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읍 벽암리 적현마을
진천읍 벽암리 적현마을
  • 장문수
  • 승인 2014.10.0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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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통일의 역사적 교훈 전파하는 동네


김유신 장군 영정 봉안 '길상사'…탐방객 많아
수백 년 지켜온 문화 유적이 살아 숨 쉬는 곳

▲ 적현마을 입구에 표지석이 서있다.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우리 문화유적이 살아 숨 쉬는 적현마을은 옛 전통이 깃든 동네다.
▲ 적현마을 입구에 표지석이 서있다.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우리 문화유적이 살아 숨 쉬는 적현마을은 옛 전통이 깃든 동네다.


진천군청 사거리에서 사석방향으로 300m를 가면 우제주유소가 보이고 주유소 옆 벽암길을 따라 250m쯤 가면 갈림길 왼편 17번 국도 밑으로 뚫린 굴다리가 나온다. 굴다리를 지나면 적현마을이 있다. 길 오른쪽으로는 17번 국도를 따라 논밭이 펼쳐져 있고, 길 왼편으로는 집들이 이어져 있다. 200m쯤 걸어가면 적현마을 마을회관이 나온다. 이곳이 마을의 중심이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왼편엔 농가주택이 모여 있고 오른편엔 전원주택이 모여 있다.

물물교환 활발했던 '저자목'

적현마을의 지명유래는 이렇다. 옛날에는 지역의 시장이 대체로 성곽(城郭) 밑에 생겼다. 진천지역에서는 길상사 주변에 도당산성 성곽 자락에서 보부상들이 물물교환을 했다고 한다. 이들은 백곡저수지 고개와 잣 고개를 안전하게 넘기 위해 피리를 불고 풍물을 울리며 모여들어 물물교환을 하고 함께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이 지역을 한글로는 '저자목'이라 불렀고 피리 적(笛)자와 고개 현(峴)자를 써서 적현(笛峴)마을로 쓰이게 됐다.

마을 뒤편은 봉화산 끝자락에 둘러싸여 있다. 봉화산 끝자락 숲 가운데 '오죽'이라고 불리는 검은색 대나무 밭이 있다. 적현마을은 예로부터 식수로 사용할 만큼 깨끗한 계곡물이 풍부하게 흘렀다. 지금은 이 계곡물이 많이 말랐지만, 여전히 지하수는 풍부하다. 마을 앞으로는 가까운 백곡저수지로부터 내려오는 농업용수로 농사를 짓는 농지가 펼쳐져 있다.

43가구 78명이 모여 사는 동네

적현마을은 43가구 7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의 절반은 회사에 다니거나 자영업을 하고, 나머지 절반은 농사를 짓는다. 주민들은 못자리가 끝나는 4월 일요일 하루 한명도 빠짐없이 단합대회를 떠난다. 주로 섬으로 가는데 작년엔 거제도 올해는 남이섬으로 다녀왔다.

이 마을은 김영천 이장을 중심으로 주민들 간 화합이 잘 된다. 지난 2008년엔 마을회관도 건립했다. 지난 1976년에 세운 노인정은 수리해 마을에서 월세를 받는다. 임대료 수입은 마을기금으로 사용한다.

적현마을은 범죄 없는 마을이다. 마을 주민 간 깊은 유대가 범죄 없는 마을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을회관에서 읍내시장까지 2km가 되지 않아 생활하기 편리하다.

주민들은 버스노선이 없어 불편이 가중되자 지난 1월 군수 면담을 통해 버스노선 개설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버스노선이 신설되기 위해서는 도로확장이 조속히 이뤄져야 하지만 공사 시행이 지연되고 있어 주민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길상사와 벽오사 '마을의 자랑'

자연 환경이 좋은 적현마을엔 두 가지 문화유적이 있다. 하나는 길상사(吉祥祠)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봉안해 놓은 사당이다. 원래는 장군의 태(胎)가 묻혀 있었던 진천읍 상계리 태령산 아래에 건립됐다고 한다. 지난 1926년 후손 김만희의 주선과 사림(士林)들의 협조로 현재의 길상사를 재건해 제향을 지내오고 있다. 길상사는 지난 1956년 개축됐고, 지난 1975년 길상사 정화작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북도 지방기념물 제1호 이기도 한 길상사는 진천읍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모두 아름다운 경치를 지니고 있어 매년 많은 관람객이 찾아와 역사를 배워가는 곳이다. 진천군과 가락 김해 김씨 진천군종친회는 매년 봄·가을 2차례 제향을 지내고 있다.

