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회 진천중학교 총동문회장이상훈의
김경회 진천중학교 총동문회장이상훈의
  • 정선옥
  • 승인 2009.02.27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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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 Talk 열네번째 손님


'소신'과 '뚝심'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니고 18번곡이 '흙에 살리라'라는 농촌인 김경회 34, 35대 前 진천군수를 만나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과 좀 더 가까워지고 어려운 난국을 풀어가는 해답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면을 들여다 보는 취중토크현장에 마주 앉았다.

첫잔부터 소주를 물리고 고장 술인 천년주로 시작한 취중토크는 빈잔이 채워질수록 무르익는 분위기를 틈타 주량을 묻는 질문으로 포문을 열었다.

Q 평소 주량은 어느정도 되십니까?
처음 자치신문에서 취중토크를 접했을때 '나는 술을 못마시니까 취중토크에 나가기는 힘들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술을 전혀 못했었는데 사람 만나는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이제는 조금 늘어서 두세잔 정도는 마십니다. 그래도 그간 취중토크에 나온 사람중에 제일 못할 겁니다.

Q 교직생활을 오래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특별히 교직에 입문하게 된 동기가 있으십니까?
옛날에는 집이 가난했으니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였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밭을 갈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더군요. 뒤를 돌아보니 아버님이 장대를 짚고 서계시다가 제가 돌아서자 다시 제 허벅지를 때리시지 뭡니까? 그리고 저를 노려보시면서 “내가 농사 지으라고 공부시켜더냐? 농사짓고 살 요량이면 당장 나가!” 하고 소리치시지 뭡니까? 그래서 그 길로 청주에 사시는 누님 댁으로 무작정 도망쳤습니다. 흙 묻은 장화 차림으로 들어서는 저를 보더니 누님은 아무 말씀없이 저를 받아주시더군요. 속 깊은 분이어서 상황을 짐작했을 겁니다. 그 때 매형의 권유로 교직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께도 면목이 좀 섰구요.

Q 두분 다 교직에 계시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셨을 텐데 굳이 진천으로 돌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농촌에서도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아버님이 저를 내치실 때 당신이 살아오신 농촌이 얼마나 암울하고 힘겨우셨으면 그리 매몰차게 몰아부치셨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아픈 농촌을 내가 가서 보듬어 보자 하는 생각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님이 그토록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가난하고 힘겨운 농촌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부유하고 편안하게 모두가 잘 살수 있는 농촌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Q 농사를 짓기 위해 귀향했다고 하셨는데 직접 농사를 지어보시니 어떠셨나요? 생각만큼 성과를 거두셨나요?
처음 고향으로 돌아와서 시작한 일은 비누공장이었습니다. 비누공장에서 소를 사육하는데 필요한 사료값 정도만 수익을 낼 수 있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한우를 키우기 시작했었는데 이후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뉴질랜드에서 들여온 앵커스를 5마리 분양받았었습니다. 방목에 익숙한 앵커스를 좁은 외양간에서 키우려 했으니 가뜩이나 난폭한 소의 사육이 쉽지가 않았지요. 덕분에 여기 저기서 못키우겠다고 떠맡다시피 한 소를 키우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쏟은 정성은 말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잘은 몰라도 당시 국내에 유입된 앵커스가 수천마리는 될텐데 번식을 시킨 사람은 제가 유일했으니까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 소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오죽했으면 농업기술센터에서 7개월밖에 안 된 소를 다 컸으니 팔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참 무지했지요. 설상가상으로 80년대 초 소값이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어쩔수 없이 3년이나 키운 소를 사들일 때의 반값에 팔게 되었습니다. 소를 키우느라 비누공장도 신경쓰지 못하고 이래저래 빚만 떠안게 되었습니다. 남은 거라곤 당시로서는 거금인 2천여만원의 빚과 조그만 트럭이 전부였습니다.

Q 그럼 그 때에 바로 정계에 입문하신 건가요?
아爛求�. 애초에 정치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감자 재배를 장려했었는데 어느 날 보니 농민들이 감자를 캐다 버리지 않겠습니까? 정부가 감자 생산에만 열을 올리고 판로 개척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감자값이 폭락을 한 것이지요. 버려지는 감자를 대도시에 내다 팔아주면서 좀 더 본격적으로 감자 장사에 뛰어들어 신안에서 평창까지 꼬박 1년을 트럭에서 쪽잠을 자며 감자산지를 쫓아다녔습니다. 겨우 빚을 거의 갚아갈 무렵이었는데 감자 무게를 못견딘 트럭에 한계가 왔습니다. 차를 바꿔야 했는데 사람 일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어서 새차가 나오질 않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때 잠깐 쉬면서 동네 어르신들 관공서 심부름을 해드렸는데 고개를 넘으면서 쉬어가던 잣나무가 이제는 제법 굵어졌습니다. 한참 감자장사를 할 때 김종호 의원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분이 저를 잘 보셨던 모양입니다. 제가 장사를 하러 집을 비운 사이 세 번이나 저희 집엘 다녀가셨답니다. 마침 집에서 쉬고 있으니 집사람이 “도지사까지 지내신 분이 저리 찾아오시는데 가서 이야기라도 듣고 와야 하는거 아니냐?”고 하길래 저 역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 분 사무실을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어 이 길에 들어서게 된 겁니다.
Q 블로그에 올려진 글을 보니 사모님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시던데 연애시절 이야기좀 해주시겠습니까?
괴산군 청천면 대후초등학교에서 동료 교사로 첫 인연을 맺었습니다. 당시 몸이 허약해 병가가 잦은 아내를 위해 체육수업 등 대체수업을 자주 해주곤 했는데 그때 어렴풋이 정이 든 것 같습니다. 물론 아내와 동향이라는 것을 알고 제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 뒤 군대를 가게 되었고 제대 후 괴산 칠성 초등학교로 복직하면서 아내(지태현, 56)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고생 많이 했지요. 늘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Q 34대, 35대 최장기간 군수직을 역임하셨는데 보람으로 남는 사업과 아쉽거나, 미흡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으시다면요?
가시적인 사업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화랑관과 테마공원을 가장 보람있는 사업으로 꼽고 싶습니다. 변변한 운동장 하나 없는 우리의 아이들이 마음껏 춤추고 노래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고 또한 전국 규모의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아쉽고 미흡한 점은 더 많습니다. 하고 싶었던 일이 많았는데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떠난 것이 서운합니다만 뭐 어떻습니까? 저보다 잘 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덴데요.

