실천하고 있으니 읍내에서 그를 만나기란 애초부터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해 7월 진천읍장에 취임한 이후 그의 6개월은 3만 진천읍민의 염원인 '신뢰로 화합하여 도약하는 진천읍'을 만들겠다는 김 읍장의 굳은 각오와 열정으로 집약된다. 진천군 전략사업추진단 시절부터 발로 뛰는 현장 중심 행정과 공무원 마인드 혁신을 강조했던 그는 읍장 취임 후 진천읍 현안의 적극적인 해결 노력은 물론 진천읍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해 왔다.

Q 읍장으로 취임하신 지 벌써 반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6개월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A 읍으로 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정말 바쁘게 보냈습니다. 사소하지만 꼭 필요한 민원들을 적극 해결하려 노력했고, 깨끗하고 친절한 진천읍 분위기 쇄신을 위한 클린진천 캠페인과 미인대칭 운동을 꾸준히 벌여 왔습니다. 무엇보다 인구 증가에 큰 비중을 두고 '진천읍 인구 3만 시대 캠페인'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Q 이미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지 않습니까?
A 지난해 말 기준으로 진천읍 인구가 28,200명을 돌파했고 올해 진천읍 취학 아동이 2학급 증가했습니다. 취학 아동은 전년 대비 13.6% 증가한 수치로 진천시 건설을 앞두고 2013년 진천읍 인구 늘리기 3만 프로젝트의 원동력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인구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타 지자체에 비해 아주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이대로라면 2013년 이내에 충분히 인구 3만 시대를 열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Q 전략사업추진단에 계실 때도 그랬고, 읍장으로 취임하실 때도 공무원의 마인드 혁신을 강조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A 우리 공무원들이 마인드를 바꾸어야 합니다.
경직되고 편협한 기존의 공무원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혁신적인 기업가적인 마인드를 갖고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략사업추진단에 있을 때 한 해 예산을 13조 8000억 원까지 세워본 적이 있습니다. 무모하다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단 진천군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계획을 세우고, 투자 유치를 위해 영업사원처럼 발로 뛰는 도전 정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그림들을 현실화 시키는 것은 사실 공무원의 몫이 아닙니다. 맨 바탕에 밑그림을 그려 놓으면 군민이든 기업이든 국가가든 누군가는, 언젠가는 이루어 낼 것입니다.

Q 그런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변화와 혁신의 결과 아니겠습니까? 직원들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었다는 이야긴데 읍장님의 역할이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느 조직이든 그 조직을 이끌어 가는 리더가 얼마만큼 역할을 해 내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읍장님이 생각하시는 리더의 조건은 어떤 것인가요?
A 리더는 말 그대로 리드하는 사람입니다. 나서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의 일원들이 제대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끔 이끌어 주는 사람입니다. 수로를 만들고 물길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적당한 자리에 물꼬를 터주는 것이 바로 리더십, 지도자의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조직과 지역 발전의 향방이 가름되는 것이지요.

Q 물꼬론이라, 멋진 이야긴데요. 그런 면에서 공직사회에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뜻은 없습니다. 공무원이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느냐는 뜻에서 여쭤보는 겁니다.
A 글쎄요. 어떤 자리에 있었어도 제가 할 일은 다 했을 겁니다. 그리고 진천군에 와서도 정말 즐겁게 일했습니다.

Q 어렸을 때 꿈은 무昰潔邂た�? 어려서부터 공무원을 생각하시진 않으셨을 텐데요.
A 초등학교 다닐 땐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머리를 멋지게 빗어 넘기고 단정하게 차려 입은 담임선생님이 너무 좋아 보였거든요.

Q 이야기가 나왔으니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 주시지요.
A 어렸을 때야 뭐 대부분의 남자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저도 엄청 개구쟁이였어요. 어른들에게 많이 혼났던 기억도 있구요. 제 세대가 다 그랬듯 소 등에 타고 꼴 베러 다니던 일, 논에 나가 피사리 하던 일, 가을 되면 새 쫓고 샛밥 나르던 일, 부모님 대신 잘못한 동생들 혼내던 일 등 기억나는 게 많네요.

Q 동생 분에게서 이야기 들은 적 있습니다. 큰형님께 많이 혼나며 자랐다구요. 장남으로서 바쁘신 부모님 역할까지 대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큰형님은 어렵다고 하던데요.
A 어렸지만 장남이라는 부담이 컸어요.
집에 일을 거들어 주시는 분이 두 분이나 계셨지만 소를 많이 키웠고 농사일도 많아 부모님이 늘 바쁘셨거든요.

Q 사춘기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A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무슨 배짱이었는지.
원동에 미사일기지가 있었거든요. 수업이 끝나면 매일 미군들이 있는 초소막에 놀러가곤 했어요. 그날 학교에서 영어시간에 배운 것들을 실습해 보는 거였죠. 미군들과 시레이션도 함께 끓여먹곤 했는데 덕분에 영어회화가 많이 늘었습니다. 그 때 외국어에 대한 매력을 많이 느꼈어요. 또 나중에 다른 외국어를 더 공부하는 계기도 됐구요.

