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택 前 충청북도지사
정우택 前 충청북도지사
  • 정선옥
  • 승인 2011.09.1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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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토크 마흔 한번째 손님


내년 총선을 앞두고 충북도민들의 큰 관심사 중 하나라면 정우택 前 충북도지사의 행보다. 국회의원 출마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도민들에게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다. 도지사 재임에는 실패했지만 이제껏 멀리, 혹은 가까이서 그를 지켜봐 온 누구도 그가 여기서 멈춰 서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정우택 지사는 그 이름 석 자만으로도 이미 유명세를 지닌 하나의 브랜드다. 제15대, 16대 국회의원과 해양수산부 장관, 충청북도 지사를 역임한 그의 걸출한 이력만 본다면야 연세 지긋하고 풍채 좋은 신사가 떠오르지만 실상 정 지사는 채 이순도 되지 않은 젊은 정치인이다. 현재는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경제통으로 불리는 그가 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을 때, 지인들은 교육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우려가 아닌 기대의 응원을 보냈었다. 그 기대에 부응해 교육자로서, 또한 경영인으로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능력에 일단은 합격점이라는 평이지만 최근에는 정치적 행보까지 빨라지고 있다. 유난히 힘겨웠던 여름 끝자락이지만 여전히 활기 넘치는, 하루 스물 네 시간이 짧은 정 지사를 다시 만났다.

Q 얼마 전부터 택시 운전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A 소문이 벌써 났나요? 지난달 말일부터 주말을 이용해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어릴 때부터 자동차광이었거든요. 학교수업이 오후반에 걸리면 오전엔 차를 닦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습니다. 깨끗해진 차를 보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곤 했어요. 중고차였지만 경제기획원 사무관 중에서는 차도 가장 빨리 사지 않았나 싶어요.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기 위해 마련했는데 당시의 관료사회 분위기에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차를 사고 난 뒤 하나 둘 다른 사무관들도 차를 사더군요. 맘껏 운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예전부터 택시 운전을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택시운전면허도 취득했지요.

Q 하지만 운전하는 게 좋아서라면 굳이 택시가 아니어도 됐을 텐데요.
A 그럼요. 택시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하나의 밀실입니다. 툭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또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택시회사의 사납금 제도라던가 기사들의 애로사항 같은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알 수 있어요. 손님을 태우기 위해 승강장에서 다른 택시 기사들과 이야기 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Q 그래서 돈은 많이 버셨나요?
A 일주일에 하루밖에 일을 못하니 조금밖에 벌지 못해요. 그날 수입은 회사에 입금하고 일당으로 받는 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할 생각입니다.

Q 도지사 시절에도 매달 고액을 사회복지시설에 기부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A 아, 그런데 이건 또 달라요. 액수는 적지만 마음이 더 뿌듯하다고 할까요? 예전에도 열심히 일 하고 받은 돈을 기부하긴 했지만 이렇게 버는 돈은 그 의미가 또 새롭네요.

