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진천군 사회인야구연합회장
김영호 진천군 사회인야구연합회장
  • 정선옥
  • 승인 2014.01.0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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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토크(마흔세번째 손님)


서울대학교 의학박사, 음성 한일중학교 이사장, 인제대학교 외래교수, 증평시민회 공동대표, 한국지방자치경영연구소 이사, 수필가, 한나라당 증평·괴산·진천·음성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진천군 사회인야구연합회장, 충청북도 청주의료원장, 전국 지방의료원 연합회장…. 참으로 독특한 프로필이다 싶었다. 커리어로 따진다면 이렇듯 다양하고 구미가 당기는 인물도 드물겠다 싶었다. 김영호 진천군 사회인야구연합회장은 제11, 12,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故 김완태 의원의 장남이다. 집안 내력으로 봐서야 진작 정계에 입문하고도 남음직 하지만 총선 출마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뛰어드는 그에게는 뒤늦은 감도 없지 않다. 그만큼 고민의 시간도 길었으리라. 내년 4월, 제19대 총선일을 꼭 121일 남겨두고 하루 24시간이 짧은 김 이사장을 어렵사리 취중토크에 초대했다.

Q 주량은 얼마나 되십니까?
A 소주 두 잔이면 취합니다. 거의 못한다고 봐야죠. 술을 마시면 그 자리에서 자는 버릇이 있어요.

Q 정치하시는 분이 그렇게 술을 못하셔서야.
A 예, 곤란할 때가 많죠. 행사에 참석해 인사를 드리러 다니면 당연히 술 한 잔 씩은 주시니 어르신들이 따라 주시는 대로 다 마시면 큰일 나죠. 일단 마실 만큼만 마시고 더 이상 못 마시겠다고 솔직하게 말씀 드립니다. 행사장에서 잠들면 큰일이니까요.

Q 그렇죠. 순간의 모면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해당 지역구에서 정치적 행보를 시작하신 거죠?
A 청주의료원장 퇴직 직후부터니까 본격적으로 다닌 지는 6개월 쯤 되었네요. 최근엔 지역발전을 위한 정책희망순례를 다니며 지역의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처방전 찾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중부 4군은 지리적으로는 인접해 있지만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성격이 강해요. 4개 군에 필요한 공통분모를 찾아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Q 지역에서 줄곧 생활하셨지만 정치적 기반은 따로 없으셔서 힘드실 텐데요.
A 아버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열심히 다니는 거죠. 귀를 열고 농촌을 다니며 농가의 어려움을 듣고, 기업체를 방문해 영세업체나 근로자들의 어려움에 눈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2·30년 전에도 논두렁 밭두렁을 다니며 주민들과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정치를 하셨던 분입니다. 요즘에야 많은 정치인들이 그렇게 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지요. 참 열정적이셨어요. 수행비서들이 힘들어서 교대로 근무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특별한 정치적 기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줄곧 이 지역에서 생활해 왔고, 또한 아버님을 기억하시는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고 계십니다.

Q 그동안 의사로서, 시민운동가로서 활동해 오셨는데 굳이 정치를 하겠노라고 나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A 한 지역의 발전은 어떤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느냐에 따라 가름됩니다. 평소 저의 소신은 '나는 지역을 위해 일하고 지역을 발전시키고 주민에게 봉사는 말꾼이 아닌 일꾼이 되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습니다. 물론 의사로서의 사명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시민운동가로서의 김영호를 기억해 주시는 분들도 많구요. 하지만 저 개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많은 한계를 느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병 든 가지를 쳐낸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보다 큰 조직적인 힘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Q 아직은 청주의료원장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사실 저도 얼마 전에 가보고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첨단의료복합단지의 오송 유치에도 큰 힘을 보태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A 다행히 의료분야가 제 전문분야이다 보니 오송 유치의 당위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차례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정우택 전 지사님을 비롯해 지역의 많은 분들이 힘을 함께 해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하신 청주의료원은 청주의료원이라는 이름만 빼고는 다 바꿨다고 봐야죠. 건물 증·개축부터 서비스, 첨단 의료장비 도입 등 대단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상전벽해라는 말씀을 하셨을 정도였어요.

Q 청주의료원엔 어떻게 가시게 된 겁니까?
A 그 때가 2006년 지방선거가 막 끝났을 때였어요. 아시겠지만 그 때 제가 증평군수에 출마해 낙선하고 나서 밖에 나오는 것조차 싫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환자만 보고 있었는데 지인이 청주의료원장을 공모한다며 답답한데 좁은 증평을 벗어나 넓은 곳에서 일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더군요.