Q 읍장님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A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의 실력은 아닙니다만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외국어에 노출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였는지 다른 외국어를 공부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Q 아버님과 보냈던 시간 중 기억에 남는 일 있으신가요?
A 아버님은 평소에는 굉장히 무뚝뚝한 분이셨어요. 겉으로 당신 맘을 표현하는 분이 아니셨지요. 하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자식사랑이 대단한 분이셨어요.
군대 가기 전에 1년 쯤 아버님과 함께 농사를 지었거든요. 새벽에 일어나 아버님을 따라 들에 나갈라치면 찬 이슬에 아들의 바지가 젖는 것이 안쓰러워 일부러 크게 팔자걸음을 걸으시며 이슬을 휙휙 치고 나가셨습니다.
아버님께선 늘 “공부를 잘 하는 사람 보다는 자신에게 떳떳한 정직한 사람이 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Q 아버님 뒤를 이어 농사를 지어볼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A 좀 전에 말씀 드렸듯 입대 직전에 농사일을 잠깐 해 봤는데 정말 농사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더군요. 요즘 사람들 할 것 없으면 농사나 짓는다는 말들을 쉽게 하지만 농사는 오랜 경험과 지식이 밑바탕 되어야 하는 전문직입니다. 그때야 농사일이 몸에 배어있질 않으니 당연히 힘들게 느꼈지요. '아, 나는 농사는 못 짓겠구나' 하는 생각에 두문불출 하고 공부만 했던 겁니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을 보게 됐지요.

Q 7급 공채인 걸로 알고 있는데 첫 근무지가 진천은 아니었지요?
A 예. 워낙 뒤늦게 공직에 입문해 스물여덟 살에 공무원을 시작했는데 정년도 몇 년 안 남았네요.
처음 시험 볼 땐 충북도청에 지원했었어요. 첫 번에 합격을 하고 면접을 보러 갔는데 제가 면접 날짜를 착각하는 바람에 그 다음날 간 거죠. 낙심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그 뒤 한 달 후에 거주지 제한이 없는 경북에 지원해 재시험을 치렀습니다.

Q 경북이라면 정확히 어딜 말씀하시는 겁니까?
A 대구에 지원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청도군으로 발령이 났어요. 요즘처럼 네비게이션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사회과부도를 보고 찾아갔답니다. 여담입니다만 충북에 인재가 많긴 많아요. 당시 경상북도 7급 공채 합격자 중 1등부터 10등 까지가 다 충북사람이었습니다.

Q 경상도라면 텃세가 엄청 심했을 것 같은데요.
A 텃세요? 말도 못하지요. 그래도 7급 공채니 무시는 못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시키질 않아요. 9급 공채 출신들이 저보다 승진을 먼저 하는 상황까지 발생하다 보니 화가 많이 났지요.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였다면 인정을 하겠지만 그건 아니었거든요. 저 뿐만이 아니라 객지에서 온 사람들은 맥을 못 추던 분위기였습니다.

Q 그럼 청도에선 얼마나 계셨던 건가요?
A 11년을 근무했습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래도 배운 것이 많습니다. 충북에 비해서는 행정이 상당히 선진화 되어 있었으니까요.
사실 수십 년을 공직에 있으면서 중앙부처에 한 번도 못 가본 사람들도 있어요. 가게 되더라도 주눅이 들고. 중앙부처에는 지역에 무엇을 도와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방에 근무하는 공직자들이 적극 도움을 요청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고 봅니다.
실제 제가 예산계장으로 있던 2003년에서 2004년에 군 단위로서는 가장 많은 특별교부세를 따 왔습니다. 전략사업추진단장으로 있을 때에도 1조 8000억 원이 진천에 풀렸습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Q 개인적으로는 읍장님 같은 마인드를 가진 분이 진천군에 오셔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오랫동안 근무하던 지역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A 지금도 아버님을 모시고 있지만 부모님을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젊을 땐 몰랐는데 나이를 먹으니 내가 장남인데 부모님도 모시지 못하면 자식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서요. 마치 의무이자 제게 내려진 무언의 명령 같은 것이었습니다. 도청에서 제의가 있었지만 부모님을 모시려 어렵게 진천으로 올 결심을 한 것이어서 진천군 근무를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경북에서 배운 선진행정을 내 고향 진천에서 펼쳐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구요. 어차피 하는 일이라면 저를 낳아주고 키워준 고향 진천군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Q 고향 발전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니 여쭤봅니다만 읍장님이 전략사업추진단장으로 계실 당시 많은 사업들이 직·간접적으로 유치되지 않았습니까? 이미 착공에 들어간 사업들도 있지만 양해각서만 체결된 채 지지부진한 사업들도 있는데 주무과장으로서 어떻게 보십니까?
A 추진단장 시 근로복지공단과 선수촌은 착공했고 국가기상센터는 그 이전에 착공, 2010년엔 혁신도시가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갔습니다.
이 질문을 왜 하셨는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착·준공에 군이 개입은 돼 있지만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JC 프로젝트나 우석대, 태권도대학 등의 민자 유치 사업을 묻고 싶은 것이겠지요.
이런 사업들에 대해서는 군민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이 사업들이 군비나 도비를 들여 집행하는 사업이었다면 벌써 끝났을 사업들입니다. 하지만 이 사업들은 민간 자본이 투입되는 민자 사업입니다. 시행사의 경영 상황에 따라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Q 그렇기는 합니다만 우석대학의 경우 군민들의 기대가 컸던 만큼 지지부진한 사업에 대한 군민들의 실망도 큽니다.
A 우석대 역시 2009년 11월 착공 계획이 있었지만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에서 기인한 세계적 경제난으로 은행권에서 돈을 풀기는커녕 나가 있는 돈도 회수하는 형편이었어요.
지방화 시대에 군민도 지방예산, 국가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이해할 것은 이해하고, 독촉할 것은 독촉할 것 아닙니까? 투자하기 좋고 기업하기 좋은 군을 만들려면 군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협조가 필요합니다.