Q 이미 내년 총선 출마는 기정사실화 됐지만 기존의 지역구인 중부4군이 아닌 상당구에서 출마하실 예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A 상당구는 충북의 정치 1번지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충청북도지사를 지냈기 때문에 충북을 대표하는 지역에서 출마하는 것이 제가 취해야 할 입장이라 생각했습니다. 정치 1번지에서 당선된다면 그만큼 중앙에서도 제 존재에 더 비중을 둘 것이라는 생각도 하구요. 충북은 현재 민주당이 석권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도내 8개 지역구 중 다섯 곳을 민주당이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4석인 청주·청원과 중부4군 역시 민주당입니다. 만일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면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도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제가 짐을 지어야겠다는 소명의식도 있어요. 이곳에서의 당선이 정권 재창출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Q 하지만 지사님을 지지하던 중부4군 군민들로서는 섭섭함도 있지 않을까요?
A 중부4군은 제게 정치적 생명을 준 고향입니다. 제가 어디에 있든 고향을 저버릴 수는 없지요.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 유학하던 하와이에 들렀던 아버지가 떠나시던 날 공항으로 가는 차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성공하거든 고향에 가서 일하도록 해라' 라구요. 유학 중에 임종도 못 지켰던 터라 그 말씀이 제겐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았습니다. 첫 선거에서 지역구를 선택할 때도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고 싶었구요. 오히려 더 큰 틀에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Q 그렇지요. 중앙에 진출하면 국가와 지역발전을 위해 더 큰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는 중부4군의 지지자들도 충분히 납득할 겁니다.
A 1992년, 처음 정치를 해보겠다고 내려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나이 마흔에 잘 나가던 직장 그만두고 투표일을 석 달 앞두고 무작정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때는 음성군과 진천군이 지역구였어요. 나중에 괴산군과 증평군이 한 지역구가 됐구요.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지명조차 낯선 곳에서 경험도 없이 시작하려니 두렵기조차 했죠. 그래도 아버님을 기억하시는 분들과 친지들, 그리고 가족들이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낙선하긴 했지만 그것이 또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때 한 번에 국회의원에 당선됐더라면 저는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놓쳤을 겁니다.

Q 행정공무원으로서도 승승장구했는데 굳이 정치에 뛰어드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셨나요?
A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서른아홉 살이던 1991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는데 당시 경제기획원 과장이었던 형한테서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어요. 형은 저를 보자마자 정치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묻더군요. 행시에 합격해 행정 공무원으로 성실히 일해 온 저에게 형의 제안은 뜻밖이었습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정당을 만드는데 정 회장의 아들인 정몽준 의원이 형에게 국민당 입당을 권유했답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형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는데 문득 제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래서 형보다는 제가 정치 감각이 있다면서 저를 추천했답니다.

Q 정치인 집안에서 성장하셨는데 정계에 입문할 생각을 해 보진 않으셨나요?
A 형에게 그런 제의를 받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시 공부를 하던 시절, 집에서 마룻바닥에 귀를 대고 아버지와 정치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가슴 설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막연히 정치세계를 동경했던 것 같아요. 새삼스레 돌아보니 성장하는 내내 정치는 제게 고향처럼 친숙한 세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Q 사모님은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A 형님과 헤어지고 나서 슬며시 아내에게 운을 뗐는데 결사반대였습니다. 막상 선거운동이 시작되어서는 제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지만요. 어린 시절 저희 집에는 늘 식객이 북적였어요. 그 뒷바라지를 하시던 어머님의 고생이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제 아내에게 그 험한 길을 또 걷게 하다니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Q 중부4군의 유권자 치고 사모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웬만한 경조사엔 다 찾아가셔서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 원래 몸도 약한 사람인데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했어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집사람이 내색은 안 해도 맘고생이 많았더라구요. 가끔 아내에게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봅니다. 이건 여담이지만 정치가의 아내는 딱 두 부류라고 합니다. 한 부류는 남편 표를 얻어오고, 또 다른 한 부류는 남편 표를 깎아먹는다나요. 집사람이야 당연 전자죠. 유권자들을 만나고 다니다가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내 때문에 저를 찍기로 결심했다구요. 마누라를 보면 바깥사람을 알 수 있다나요? 어쨌건 아내 덕을 톡톡히 본 행복한 사람입니다.

Q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연애결혼 하신건가요?
A 글쎄요. 고시에 합격하고 나서 아마 맞선을 100번은 봤을걸요. 헌데 인연은 따로 있나봅니다. 맞선이라는 것에 회의를 느낄 즈음 사촌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사촌 여동생의 권유라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만나리라 마음먹고 큰 기대 없이 자리에 나갔는데 총명하고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모습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두 번째 만남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이틀에 한 번 꼴로 데이트를 했는데 어느새 제 마음 속에 깊이 파고들어 만난 지 한 달 만에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그리고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했는데 그렇게 많은 여자와 선을 봤는데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더니 어떻게 그렇게 쉽게 집사람에게는 마음이 열려 버렸는지 지금도 제 마음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결혼은 하늘에서 맺어지고 땅에서 완성된다'는 말을 되새길 뿐이죠.