Q 예전에 청주의료원 하면 굉장히 시설이 낙후된 곳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환자들이 꺼려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는데요.
A 그러니 직원들 월급도 주기 힘들만큼 매년 적자였죠. 병원에 바퀴벌레가 돌아다녔을 정도니까요. 처음 출근해서는 동네 병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녔습니다. 환자 좀 보내 달라구요. 그 뒤 한 달쯤이나 지났을까 어느 의사 모임엘 나갔는데 한 신경외과 의사가 청주의료원으로 환자를 보내려고 했더니 그 환자가 자신을 무시한다며 화를 내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 이건 아니구나 싶었죠. 그때부터 복지부에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명색이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도립병원인데 병원이 낙후돼 지역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앞으로 병원을 키워갈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마침 복지부에서 병원 리모델링을 지원하는 사업이 있어서 신청서를 냈지요. 그 결과 국비 30억원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헌데 복지부의 병원 리모델링 지원사업은 도비도 함께 지원돼야 하는 사업이에요. 그래서 도청에 가서 내가 국비 따왔는데 도비를 지원해 달라고 했더니 예산이 바닥나서 지원해 줄 수 없으니 어렵게 따온 국비 30억원을 반납하라는 겁니다.

Q 참 안일한 처사가 아닐 수 없네요. 자기들이 국비를 가져와도 모자를 판에.
A 그대로 병원에 와서 직원들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직원들이 난리가 났죠 뭐. 개원한 지 20년이나 된 청주의료원은 그동안 단 한 차례도 리모델링이나 대규모 시설확충이 없었어요. 그래서 가장 낡은 곳을 몇 군데 사진으로 찍어서 무작정 도지사실로 향했습니다. 무작정 밀고 들어갔죠. 정우택 지사가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내가 새로 온 청주의료원장인데 도립병원은 도지사가 주인이다. 헌데 너무 낡고 후져서 주민들이 외면하는데 이게 무슨 도립병원이냐. 충북도민을 위해 일하러 왔는데 일 할 여건을 만들어 줘야 되는 거 아니냐. 도비 안 주면 원장 때려치우겠다고 으름장을 놨어요. 그랬더니 정 지사가 추경에 오려 도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Q 한 마디로 성공신화죠. 적자에 허덕이던 병원을 수백억을 투자해 흑자로 돌려놓았으니.
A 4년 반 동안 국·도비 520억원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참 갑갑한 일이 있었어요. 1, 2, 3층에 한방센터를 세우고 그 위로 4개 층을 리모델링하는데 공무원들이 한방센터를 먼저 짓고 사업이 완료된 후에 리모델링을 하라는 겁니다. 사업 자체가 달라서 함께 공사를 하면 감사대상이라는 겁니다. 제가 따져보니 그렇게 하면 3억이 낭비되는데 국비건 도비건 모두 다 국민의 세금인데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결국 제가 사인을 하고 1년 지나서 경고를 먹었죠. 누가 봐도 한꺼번에 공사하는 편이 이익인데 공무원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해요. 자기 몸보신과 징계를 피하는 것이 우선이죠. 게다가 청주의료원 직원들마저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데 답답했죠.

Q 하루 이틀 듣는 이야기가 아니니 뭐라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암튼 힘든 일이 많았겠어요.
A 그 일을 겪으며 의료원 직원들에게 제가 늘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경쟁상대는 공무원이 아니다, 다른 병원의 직원들이라구요. 처음엔 직원들이 저러다 가겠지 반신반의 했어요. 그래도 뭔가 하나씩 새롭게 만드는 걸 보여주니 직원들 사이에서도 '뭔가 하는 사람'이라고 그때부터는 잘 따라 주었습니다. 정말 고마운 것은 처음엔 삐딱했던 노조위원장이 오히려 나중엔 저보다 먼저 직원들을 설득해 주었어요.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퇴임할 때는 새로 짓는 정신병동 건축비까지 다 확보해 놓고 왔습니다.

Q 건물만 봐도 뿌듯하시겠어요.
A 무엇보다 청주의료원은 어려운 서민, 장애인, 노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병원입니다. 서민들도 좋은 병원에서 싸게 진료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게 됐구요. 많은 분들이 합심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즘엔 다른 지방 의료원에서 견학을 옵니다.

Q 너무 숨가쁘게 달려온 것 같은데 잠시 쉬어갈까요? 어릴 때 이야기 좀 해 주시죠.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내셨던데 서울이 고향이신가요?
A 아뇨, 음성에서 태어났어요.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때 서울로 전학을 간 겁니다. 어린 시절은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서울약국이 있는 시장통에서 컸어요. 장날이면 북적북적 시끌시끌했죠.

