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수 진천문화원장
남명수 진천문화원장
  • 정선옥기자
  • 승인 2008.12.05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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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 Talk 열번째 손님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청하자 상대를 헤아리는 눈빛과 노련한 말솜씨에서 그의 연륜이 묻어 나온다.
이미 공직을 떠난 지 오래지만 젊은 시절을 지역과 나라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 조금은 더 편하게 지낼 수도 있겠건만 아직 그의 안에 식지 않은 열정이 그를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모양이다.
지역의 어른으로서, 진천 문화원의 수장으로서, 또한 대학유치 위원장으로서 끊임없이 일더미 속으로 자신을 내모는 남명수 진천문화원장의 일에 대한 열정을 들어본다.


Q 예전에는 문화원이 정부 산하기관 아니었습니까?
그랬지요. 지난 정부부터 문화원을 사회단체로 묶어버렸습니다. 문화원장 하면 옛날에는 지역의 어른으로 대접받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Q 지역에서 문화원의 역할이란 무엇일까요?
지역이 빠른 기간에 발전하다 보니 문화적인 측면을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문화라는 것은 지역 주민의 삶의 질과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삶의 기반을 닦아 놓았으니 지역 주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젊은 층을 유치하려면 지금보다는 보다 전문적인 인재의 흡수와 투입이 필요합니다. 문화원에서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저 역시 문화원이 이렇게 일이 많은 곳인 줄 몰랐습니다. 1년에 출입하는 사람이 만명이 넘습니다. 문화수준은 지역민의 교육수준과도 일치합니다. 현재 진천 문화원에서는 30개의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70세가 넘은 분들이 기타를 배우러 오십니다. 너무 보기 좋지 않습니까? 또 한 분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시는데 이분은 한자를 배우러 오는 분이셨습니다. 사석에서 만나 연유를 물었더니 영어나 하다못해 리모컨 하나 다루는 것까지 며느리를 이길 수가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한자 공부인데 몇 글자 써서 걸어 놓으면 한자를 배우지 않은 세대인 며느리인지라 그 앞에서는 꼼짝 못한다고 하셔서 한참을 웃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Q 현재 문화의 집은 어떻게 사용하고 계시는 겁니까?
예전에 문화원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문화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로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는데 교육의 질도 매우 높은 수준입니다. 원래는 군에서 해야 할 일이지요. 관계당국의 보다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문화원의 예산만으로는 부족한 형편입니다.


Q 지난 생거진천문화축제 때 명칭을 가지고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만.

명칭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경주에서 화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표권 문제로 더 이상 사용이 어려웠습니다. 지역 축제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한가지 명칭이나 테마로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어차피 명칭이나 축제 내용을 주기적으로 바꿔줄 필요는 있습니다.

Q 공직에 계시면서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일까요?
아주 오래된 이야깁니다만 업무 때문에 사석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야 다 아시겠지만 어렵던 시절이지 않습니까? 들일을 나갈 때면 별다른 반찬 없이 광주리에 밥과 된장을 담아 내오고 끼니때가 되면 밭에서 딴 상추와 고추를 곁들여 먹는 것이 다였지요. 시골길을 가는데 멀리서 한 부부가 저를 부르더라구요. 식사를 권하는데 마침 점심 때도 됐고 시간을 놓치면 영락없이 굶게 생겼기에 같이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아, 그런데 보자기를 걷어내고 보니 된장에 구더기가 잔뜩 있지 뭡니까? 허허, 이것 참 이걸 먹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 건지 순간적으로 고민스러웠는데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자리를 거절하고 일어서면 저를 부른 두 사람이 얼마나 무안해 하겠습니까? 그래서 “아유, 된장은 이런 게 있어야 좋은 겁니다”라며 젓가락으로 건져내고는 상추에 싸서 밥 한 그릇을 다 비웠습니다.
그런데 읍장이 되어 사석의 경로당을 찾아갔다가 그분들을 다시 만났지 뭡니까. 얼마나 반가워 하시던지요. 그 때 밥을 먹길 잘했지요. 지금도 가끔 제 안부를 물어보신답니다.