▲ 진천읍 벽암리 적현마을에 있는 길상사. 삼국통일의 주역이였던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 진천읍 벽암리 적현마을에 있는 길상사. 삼국통일의 주역이였던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또 하나는 마을 뒷산에 있는 벽오사(碧梧祠)다. 조선후기 병자호란 때 백의용사(白衣勇士)로 청군을 막아낸 류창국(柳昌國 : 1579~1637)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본래 김유신 장군을 모신 길상사 한켠에 모셨는데, 문화 류 씨 후손들이 지난 1976년 목조기와집으로 건립했다. 사당 밖에는 '숭모재'라는 조그만 집이 있는데 지난 1984년에 신축한 것이다. 숭모재 앞에는 '벽오사묘정비(碧俉祠廟庭碑)'가 세워져있는데 후손 류한상(柳漢相)이 지었다.

류창국은 병자호란 때 만노성(萬努城)에 가족을 이끌고 들어가서 조감과 더불어 인근 7읍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주민들을 통솔해 성을 쌓고 청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그는 사후 숙종 때 지부원외랑(地部員外郞)에 이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됐다. 현재 유림과 문화 류 씨 후손이 모여 제사를 이어오고 있다.

▲ 적현마을 뒷산에 있는 벽오사, 조선후기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를 막아낸 류창국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 적현마을 뒷산에 있는 벽오사, 조선후기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를 막아낸 류창국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 마을에는 목공예 작가 기재수(63) 씨가 운영하는 '나무랑공예랑' 공방이 있다. 인천을 중심으로 목공예와 서각 등 작품 활동을 하다가 8년 전 이곳으로 왔다. 적현마을이 선비의 기운이 서린 지역임을 알고 땅을 구입해 공방을 차렸다.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매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인심이 좋아 아예 이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기 씨는 지난 1월부터 문하생을 받아들였고 공무원, 교원 등 알음알음 찾아온 문하생의 수가 40여 명을 넘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우리 문화유적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연중 많은 주민과 관광객, 학생 등이 이곳을 찾아 인성을 함양하고,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적현마을, 조상들이 세운 업적이 후세에 교훈이 되고 있는 곳이다.


우리동네사람들

▲ 김영천 이장
▲ 김영천 이장
“군수로부터 시내버스 운행 확답 받아 다행”

김영천(72) 이장은 시내버스 노선 개설에 주력하고 있다.

김 이장은 “이웃마을인 행정리에는 시내버스가 다니지만 적현마을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며 “주민들의 불편이 커 지난 1월 군수 면담을 통해 시내버스 운행을 약속받았다”고 했다.

그는 “지난 5월에 시내버스 운행을 위한 도로확장 주민설명회와 7월 토지보상 문제를 포함한 사업설명회를 거쳐 현재 설계가 진행되고 있다”며 “주민들의 힘을 모아 버스노선 개설을 약속받은 것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대동제가 열리는 12월전에 시내버스 운행이 언제부터 될 것인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 설유동 노인회장
▲ 설유동 노인회장
“인심 좋고 정 많은 주민들 좋다”

설유동(79) 노인회장은 14년간 노인회 총무로 일해 오다가 작년 12월부터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황해도 출생으로 서울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오다 지난 1986년부터 적현마을에서 살고 있는 설 회장은 “마을 인심이 좋고 정이 많은 주민들이 좋다”며 “적현마을이 내 고향”이라고 말했다.

그는 “단합이 잘되는 적현마을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주민들이 원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기재수 목공예가
▲ 기재수 목공예가
“주민들 따뜻한 정에 매료돼 정착”

기재수(63) 목공예가는 이 마을에서 '나무랑공예랑' 공방을 운영한다.

그는 “8년 전 공무원인 아들을 보러 왔다가 적현마을을 알게 됐다”며 “선비의 기상을 느낄 수 있어 좋았지만 더 매력을 느낀 것은 주민들의 따뜻한 정과 넉넉한 인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품에 몰두하다보면 주민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도 많지만, 변함없이 따스하게 대해주는 모습에서 감사함을 느낀다”며 “주민들이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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