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면 두촌리 선옥신(斗村里 善玉新) 마을
덕산면 두촌리 선옥신(斗村里 善玉新) 마을
  • 정선옥 기자
  • 승인 2009.02.27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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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두촌리(斗村里)는 송티명월(松峙明月), 원당약천(元堂藥泉), 상대현가(上臺弦歌), 매산낙조(梅山洛照), 사양낙안(沙陽落雁), 화전접무(花田蝶舞), 석실장암(石室帳岩), 옥동도화(玉洞桃花)라 일컬어지는 경치가 빼어나기로 이름난 두릉팔경(斗陵八景)을 품은 곳이다. 마을에 들어서 고개를 들면 눈길 닿는 곳마다 크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윽한 풍광이 펼쳐지고 풀섶의 돌멩이 하나에도 사연이 가득하다.

후손들이 돌아올 고향은 사라져도
떠나는 이들의 가슴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동경


▶ 선옥신(善玉新)마을 이야기
자연마을인 안말과 동남쪽에 있던 원봉, 서쪽에 있던 선옥골을 아울러 이루어진 선옥신(善玉新)마을은 예전에 인근의 기전리 선옥(善玉)마을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 최초로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선옥신'이라 불린다. 마을 동북쪽 매산에는 900년 가까이 지역을 근거지로 세거한 진천 송씨(鎭川 宋氏)의 중시조(中始祖)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의 묘가 남아 있고, 도로가 나면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지나온 세월만큼 아름드리 대추나무가 줄지어 서있던 줄대추나무거리의 추억이 마을의 유구한 역사를 짐작케 한다. 길 하나, 골짜기 하나에도 마을 사람들은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며 오랜 세월을 함께 공존해 왔다.

▶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의 이야기

고려 중기의 문신 송인(宋仁)은 인종 4년 이자겸의 난 때 인종을 호위하다가 척준경(拓俊京)의 난군(亂軍)에 의해 피살되었다. 타던 말이 시신을 수습해 와 매산에 묘를 쓰고 말이 죽자 후손들이 송인 선생의 묘 곁에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난이 평정된 후 좌리공신(左理功臣)에 추증(追贈)되었고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졌다. 공의 묘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 불리는 지형으로 예로부터 매화가 지면 그 향기가 사방에 퍼지는데, 매화가 지는 명당에 터를 잡으면 온 세상을 교화할 수 있는 성현이 나온다고 풍수가들은 이야기한다.

▶ 인심 좋고 살기 좋은
두루지 열두 동네 이야기

낮은 구릉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마을은 골짜기마다 두세 가구씩 터를 잡고 살아 옛날 멀리서 온 손님은 집을 찾기 위해 12고개를 다 돌아야 했다고 한다. 일찍이 너른 들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이 마을에는 두레가 발달하였다. 두레는 노동력의 효율적인 분배로 소농경영(小農經營)의 어려움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성인남자가 없는 과부나 노약자, 병약자도 공동노동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실용적이면서도 우리 조상들의 미덕이 그대로 드러나는 자연발생적 제도다. 그 전통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마을은 사시사철 농한기 없이 분주하고 소소한 이웃의 일도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의지하며 살아오고 있다. 외지에서 이사 오는 이에게도 조금의 서운함 없이 품어 안아 들어오는 이는 있어도 나가는 이는 없었던 마을이다.

▶ 태어난 이에게도 시집온 이에게도
한결같은 고향이야기

상수도 시설이 들어서면서 마을 앞 안말샘에서 피어나던 동네 아낙들의 웃음소리는 사라졌지만 유독 선옥신 마을 사람들은 정이 깊다. 마을 주민이라야 평균 60세가 넘는 50여명이 전부지만 사람들은 일가처럼 의지하고 가깝게 지낸다. 포천댁, 목포댁, 조치원댁…. 시집 와서 수십 년을 이곳에서 며느리로, 아내로, 어머니로 살아온 이들에게 선옥신은 태어나 자란 곳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면서 자신들의 손으로 일구어 온 고향인 것이다. 지금이야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마을을 지나지만 처음 시집 와서는 장화를 신고 하루를 걸어야 했을 만큼 친정길이 멀어 친정부모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로 지새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선옥신마을 이야기

예년 같았으면 담배모종을 준비하고 고추이식을 하느라 분주한 시기지만 이제 더 이상 농사 준비에 바쁜 손길은 찾아볼 수 없다. 두촌리가 중부신도시로 편입되면서 이 곳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나야 하는 실정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이주를 시작해 22가구 중 이미 5가구가 타 지역으로 이주를 마쳤고 나머지 가구도 고향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름이 오기 전에 집을 비워야 하는 마을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나야 하는 서운함에 매일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다. 아직 보상 문제가 완벽히 매듭지어지지 않아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한층 서글프다. 게다가 수백년을 대대로 조상의 묘를 지키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은 산 사람의 이주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수백 기나 되는 묘지를 이장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고민이다.

앞서 이주한 주민들은 고향을 잊지 못해 틈날 때마다 마을을 찾는다. 답답한 마음에 산에 올라 마을 쪽을 바라보다 그리움이 목젖까지 차오르면 한걸음에 달려온다. 빈 집이 늘어갈수록 남은 사람들의 마음도 공허해 진다. 이끼 낀 문패를 떼어내는 촌로의 들썩이는 어깨가 떠나는 발걸음을 자꾸만 돌이켜 세운다.

/우/리/동/네/이/장/님/

이장  김남태
이장 김남태

“현실적인 보상으로 주민이
피해 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수십년을 가족처럼 지내온 마을 주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서운할 따름입니다.
모두들 하루 속히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터전에서 새 출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아직 미비한 보상 문제가 하루 속히 해결되어 마을 사람들이 더 큰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선기 노인회장
정선기 노인회장

“속히 주민들이
안정을 찾았으면 합니다”

조상 대대로 12대가 정착해서 살아온 마을입니다.
함께 고향을 지켜온 마을사람들과 헤어지고 정든 이곳을 떠나게 되어 개인적으로 섭섭한 면도 많지만 무엇보다 조상님들께도 이 땅을 지키지 못한 송구스러움이 큽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겠지요. 다들 빨리 안정을 찾았으면 합니다.

김남선 노인회총무
김남선 노인회총무

“후손들에게 물려줄
고향이 사라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태어나서 60년 가까이 살아 온 고향입니다. 이제 와서 고향을 등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저 떠나기 허전하고 서운할 뿐입니다. 우리 후손들이 돌아오고 싶어도 찾아올 고향이 사라진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픕니다.

홍희자 부녀회장
홍희자 부녀회장

“태어나 자란 고향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터전입니다”

조치원에서 시집와 44년을 살았던 곳입니다. 동네 분들과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지요. 바라는 것은 떠나기 전 함께 있는 동안만이라도, 더 자주 만나 서운함을 달래고 이제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 우리마을 유적지 -
충청북도 기념물 제91호
송인묘소(宋仁墓所)

■ 소재지 :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산 21-7
■ 시 대 : 1126년 (1857년 개수)
■ 종 류 : 묘·묘비
■ 지정일 : 1993년 11월 5일
■ 면 적 : 690㎡



묘소(墓所)는 덕산면 두촌리 두루지(옛날 山井面 斗如知)에 있고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 하며 환여승람 석총(石塚)에 진천에서 오래된 분묘라고 기록되어 있다. 1958년 봉분 확장을 위하여 다른 석재를 설치하였다가 최근에 원상복구 하였다.

봉분 주위를 장방형의 돌로 쌓은 고려시대의 독특한 분묘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묘갈(墓碣)과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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