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면 노원리 노곡마을
이월면 노원리 노곡마을
  • 안창규
  • 승인 2015.04.0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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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명당으로 불려온 유서 깊은 동네

왜가리 번식지·노은영당 '마을의 자랑'
마을 50가구 가운데 평산 신 씨 12가구

▲ 이월면 노원리 노곡마을은 평산 신씨 집성촌이다. 예로부터 명당으로 알려진 고장이다.
▲ 이월면 노원리 노곡마을은 평산 신씨 집성촌이다. 예로부터 명당으로 알려진 고장이다.


진천읍에서 이월-광혜원면을 거쳐 이천으로 연결되는 17번 국도 좌측을 따라 한남금북정맥이 길게 늘어서 있다. 속리산에서 시작한 이 산줄기는 태령산-만뢰산-무제산-덕성산을 거쳐 안성의 칠현산-칠장산으로 이어진다. 그 중간의 무제산(573m) 아래에 자리한 노곡마을은 배산(무제산 줄기) 임수(멀리 미호천)의 마을조건을 갖췄지만 임수에 해당하는 미호천이 조금은 멀지 않나 싶다. 하지만 무제산 아래 자리한 노곡마을의 모습은 편안함 그 자체이다.

신잡 선생이 은거하던 곳

'진천군 지명유래'에 따르면 평산 신 씨 집성촌인 '노곡'은 '논실'로도 불린다. 본디 '논실'은 논이 많은 골짜기라는 뜻이라 한다. 실제 이곳에는 마을 앞에 넓은 들이 형성돼 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조선 선조 때 논실마을에 처음 세거(世居)한 독송재(獨松齋) 신잡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신 곳이라 하여 노은실(老隱室)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노곡(老谷)'은 '노은실'의 '노'를 한자 '老 '로 음차하고 '실'을 '谷'으로 훈차한 지명이라 한다.

평산 신 씨의 시조는 고려 초의 무신 신숭겸(申崇謙)으로,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해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룬 공신이다. 태조가 공산지역(지금의 공주 부근)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포위되자 그를 구하고 전사하였다. 신잡은 시조 신숭겸의 20세손으로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카가 이끄는 왜군에게 패해 남한강에 투신 자결한 신립(申砬) 장군의 4형제 중 맏형이다.

신잡의 아버지는 신화국(申華國) 이다. 신잡은 1583년(선조 1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정언(正言)·지평(持平)·우부승지를 거쳐 이조참판·형조참판을 지냈다.

죽은 뒤에 진천에 사당이 세워지고 사액됐으며, 영의정에 추증됐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평산 신 씨 집성촌

논실마을 뒤 무제산 자락에는 신잡을 중심으로 아버지 신화국과 그의 아들 신경희(申景禧)등 3대의 묘소가 마을을 내려다보며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평산 신 씨 집성촌은 근래에 접어들어 세손이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마을 50여 가구 중 12가구 25명이 조상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신경희의 묘 바로 아래에는 노은영당(老隱影堂)이 자리하고 있다. 이 영당에는 '신잡 영정'이 모셔져있으며 이 영정은 충북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 선조 37년(1604)에 신잡 공의 54세 때 모습을 김이혁이 그렸다 한다. 비단 바탕에 색을 넣어 그린 전신상의 초상화인데 크기는 가로 90㎝, 세로 167㎝로 그림의 형태와 안면처리법 등이 조선중기 초상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사료적 문화적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노은영당에서는 매년 10월경 평산 신 씨 종중 시제를 지낸다. 3~4년 전에 노은영당에 보관돼 있던 향로, 도자기 등 오래된 제기와 일부 문화재가 도난당해 주민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노은영당에서 50여m 떨어진 산자락 아래에 수령 1000년 정도가 되는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일대 6만8968㎡ 지역이 천연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된 왜가리번식지다. 왜가리는 백로과에 속하는 큰 새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에서 흔히 번식하며 정월대보름 쯤에 와서 가을 9~10월에 돌아가는 여름철새다. 해마다 많을 때는 1000여 마리의 왜가리가 번식하였다고 하는데 요즘은 100여 마리 정도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평산 신 씨 집성촌인 논실마을은 신잡 공이 세거하며 형성된 마을이어서 역사가 족히 400년은 넘는다. 근래에 들어 외지인이 많이 들어와 한때 100여 가구의 마을이었는데, 최근 인구감소 추세와 자녀 교육문제 등 이농인구의 증가로 이제는 50여 가구로 줄었고 이나마 7~8채는 빈집이다. 전체 주민 수는 100여 명 정도. 고령화는 이 마을도 피할 수 없는 추세로, 초-중학생은 단 1명도 없고 고교생만 2명. 40대 아저씨가 동네 막내이고 8~90대 고령의 주민이 10여 명이나 된다.