Q 다음 지방선거는 회장님의 행보에 따라 선거 판도가 바뀔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회장님께서 군수로 출마하시지 않겠냐는 이야기들을 하는데요. 정확한 의중을 듣고 싶습니다.
호사가들 사이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마음을 다 비웠습니다. 군수에 재출마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새로운 군수가 누가 되던지 전직 군수로서 진천군의 발전을 위해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것입니다.

Q 중부 4군의 성공시대를 주장하셨는데 4개군 통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습니다. 지금의 행정구역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주민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까 하는 목적달성의 수단으로써의 행정구역이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발전을 주도한 민족답게 생활편익과 지방자치의 효율성 등을 고려한 행정구역 개편의 필요성은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요즘 세간이 교육문제로 떠들썩 합니다. 게다가 진천 학생들의 학력이 하위권으로 밝혀지면서 학부모들의 불안이 가중되고 있는데, 회장님은 교직 생활을 오래 하셨고, 특목고 유치를 주장하셨을 만큼 교육에 열의가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천의 교육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학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들이 성적에 대해 넘치는 욕심을 줄이고, 인성이라는 그릇을 크게 만들려고 노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체력, 사고력, 직관력, IQ 보다는 EQ의 향상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등급을 메기기 위한 지식을 강요하기 보다는 학습한 지식을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이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Q 얼마전에 진천중학교 총동문회 회장으로 선출되셨는데 진천중학교의 발전을 위해 구상하고 계시는 사업이 있으신가요?
우선 부족한 저를 회장으로 추대해 주신 동문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교육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진천중학교가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드는 명실공히 명문학교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앞으로 5년 이내에 많은 중학교들이 기숙사 건립을 추진할 것으로 보입니다. 진천중학교에도 빠른 시일 내에 기숙사를 건립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보다 좋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더불어 동문회가 주축이 되어 장학재단 설립을 추진토록 할 것입니다. 우리 지역의 인재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 지역의 우수한 인재들을 우리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것 역시 필요한 일입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진천중학교 뿐만이 아니라 진천지역의 고등학교들 또한 상생하고 진천이라는 브랜드를 전국에 알려 떠나는 진천이 아닌 돌아오는 진천을 만들 수 있는 계기로 삼을수 있을 것입니다.

Q 예전에 테니스를 즐기셨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여전하십니까?
제게 개인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새벽시간 밖에 없습니다. 테니스는 이른 아침 한시간 정도 하고, 한달에 한번씩 진사포럼(진천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린 모임) 회원들과 함께 산행을 하고 있습니다.

Q 화랑과 태권도 사업에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진천군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지방자치는 지방의 정체성 확립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고장에만 있는 것. 그리고 우리 고장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화랑과 태권도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룬 김유신 장군이나 고려의 개국공신 임연장군, 조선의 공신 이거이장군 등 타지역에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역사가 바로 진천에 있습니다. 진천송씨, 상산임씨, 진천김씨, 진천곽씨 등 유서깊은 집안들이 세거하여 온 지역입니다. 우리 고장 진천에는 지역을 지키는 우리 조상의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 화랑과 태권도를 육성하고 보급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김회장님 개인 블로그 제목이 “ 함께 꾸는 꿈이 현실이 된다”라고 되어 있던데 개인적으로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요?
증평/괴산/진천/음성 지역의 일꾼으로써 군수 재임 시절에 쏟았던 열정을 중부권 성공시대를 만들어 가는데 쏟겠습니다. 지역의 일꾼으로서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지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심히 살피겠습니다. 또한 가지관의 혼돈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정체성을 일깨워 주고 가치관을 정립시킬 수 있는 모델을 이곳 살아서 꼭 살아보고 싶은 곳, 생거진천에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Q 가족들에게 하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지면을 빌어 말씀해 주시지요.
이날까지 저의 뒷바라지를 위해 고생한 아내와 장녀 태경이, 차녀 보연이, 삼녀 보경이, 사녀 태선이 ,장남 태균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Q 진천군민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말씀 해주시겠습니까?
김경회는 미완의 인간 입니다.
부족한 사람을 사랑해 주신 여러분이 계시기에 제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저 김경회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앞으로 달려나갈 수 있도록 좀더 채찍질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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