Q 생각나는 추억 있으세요?
A 그럼요. 시장통에 오일장이 서면 물건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뒤엉켜 정신이 없었어요. 주머니가 빵빵하게 넣고 뛰어다니던 고소한 번데기 냄새, 할아버지 막걸리 심부름을 다니던 싸전거리, 아이스케키를 사먹으려 빈병을 들고 뛰던 일. 아,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시절 자전거를 막 배웠을 때였어요. 요즘처럼 아동용이 아니라 어른용을 겨우 탔는데 한 번은 꼬마를 피하다가 생선가게로 돌진해 진열된 생선 더미에 보기 좋게 엎어진 적이 있었어요. 화가 난 주인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며 저에게 그 생선을 다 사가라는 거예요. 안에 계시던 아주머니가 그 소란에 나와 저를 보시더니 '서울약국 큰아들' 아니냐며 아는 체를 해 주시는데 덜컥 눈물이 나지 뭡니까. 암튼 엄마가 달려오셔서 제 옷에 박힌 낚시 바늘 몇 개를 빼 주시고는 집엘 가자고 하시는데 제가 울먹이면서 아저씨가 저 생선 다 사가랬다고 하며 머뭇거렸어요. 그제야 어머니도 상황 파악이 되셨는지 생선을 두 박스나 사셨어요. 덕분에 한 달 동안 생선만 실컷 먹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 서울약국 큰아들의 자전거 사건 이야기가 골목을 누볐어요.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서울대에 입학했을 때도 개구쟁이였던 서울약국 큰아들 얘기가 시장통에 왁자했었답니다.

Q 시장통을 지키는 어르신들에게도 즐거운 추억이겠는데요. 좀 전에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고 하셨는데 굳이 그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가신 이유가 궁금하네요.
A 사실 전 멋모르고 갔어요. 아버님이 결정하신 일입니다. 그 때 아버님이 음성극장을 하셨는데 제가 공부는 안하고 친구들까지 데리고 만날 극장에 가서 영화만 보고 있으니 걱정이 되셨던 게죠. 아버님은 어렵게 공부를 하셔서 애들은 서울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계셨는데 그 일을 계기로 결심을 하신 거죠. 덕분에 함께 유학을 간 세 살 아래 남동생과 저희를 뒷바라지 해 주신 할머니가 고생 많으셨어요.

Q 적응하는데 어렵진 않으시던가요.
A 개교한 지 얼마 안 된 충무초등학교에 전학 갔는데 얼굴도 시커멓고 사투리를 쓰니 애들이 '촌놈, 촌놈' 하며 따라 다녔어요. 기분 나쁘죠. 자존심도 상하고. 그래도 시골에서는 반장도 했고 나름 잘나갔는데. 한 번은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한 아이가 쫓아오며 또 촌놈이라고 놀리기에 화가 나서 몇 대 때려 줬어요. 시골서 맨날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쌈박질 하고 놀았으니 허약한 서울 애들이 상대가 됐겠어요. 그랬더니 또 다른 녀석이 와서 시비를 걸기에 화장실 뒤로 데리고 가서 한판 붙었죠 뭐. 그 뒤로는 놀리지 않더라구요.

Q 요즘 같으면 학교의 짱이었네요. 그래도 우리 지역 출신이 가서 서울학교를 평정했다니 암튼 기분은 좋습니다. 그럼 중고등학교는요.
A 경복중과 경복고를 나왔습니다. 제가 반에서 9등, 10등 쯤 했는데 당시 경복중은 반에서 5등은 해야 했어요. 담임선생님이 안전하게 용산중학교에 지원하라고 하셨는데 또 자존심이 상했어요. 그래도 서울에 공부를 하러 왔을 때는 일류중학교를 간다고 온 거잖아요. 그래서 아버님이랑 삼촌에게 이야기를 해서 경복에 원서를 냈습니다. 그해부터 시험 출제 방식이 확 바뀌었는데 제가 공부한 방식과 잘 맞아 떨어졌어요. 그래서 시험을 잘 봤어요.

Q 지금도 대도시로 가면 오히려 성적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적응을 잘 하셨네요.
A 지금도 삼촌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게 그 부분이에요. 중학교에 가서 처음 시험을 봤는데 반에서 27등인가 했어요. 성적표를 받아 갔더니 삼촌이 10등 안에도 못 들면서 뭐하러 서울서 공부를 하냐며 보따리를 싸라고 난리였어요. 음성고를 나온 삼촌은 한양공대에 재학중이셨거든요. 그때부터 친구들은 놀러가도 저는 공부를 했어요. 삼촌이 굉장히 엄했어요. 집에 가면 밥 먹고 무조건 책상에 앉아요. 책상에 엎어져 자는 날도 많았습니다. 2학년 올라가서 떡 하니 1등을 받아갔는데 삼촌은 '계속 그렇게 해라'고만 하셨어요. 요즘도 명절 때 찾아가면 반가워하시며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Q 고등학교 시절은 어떠셨나요?
A 1학년 때 좀 놀았더니 10등 밖으로 밀려났어요. 그랬더니 삼촌이 또 보따리를 싸라는 겁니다. 시골 가서 똥지게나 지라구요. 자존심이 상해서 또 공부했죠. 난생 처음 수학 과외까지 받아 봤으니까요. 덕분에 2학년 땐 5등 안에 들 수 있었습니다.