▲ 왜가리번식지는 예전에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수백 마리의 왜가리가 번식했으나 지금은 새들의 배설물로 은행나무가 말라 죽어 주변 숲으로 옮겨 살고 있다.
▲ 왜가리번식지는 예전에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수백 마리의 왜가리가 번식했으나 지금은 새들의 배설물로 은행나무가 말라 죽어 주변 숲으로 옮겨 살고 있다.
충북문화재자료 제1호 '신헌 고택'

주민들의 생업은 벼농사가 8가구, 낙농(젖소 원유) 2가구, 축산(한우) 1가구, 인근의 회사에 근무하는 주민이 10여 가구, 그 나머지는 외지의 자녀들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소일을 하는 가구들이다. 일반 벼농사가 대부분이며, 일부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그 외 논실마을 출신 인사로 조선말기의 무신이며 외교가인 위당 신헌이 눈에 띄며, 마을 안에는 그가 살던 고택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신헌은 고종 12년(1875) 병자수호조약, 고종 19년(1882)에는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던 분이다. 그가 살던 고택은 충북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이 되었고, 현재는 마을 토박이 방관석 씨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대동계가 조직되어 있으나 1년에 한번 정도 마을주민이 모이는 정도이다. 1년에 한두 번 농번기를 피해 마을 주민이 나들이 삼아 여행을 한다고 한다. 주민들 모두가 조용히 평범하게 사는 것을 바라는 그야말로 '보통마을'이다.



우 / 리 / 동 / 네 / 사 / 람 / 들



▲ 신 현 칠   이장
▲ 신 현 칠 이장
“주민 단합 위해 최선 다할 것”

신현칠(57) 이장은 평산 신씨 33세손으로 금년에 이장에 취임했다.

마을에서 목장을 하고 있는 신 이장은 “마을의 머슴이자 심부름꾼으로 봉사를 하는 이장이 되겠다”고 밝혔다.

그는 “마을의 유대와 화합을 위하고, 윗사람 들을 공경하고 아랫사람 들을 돌보며 마을의 단합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 최 순 녀  부녀회장
▲ 최 순 녀 부녀회장
마을 대소사 챙기는 살림꾼

최순녀(52) 부녀회장은 올해 부녀회장이 됐다. 그는 이전부터 마을 및 종중의 대소사를 챙기는 살림꾼이었다. 종중의 시제 올리는 기일을 훤히 꿰고 있다.

최 회장은 “최근 주민들이 힘을 모와 마을 쓰레기를 치우는 등 청소작업을 함께 해 좋았다”며 “앞으로도 주민들이 부녀회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마을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부녀회장의 역할이 아니겠냐”며 “앞으로도 마을 대소사는 물론, 주민들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신 상 철  이월면새마을남녀지도자협의회장
▲ 신 상 철 이월면새마을남녀지도자협의회장
“옛 모습 잃어 안타깝다”

논실마을 토박이이자 평산 신씨 34세손인 신상철(60) 씨는 이월면새마을남녀지도자협의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평산 신 씨'는 일명 '논실 신 씨“라고 한다”며 남달리 종중을 아끼는 마음을 애써 감췄다. 노은영당에 영정을 모신 신잡 공의 14세손으로 평산 신 씨 가문의 가계도를 훤히 꿰고 있는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의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어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 노은영당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신잡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 노은영당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신잡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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