Q 군의원으로 계실 때 이야기 좀 해주시겠습니까? 공직에 계셨을 때와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으셨을 텐데요.
획기적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 많았지만 군의원이라는 것이 공무원 신분일 때와는 많이 다르더군요. 게다가 함께 근무하던 공무원들과 대립한다는 것도 쉽지 않구요. 좋은 점은 행정에 대한 내용을 알기 때문에 대안 제시가 가능했다는 겁니다. 군수가 하는 일이 잘 되었으면 잘했다고 이야기해 주고 잘못 되었으면 지적해 주고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군이 발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지적 후에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합니다. 견제는 오히려 발전의 저해요인입니다. 덧붙여서 의회의 의원들은 절대로 자기 사업체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쩔 수 없이 이권이 개입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Q 경기가 너무 침체되어 걱정들이 많은데요. 진천상권 살리기에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요.

옛날 덕산의 구말장은 대단히 큰 시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장사가 점점 안되기 시작했지요. 그러다 보니 장사 하는 양반들이 물건을 비싸게 받지 뭡니까? 떨어진 매출만큼 보상받기 위해 물건 값을 올려버린 거지요. 버스만 타면 더 큰 장에 가서 더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가 있는데 누가 비싼 물건을 사 쓰겠습니까? 그러면서 장이 소멸되어 버린 거지요.

상권은 언제든지 지역 여건에 맞춰 발전해야 하는 겁니다. 소비자가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상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일례로 시장에서 동태를 파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그 앞에만 모여들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유심히 봤더니만 이 할머니가 상술이 대단합디다. 앞에 내 놓기는 3마리를 쌓아놓고 5천원을 부르는데 손님이 주문을 하면 3마리를 봉투에 담았다가 아이들 주라면서 한 마리씩을 더 담아줍디다. 그 손님이 다음 장날에 그 할머니를 찾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습니까?

당장의 적자에 연연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근처에 아무리 공장이 많고 소비자가 많아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상인들이 소비자의 맘에 들도록 여건을 맞춰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소비자도 굳이 차비 들여 멀리 않나갑니다. 자연스럽게 찾아오게 되어 있지요.

Q 수도권 규제 완화로 인해 지방이 타격을 많이 받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들을 합니다만 원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1986년 수도권 규제가 발표되면서 사실 진천도 덕을 많이 봤습니다. 그때 초평과 덕산의 농공단지가 기반을 닦았으니까요. 저는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규제 완화를 계기로 수도권으로 진입하려는 기업들에게 획기적인 혜택을 부여해야 합니다. 싸움을 하더라도 내 것 찾아가면서 해야 하는 겁니다. 진천은 교통이 얼마나 발달한 지역입니까? 게다가 경기도와 인접한 지역 아닙니까? 기업들에게 수도권 인접 지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유치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모름지기 진정한 지도자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치고 나가서 군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Q 농공단지 말씀을 하시는데 단지 조성과 기업 유치에 많은 기여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공업 관련 업무를 담당해 오시지 않았습니까?
14년에 걸쳐 총 700개의 공장 허가를 이 손으로 내줬습니다. 보람이기도 하구요. 신정농공단지 조성을 시작으로 이월농공단지를 제외하고는 제 손을 거치지 않은 지구가 없습니다. 사실 진천이 인적 자원이 풍부했던 곳입니다. 아시겠지만 1972년도에 진천지역 호적 인구가 16만의 번화한 지역이었습니다. 충북도내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자원을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던 것이 1983년에는 3만9천으로 줄어 있고 공장 하나 없이 양조장만 6개가 있었습니다. 84년 공업계에 있었는데 농공단지 유치를 위한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당시는 음성과 충주, 청주 등지에 비료공장만 몇 개 있을 때였으니까요. 음성이 유력한 후보지로 떠올랐었지요. 그 때 보고서에 이렇게 썼던 기억이 납니다. 포장도로 1m도 없고 공장 하나 없이 양조장만 6개 있는 아파트 하나 없는 인구 3만 6천의 도시. 실제 상황이 그랬으니까요. 결국 우리 군이 농공지구로 지정을 받아 그 때 처음으로 12개의 공장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Q 공업계 일 담당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신다면요?
한 번은 진천 지역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여학생들을 조사해 봤더니 모두 경기도의 제약회사에 가 있지 않겠습니까? 지역의 젊은 인력이 다 빠져나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농공단지에 제약회사를 유치하려고 했더니 법률상 농공단지에는 화학회사로 분류되는 제약회사는 입주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 때 포기하지 않기를 잘 했지요. 설득 끝에 법률 개정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광혜원에 제약회사를 유치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우리의 자원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지역에서 취업을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관내에 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기업이 허가 신청서를 접수하면 132개의 도장을 받아야 했고 45일이라는 처리기간이 걸리던 시절이었습니다만 우리 진천은 8일 안에 모든 행정절차가 끝났습니다. 그 덕에 창업지원법이 개정되어 처리기간이 15일로 단축된 겁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관내에서 튼튼하게 성장해 온 기업들이 많습니다.