Q 천생연분은 따로 있나 봅니다.
A 예. 지금도 저는 아내에게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제가 정치한다고 신경 써주지 못했는데 집사람이 잘 키워 주었구요.

Q 잘 크지 않았습니까? 본인이나 아들의 병역기피 문제로 곤경에 처한 정치인이 여럿 있는 것에 반해 둘째 아드님은 교전 중인 레바논까지 갔었잖아요?
A 저도 아비인지라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마음이 편칠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아들 녀석이 자랑스러워지더군요. 제가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직후 아내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제 아이들은 집사람과 교회가 키워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Q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얌전한 모범생 스타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A 하하하하. 제대로 보셨네요. 저 어릴 땐 무척 개구쟁이였어요.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버님 몰래 담배도 피워보고 할아버지께서 주시는 술을 홀짝홀짝 받아 마시기도 했답니다. 그게 네 살 때였어요. 골목대장에 학교에서도 말썽 피우고 도망치길 여러 번 하다보니까 그랬는지 어쨌는지 중학교 다닐 때는 100m 달리기에 12초 3이라는 비공식 기록까지 갖게 됐다니까요.

Q 예전에 대통령이 꿈이라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으신 겁니까? 이제 와 이야기 하지만 사실 그 때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나의 꿈은 대통령이다'라고 하시던 당당한 모습이 남자인 제가 봐도 굉장히 멋졌습니다. 일각에서는 이제 중부권에서도 대선주자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들을 합니다만.
A 제 부족함 탓에 6번 선거에서 3번 낙선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 꿈을 더 빨리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제 꿈은 정치인으로서 나라를 운영하는 겁니다. 꿈과 현실은 다르지만 정치인에게 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중부권 대권주자 이야긴데요,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이 호남권과 영남권 출신이었던 까닭에 오히려 지역 간의 갈등만 심화되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는 중부권에서 대통령이 나와 동서를 아울러 지역적인 통합을 이뤄내고 온 국민의 화합을 이끌어 내 균형 잡힌 국토의 발전과 온 국민이 행복하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헌정 사상 충북 출신의 총리조차 없어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대통령이든 총리든 그만한 직책이 있어야 충북을 비롯한 중부권이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Q 17대 때인가요? 당선이 거의 확실시 됐던 상황에서도 낙선한 경험이 있으시지요..
A 그러게요. 첫 선거야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으로 선거를 치렀으니 떨어진 게 당연했죠. 17대 선거 때는 투표일을 한 달 반 정도 앞둔 3월 초까지만 해도 '정의원이 전국 최다 득표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지역구에서 나왔으니까요.

Q 예, 저도 기억이 납니다. 그 때 모 일간지엔 당선 100%라는 기사가 났었는데요.
A 당시 지역구인 중부4군은 면적으로 볼 때도 충북의 5분의 1이나 될 만큼 큰 지역이었고, 또 자민련 소속으로 8년간 의정활동을 하면서 해양수산부 장관도 했던 제가 이번에도 무난히 당선될 것이라는 데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었으니까요.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둔 상황에서도 다른 당에선 뚜렷한 후보조차 없었으니 말입니다. 헌데 예기치 못한 탄핵열풍에 휩싸이더니 신행정수도에 대한 비정상적인 기대감으로 인해 선거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감성선거라는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자민련에 대한 감정이 혐오감으로 바뀐 거지요. 지역민들은 물론 충북도 전체가 의원 개개인의 정치적 역량과 자질보다는 당을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분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정치적 고통이 심했습니다, 솔직히요. 사실 지난 도지사 선거도 비슷한 맥락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Q JP와는 인연이 깊으시죠? 지난 2003년엔 당 쇄신 위원장을 맡기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A 아쉬움이 많이 남는 부분입니다. 당시 각 정당마다 당 쇄신을 내세우던 시절이었고 그분께서 당 쇄신 위원장직을 맡기셔서 제 개인적으로도 기대감이 컸던 게 사실입니다만 언제나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게 마련이죠. 사실 얼마 전에도 JP를 뵙고 왔습니다. 휠체어에 앉아 옛날을 회고하시는데 지난 2004년, 제가 말씀드린 대로 전국구가 아닌 부여에서 출마하셨으면 10선 의원이 가능하셨을 테고, 또 지금처럼 건강이 악화되지도 않았을 텐데. 후배 정치인으로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Q 좀 전에 말씀하셨지만 지난 지방선거 역시 누구보다 아쉬움이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도지사로 재임시절 즐겁게 일하지 않으셨습니까? 역대 최대 규모의 투자를 유치 하셨는데요.
A 정말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일했습니다. 170개 기업, 21조 7천억원이 넘는 전국 최고의 투자 유치를 이끌어 냈으니까요. 사업의 정상 추진을 위해 정말 중요한 시기입니다. 추진하던 사업들을 마무리 하고 싶었는데 그 점이 너무 아쉽죠.

