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읍 교성리 향교마을
진천읍 교성리 향교마을
  • 이승훈
  • 승인 2015.06.1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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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마음의 고향

▲ 우석대학교 진천캠퍼스 진입도로로 들어서서 바라 본 향교마을 전경.
▲ 우석대학교 진천캠퍼스 진입도로로 들어서서 바라 본 향교마을 전경.



향교 품은 넉넉한 동네 … 선비정신 계승
윗마을, 아직도 '대문 없는 동네'로 남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진천향교. 해발 230m 정도의 남산 자락에 자리 잡은 진천향교는 조선시대 백성의 교화와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설립한 관립 교육기관이다. 삼강오륜과 윤리도덕을 배우고 실천하도록 가르치던 조선시대 지역 교육의 산실 진천향교가 위치한 마을이 진천읍 교성리 향교골이다.

향교 품은 인심 좋은 동네

우리네 고향 인심을 느낄 수 있는 향교마을은 조선말기 진천군 남변면에 속했던 지역이다. 지난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교동, 탑동, 학당리 등을 병합해 교성리라 칭하고 군중면에 편입됐다. 이후 지난 1917년 진천면으로 개칭했고, 지난 1973년에 진천읍으로 승격하면서 교성리가 됐다.

이 마을은 진천군청에서 불과 800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진천군청 앞 사거리에서 화랑공원 방면으로 좌회전해 문화로를 따라 가다보면 우측으로 우석대학교 진천캠퍼스 진입도로 직전에 가옥 한 채와 향교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마을입구를 만날 수 있다.

“이 표지석을 기점으로 향교 쪽이 윗마을, 도로 건너편이 아랫마을로 나뉜다”며 “예전에는 진천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고 류무열(63) 이장은 설명한다.

마을 유래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태조 때 진천향교가 창건됐다는 기록이 있지만 '충북향유회집'에는 고려 충숙왕 때 창건됐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고려시대에 설치됐던 지방교육기관 향교를 조선왕조에 들어서 재정비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고려 중엽부터 향교골, 교동 등으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향교마을은 저녁에 굴뚝에 연기가 안 나는 집에는 이웃에서 쌀을 가져다줄 정도로 인정이 넘치는 동네였다. 이웃 간에 우애도 좋아 서로 형님, 아우하며 지내니 싸움이 없고, 범죄도 없다. 예로부터 거지, 도둑, 대문이 없는 것이 마을의 자랑이다. 이제 525세대가 거주하는 마을이 됐지만 향교 인근 윗마을은 아직도 대문 없는 동네로 남아있다.

류 이장은 “선조 때부터 의형제를 맺으면서 가족처럼 지냈다”며 “다 내 부모고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며 지낸다”고 말한다.


향교 건물 독특하게 배치

지난 1981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1호로 지정된 진천향교는 마을 가장 안쪽 남산 끝자락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 향교로 올라가는 경사면 초입 오른편에는 문묘에 예를 갖추기 위한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향교의 전면에는 붉은 색이 칠해진 원형 기둥에 홍살에 얹혀 있고, 가운데 태극 문양이 있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그 뒤로 외성문과 풍화루가 보인다.

진천향교에는 6동의 건물이 남아있다. 총면적은 3051㎡. 공자를 비롯한 5명의 성인과 송나라의 현인, 신라, 고려, 조선조에 이르는 18현인들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석전을 봉행한다.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의실로 배움의 공간이다. 풍화루는 학생들의 휴식공간이면서 누문의 기능도 겸했다.

진천향교의 건물배치는 상당히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다. 명륜당의 위치가 나란히 배치된 좌학후묘의 배치법은 일반적인 격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또한, 외삼문을 누문으로 건축한 것도 드문 경우라고 한다. 대갓집 사랑채처럼 누각 좌우로 방들이 붙어 있는 경우도 흔히 보기 어렵다.

봉화산 등산로 입구

이 마을은 남산골 산책로와 봉화산, 잣고개, 길상사 등으로 이어지는 종주산행의 들머리로도 유명하다. 향교 외곽 담을 따라 왼편으로 돌면 '남산골'로 표시된 이정표가 자리하는 산길이 나온다. 진천군상하수도사업소를 굽어보는 능선에 오르면 아카시아꽃과 찔레꽃 향기가 시원함을 전한다. 다시 만나는 이정표 사거리를 지나면 철봉 등 운동기구가 마련된 남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지난 2013년에 조성된 남산골 등산로는 향교마을과 우석대학교 진천캠퍼스를 함께 품고 있어 추천할 만한 산책로라고 한다.

풍류 즐기는 선비의 고장

향교마을은 선비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또한 주민들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여유로움이 가득하다. 마을 집집마다 돌면서 안녕과 액막이 등 마을행사 때면 마을주민 전체가 함께 풍악을 울리며 놀았다. 마을대항 풍물대회나 체육대회 등에서도 항상 우승을 경합하며 송아지를 많이 타기도 했다고 한다.
박승권(80) 마을노인회장은 “우리 마을주민들은 항상 여유로웠다”며 “경제적으로 부자는 아니었지만 마음은 항상 넉넉해 웃음이 넘쳐났다”고 기억한다.
이 마을은 대동계를 비롯해 청년회, 향토회, 향우회, 향봉회 등 다양한 연령층의 모임들이 활성화돼 마을 일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매년 12월에 열리는 대동계 총회에서는 100여 년 전부터 후손 없이 살다가 돌아가시면서 마을에 재산을 희사하신 어르신의 제사를 지금까지 감사한 마음으로 모시고 있다.


우리동네사람들

박 승 권  노인회장
박 승 권 노인회장
“정으로 맺어진 인연 소중하게 생각”
박승권(80) 노인회장은 초평면에서 15년간 이장으로 활동하다 30여 년 전 향교마을에 정착했다.
지금은 노인복지관에서 탁구 치는 것이 유일한 취미생활이라고 한다.
그는 “예전에는 배는 고팠지만 마음은 넉넉했기에 웃을 수 있었다”며 “항상 정으로 맺어진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마음에 여유를 갖고 생활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류 무 열  이장
류 무 열 이장
“마을회관 새로 마련하는 것이 목표”
류무열(63) 이장은 60대 실버축구단인 쌀돌이축구단에서 3년 동안 활동할 만큼 활동적이다. 마을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류 이장은 “향교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주민들 모두 인품도 좋고 마음도 넉넉하다”고 자랑한다.
그는 “마을은 커졌는데 마을회관은 해오름아파트 앞에 협소한 것이 전부”라며 “2층 계단도 좁고 경사도 있어 어르신들이 이용하기 불편하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 향교 측과 협의 중이지만 넓은 곳에 공간을 마련해 어르신들이 편하게 쉬실 수 있는 마을회관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박 양 근  부녀회장
박 양 근 부녀회장
“마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즐겁다”
박양근(70) 부녀회장은 마을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마냥 즐겁다. 시집와 마을에 정착한 지 35년이다. 그동안 새마을지도자, 이장 등 활동을 해온 남편을 도와 마을 일을 해서인지 이제는 너무 익숙하다.
그는 “이렇게 오랫동안 웃으면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마을주민들의 도움 덕분”이라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겠다”고 말했다.


김 재 덕  새마을지도자
김 재 덕 새마을지도자
“살기 좋은 마을 만드는데 앞장”
김재덕(56) 새마을지도자는 “많이 부족함에도 마을주민들의 이해와 협조로 그동안 마을을 위해 봉사할 수 있었다”며 “이장님을 도와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상부상조하는 마을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보존될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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