Q 원장님께서 워낙 일을 많이 하시다 보니 사모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 하고 싶으신 말씀 없으십니까?
사실 우리 집사람과는 중매 반, 연애 반 결혼했습니다. 처음 시집 와서 3년 간 제 월급을 저의 어머님이 직접 관리를 하셨는데도 그 3년 동안 돈 달라는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병간호를 하면서 짜증 한 번 내본 적이 없습니다. 고생이 많았지요. 내사를 충실히 돌봐줬습니다. 밖에서 일하고 들어온 사람 피곤하지 않도록 배려를 많이 해 주었습니다. 음식 솜씨도 출중해서 덕분에 집에서 식사하는 시간이 즐겁습니다. 집사람 덕분에 공직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자로서 마음이 넉넉한 사람입니다. 아이들한테도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살았습니다.

Q 아이들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쭤보겠습니다만 특별한 교육관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3살 차이의 남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지 뭡니까? 집사람과 고심 끝에 애들이 싸우는 와중에 한 쪽 구석에 부부가 무릎 꿇고 앉아서 손들고 벌을 섰습니다. 그랬더니 이 남매가 싸우다 말고 놀라서 “아빠, 왜 그러세요?”하고 묻기에 “내가 부모가 돼서 너희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죄가 크니 우리가 이렇게 벌을 서는 거다.”라고 했지요. 그 뒤로는 이날까지 한 번도 싸우는 것을 못 봤습니다. 매로 다스리기 이전에 무릎 꿇고 미리 해결한 것이지요.

Q 2015년 진천시 건설에 대한 원장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진천시 건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15만명의 인구를 유치해야 합니다. 4만명에서 6만명이 되기까지 꼬박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쉽지 않지만 일단 통로는 열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진천읍의 주거계획은 76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 때 만들어진 테두리를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주거지가 집중되다 보니 이제는 포화상태가 되버렸지요. 그 밖은 자연녹지로 남아 있습니다. 시 건설을 주장하기 이전에 건설 가능한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인구 5만이 거주할 수 있는 읍의 규모가 되어야 합니다.
개발은 할 때 해야 하는 겁니다. 군유지만 많이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개발을 해야 쓸모 있는 땅이 되는거지요.

Q 군민들께 문화원장님으로서 한 말씀 해 주시지요.
군민이라는 주체 없이는 문화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군민은 문화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군민 여러분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또한 늘 군민의 가까이에 있고 생활 속에서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문화적 여건을 만들어 가는 것이 저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군민이 원하는 바가 있으면 행정기관과 상의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34년 공직생활에 여한이 없다는 남명수 원장.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당당한 어깨에서 든든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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