Q 얼핏 들은 이야긴데 도지사 퇴임 직전 재선에 실패하고도 주민숙원사업을 위한 예산을 내려 보내셨다구요.
A 아마 이월면 삼용리 마을회관 신축 건인가 봅니다. 선거 때 마을을 찾았는데 주민들이 숙원사업이라고 하시더군요. 선거 기간이니 약속은 못하고 알았다고만 하고 왔죠. 이후에 사업비가 내려갔고 준공식 때 초청장을 보내셨더군요. 광혜원 전천후 게이트볼장 역시 떨어진 후에 예산을 내려 보냈습니다. 군에서도 의외였다고 해요.

Q 국회의원으로서나 도지사로서나 고향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셨는데 혹시 기억에 남는 사업이 있으시다면.
A 큰 사업이 아닌 기억에 남는 사업을 꼽으라면 화랑관이 가장 기억에 남죠. 1997년 음성군 체육관 준공식에 참석하고 진천에 왔는데 마침 그날 진천관광호텔에서 체육행사가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제가 체육관 이야기를 처음 꺼냈죠. 이제 진천군에도 체육관을 지어야 할 때가 된 것 아니냐구요. 그리고 96년 처음 당선되고 나서 가장 먼저 100억원을 얻어다가 진천IC에서 성석리까지 2차선이던 도로를 4차선으로 만들었죠. 도내 군 단위 중 가장 먼저 예산 가져다가 노인복지관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관내 어르신들이야 저희 아버님 같은 분들 아닙니까.

Q 지사님이 생각하는 리더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A 지도자는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위에서 군림하기보다 맨 앞에 서서 국민들을 미래로 이끌고 나갈 수 있어야죠.

Q 마지막으로 중부4군의 군민들에게 한 말씀 하시죠.
A 큰 나무 밑에 있는 작은 나무는 죽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큰 인물 밑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지요. 이미 중앙에 진출해 계신 분들과 지역 주민들이 합심해 지역에서 인재를 키워 중앙으로 진출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충북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큰 인물만이 인재를 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정우택이라는 사람을 정치인으로 만들어 준 정치의 고향입니다. 아버님과 조상님들이 묻힌 곳이기도 하구요. 중부 4군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도리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국회에 있을 때도 도청에 있을 때도 지금도 역시 몸은 다른 곳에 있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어르신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정 지사 부부는 고향에 내려와 낙선 인사를 다녔다. 힘들었지만 그 시기에 너무나도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늘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지만, 그리고 늘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낙선에서 더 큰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실패 후에도 오뚝이처럼 금세 일어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린다.
불필요한 등불 하나를 끄는 소박한 서민의 모습을 가진 그가 온갖 화려함으로 포장된 정치인들 틈에서도 저렇게 반짝반짝 빛날 수 있는 이유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향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남자의 열정이 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그가 닿으려는 꿈의 크기가 내심 기대되는 내심 유쾌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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