Q 진천시 건설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A 진천시 건설은 꿈이 아닙니다. 현실화 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합니다. 우선 인구가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을 전략적, 계획적으로 만들어 줘야 합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구체적인 마스터플랜을 세워야죠. 신도시형 복합단지를 만든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척산업단지가 개발되면 그 안에 1700가구 4,000명이 거주하게 됩니다. 현재 덕산면 인구가 6000명인데 광혜원과 비슷해지죠. 진천읍을 5만으로 만들던지 진천읍과 광혜원면을 합쳐 11만을 만들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수요자의 욕구를 끌 수 있을만한 메리트를 만들어 주어야 하지요. 사실 진천은 도시화 된 면적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만약 도청 소재지가 이전을 한다든가 광역시가 되어 신청사가 필요하다면 가장 발전된 지역에 청사를 두지 않겠습니까? 진천군이 발전하는데 그만한 호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사업을 유치할 수 있을 정도의 인프라는 갖춰져 있어야지요.
하지만 이를 위해 우선은 진천군이 시가 되었을 때 군민에게 얻어지는 실익이 무엇인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하는데 홍보가 되어 있지 않아 군민들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Q 요즘도 저녁에 결재를 하십니까?
A 여전하지요. 처음 읍에 왔을 때 직원들에게 업무시간 중에 책상에서 내 얼굴 볼 생각 하지 말라고 이야기 했었습니다.
하루 진천읍을 두 바퀴 정도 돌면 40명에서 50명 정도의 주민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과 만나보면 군정에 대해 '~라 하더라'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실 주민들이 군정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현장에서 주민들에게 군정에 대해 제대로 브리핑 하는 것이 군에서 읍장에게 바라는 포커스가 아닐까요? 읍장으로서 저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는 주민들에게 군정에 대해 제대로 알리고 주민들의 요구를 매일 케어 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Q 진천읍장에 취임한 지 6개월이 지났는데 진천읍 발전을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지?
A 이영남장군비 이전사업이나 도시계획도로 개설 등의 당면한 현안사업 부터 백곡저수지둑높이기사업, 상대적으로 소외된 4구 개발 등 중장기에 걸쳐 필요한 사업들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 자리에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있는 동안 진천읍이 발전할 수 있는 중장기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할 것입니다.

물론 제 임기 중에 이 많은 일들을 다 이루어 낼 수는 없겠지요. 다만 저는 일단 그림을 그려 책상 위에 올려 놓는 일 까지가 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Q 평소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십니까?
A 저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종교인이다 보니 기도를 많이 합니다. 기도를 할 땐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과 국가,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위가 행복해야 제가 저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읍장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기도 합니다.

Q 읍장님 5년 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A 진천을 위해 열심히 사는 군민의 모습이겠지요.
어떤 위치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열심히 살고 있을 겁니다.

Q 진천군민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지요.
A 저의 가장 큰 바람은 진천군민들이 모두 행복해졌으면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성숙된 시민의식이 필요합니다. 지방자치시대는 자기 요구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물론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요구를 필요로 하지요. 모든 이가 상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진천읍에서 추진하고 있는 미인대칭(미소짓고, 인사하고, 대화·소통하고, 칭찬하자) 운동에 군민 여러분 모두가 동참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작은 실천운동 한 가지 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진정 따뜻해질 것입니다.
저 역시 군민 모두가 자랑스러워 하는 살기 좋은 진천을 만들기 위해 모든 열정과 지혜를 바치겠습니다.

김원종 읍장에게 공직은 하늘이 내린 천직이다. 현실적이지만 때로 엉뚱한 상상에 빠지고, 집요하지만 최선을 위해 버릴 줄도 알고, 내가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지만 더 넓은 세상을 볼 줄 알던 호기심 많던 소년은 이제 중년의 현명함을 베푸는 공직자가 되었다. 천생 공직자이지만 이제껏 우리가 겪어왔던 이들과는 너무도 다른 마인드를 지닌 그다.
오랜 대화 끝 늦은 시간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이토록 가벼움은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다 싶은 흐뭇함에서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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