Q 서울대 의대를 가셨는데 어려서부터 꿈이 의사였나요?
A 아뇨. 전자공학과에 가고 싶었는데 아버님이 의대를 원하셨어요. 아버님은 서울대 약대를 나오셨는데 원래 의대를 가고 싶으셨대요. 제 의사와는 관계없이 아버님이 의대 원서를 쓰셨어요.

Q 의대 학생회장까지 하셨던데.
A 그땐 데모를 많이 하던 때였어요. 밖에서는 문리대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최루탄이 터지는데 의대생들은 공부만 하고 있었어요. 마침 시간이 돼서 교수님까지 들어오셨는데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요. 나라가 있어야 의대도 있고 의사도 있다고 소리를 질렀죠. 그랬더니 교수님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총을 가지고 오셔서 데모하는 놈들은 다 쏜다고 하시지 뭡니까. 그도 그럴 것이 하도 데모를 해서 2, 3년 간 강의를 못하셨다더군요. 저도 그냥 있을 수는 없어서 책상 위로 올라가 교수가 학생을 쏘면 그 총에 맞겠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자리에 앉아있던 친구들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밖에서 친구들이 피 흘리고 있는데 너희는 여기서 뭐하냐구요. 그래서 의대도 데모 행렬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몇 달 도망을 다녀야 했지만요. 그 다음다음 핸가 학생회장 선거를 하는데 친구들이 저를 떠밀었어요. 데모하다 졸지에 학생회장이 된 거죠.

Q 그럼 사모님은 언제 만나신 건가요? 프로포즈를 어떻게 하셨는지도 궁금하구요.
A 집사람은 이화여대 의대를 다녔는데 의료봉사 서클에서 1학년 때 만났어요. 남학생들이 말을 걸면 톡톡 쏘아 붙이는데 이상하게 내가 말을 걸면 상냥하게 대해 줬어요. 그리고 프로포즈가 궁금하다고 하셨는데 특별히 청혼을 한 건 아니에요. 오랫동안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진도가 나간 거죠. 그렇게 만나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기에 나도 해야 되나 보다 해서 아버님에게 장가 가겠노라 신고를 했죠. 그 때가 본과 3학년이니까 스물여섯 살이네요.

Q 의대를 졸업하고 백병원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개업을 증평에서 하셨네요.
A 아버님이 음성에서 약국을 개업하신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아버님께 공부한 사람이 고향에서 일해야 한다고 하셨다는군요. 아버님 역시 제게 배운 사람이 고향에 와서 일해야 한다고 증평에서의 개업을 권하셨어요. 그 뜻을 아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Q 그렇다면 회장님에게 진천은 어떤 지역이신지.
A 진천, 음성, 괴산에서 국회의원이셨던 아버님께서는 늘 태령산 기슭에서 탄생한 김유신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정말 살기 좋고 아름다운 땅이라고 하셨어요. 또 정우택 전 충북도지사께서 제게 고향인 진천에서의 봉사를 권하셨습니다. 여러모로 애틋한 곳입니다.

Q 야구 동호회 회장직을 맡고 계시는데 진천에도 야구 동호인이 꽤 많죠?
A 예. 진천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야구 동호인들이 많습니다. 15개 클럽에 300여명의 동호인이 있습니다. 그동안은 마땅히 연습할 만한 공간이 없어서 고민이 많았는데 다행히 진천군에서 부지를 마련해 야구장을 조성 중에 있습니다.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계기로 진천 야구가 발전하고 나아가 진천의 화합과 발전에 기여하기를 희망합니다. 저 역시 사회인야구연합회의 단합과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명실상부한 건강도시 생거진천을 만드는데 작은 힘을 보태겠습니다.

Q 이사장님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어떤 점일까요?
A 열심히 일하는 게 저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Q 간단하시네요. 마지막으로 중부4군의 군민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요.
A 저는 지방과 농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향토사회, 향토문화, 향토산업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찾아보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산업이 많습니다. 지역에 있는 자원을 활용해 전통산업을 발전시키고 전통문화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키워내 경쟁력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 중부4군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살았으면 하는 거죠. '농민과 약자를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는 신념을 갖고 지역주민을 위해 헌신하신 아버님의 정치 이념을 이어받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지역 주민들이 함께 하고 싶은, 희망 정치일꾼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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