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평면 용정리 양촌(陽村)마을
초평면 용정리 양촌(陽村)마을
  • 정선옥 기자
  • 승인 2009.03.17 1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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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형(臥牛形) 형국에 불농불상 삼백년 기지(不農不商 三百年 基地)의 명당

초평은 산의 형국이 와우형(臥牛形), 즉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초평(草坪)이라는 지명 자체도 이 지형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소가 길게 누워있는 모습이니 당연히 풀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명명된 것이 지금에 이르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6만대군을 거느리고 이 땅을 밟았던 이여송이 싸움에서 패하자 함께 데리고 왔던 지사 두사충(地師 杜師忠)의 참수를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 소식을 들은 벽오공(碧梧公)이 두사충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이여송을 설득해 두사충은 참수를 면하게 되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벽오공의 묘터를 물색하게 되는데 이곳 초평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앉아 “이 곳은 와우형(臥牛形)으로 여기에 터를 잡으면 불농불상 삼백년기지(不農不商 三百年基地)라, 자손들이 번성할 것이다”라고 했단다. 그 이유인지 이곳에 거성했던 경주이씨의 후손 중 인재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인 양촌의 후면에는 쌍오정이 지어졌고 소의 가슴 부분은 가장 풍요로운 자리로 벽오공의 묘가 자리잡게 되었다. 소가 늘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건너편 마을은 풀밭을 뜻하는 지전(芝田)이라 이름짓고 햇볕으로 풀을 잘 키우라는 뜻으로 지금의 양촌(陽村)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양지 바른 구릉 위의 자연부락
82가구에 274명이 거주하고 있는 양촌마을은 제법 큰 자연부락이다. 이름만큼이나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구릉 위에 형성된 마을로 그 옛날 100여 채의 기와집이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을 만큼 역사도 오래 되었다. 초평저수지를 조성하던 시기에 그쪽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이 고향을 멀리 떠나지 못하고 가까운 이곳에 많이 정착해 살고 있다.

◐ 이름난 효자효부의 마을
지금은 벼농사를 주로 짓고 있지만 예로부터 이곳은 마늘산지로 이름 높던 곳이어서 이맘때쯤 이곳으로 시집오는 새댁들은 제일 먼저 푸른 언덕을 눈에 담고 마을로 들어섰다. 한참 마늘 밭의 일이 많을 때는 외지에서 300여명씩 들어와 마늘을 캐고 엮는 작업을 할 만큼 분주한 마을이었다. 고령화가 진행되다 보니 일손도 부족하고 10년 전 마늘가격이 지금도 그대로니 자연스럽게 마늘농사를 접게 되었다고 한다. 봄내 풍부한 햇볕을 머금고 알이 굵어진 마늘은 아낙들의 머리에 이워져 진천장이나 증평장으로 팔려 나가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출가시키는 밑천이 되었다. 그 고생을 아는지 자손들이 부모를 극진히 여겨 효자효부가 많은 마을로도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다.

◐ 교육열 높아 수많은 인재 배출
언제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이 마을에는 우스갯소리로 대통령 빼고는 다 나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인재가 많다. 가까이 유영훈 진천군수가 이 마을 출신이고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치가와 학자를 배출했다. 이렇게 인재가 많은 배경에는 어머니들의 교육열이 유별났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양촌교가 생기기 이전 장마가 지면 여지없이 다리가 떠내려가 어머니들이 아침마다 아이들을 업어서 물을 건네 등교시켰다 한다. 동네가 커 아이들도 많았던지라 한 아이를 건네고 나면 다른 아이가 줄서 있고, 또 그 아이를 건네면 다른 아이들이 줄서 있어 등교 시간이 지나면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 조속한 토지문제 해결로 심리적 안착 고대
이 지역의 경작지는 예전 청원농조의 소유로 지금은 농촌공사에서 그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다. 대대로 이곳에서 농사짓고 살아온 주민들은 토지의 분양이나 양도 등의 대책을 원하고 있으나 농촌공사 측에서는 이를 받아들여주지 않고 있어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다고 한다. 하루 빨리 이 문제가 해결되어 더 이상 심리적인 부담 없이 안착할 수 있기를 주민들은 고대하고 있다.


◐ 농업용수 고갈에 대한 대책 절실

초평지 상류인 만큼 마을 앞 하천에는 물고기가 많아 수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그물을 쳐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곤 했다고 한다. 맑고 깨끗하기로 소문난 이곳은 상수도가 마을까지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하수를 음용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보가 2개나 되는 이 마을도 농업용수의 공급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원남저수지에서 물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 국토가 메말랐다는 표현을 쓸 만큼 날이 가물고, 더불어 하우스 단지가 늘어나면서 중간에 대형 관정을 설치하는 바람에 작년 봄에도 농업용수 확보에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이 지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절실한 대책이 필요하다.


◐ 타지역 주민들로부터 부러움 사는 양촌 친목계
이 마을은 매년 4월 마지막주 일요일을 택해 동네 주민들과 출향인들이 모여 그간의 궁금한 소식들을 나누고 회포를 푸는 선후회라 불리는 행사를 갖는다. 온 동네 주민이 참여하는 행사니만큼 조용하던 시골마을도 이날만큼은 시끌벅적하다. 또 하나, 이동네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3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양촌 친목계다. 옛날부터 이어져 오던 향우회와 친목계를 통합시킨 이 계는 아버지대로부터 내려온 계인만큼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도 계시지만 초창기 회원 또한 여러분 계신다. 단합이 잘 되는 양촌계는 좋은 일은 물론이지만 장례식 같은 상사에 그 진가를 발휘해 다른 지역민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있다.

◐ 마루에 걸터앉아도 눈앞에 펼쳐지는 마을 앞 절경
마을은 소문난 명당답게 경치 또한 빼어나다. 마루에 걸터앉으면 봉황대에서 이어지는 수려한 보광대 아래로 맑고 푸른 물줄기가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 한줄기가 가슴까지 시원하게 한다.
머지않은 과거에 새파란 마늘밭 너머로 나무로 엉성하게 올린 다리를 건너 아이들이 학교에서 재잘대며 돌아오고 복개 공사로 그 모습이 사라진 마을 앞 빨래터에는 일상의 고단함을 털어내는 마을 아낙들의 빨래방망이 소리가 요란했을 터였다.


/우/리/동/네/이/장/님/

"마을 발전에 힘써 예전의 영화를 되찾겠습니다."
정용수 이장
정용수 이장

살림 정도가 비슷한 동네다 보니 유난히 단합이 잘 되는 마을입니다. 그 힘을 발휘해 마을 발전에 앞장서 진천시 건설에 결코 뒤지지 않고 주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 한가지 예로부터 물 맑고 살기 좋은 이 고장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돌아와 예전의 영화를 되찾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형제처럼 지내는 노인회 회원들은 마을의 자랑"

박종하 노인회장
박종하 노인회장

우리 마을에는 53명의 노인회 회원들이 형제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바라는 바는 회원들이 건강한 삶을 유지해 지금처럼 단란하고 화목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회장을 대신해 늘 회원들을 위해 고생하는 우리 노인회 총무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회원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

장석석 노인회총무
장석석 노인회총무

처음 맡은 자리라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여러분들이 이렇듯 많이 도와주시니 앞으로 3년의 임기 동안 회원들을 위해 힘껏 봉사하겠습니다.
원래 우애가 깊은 회원들이지만 더 평온하고 회원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살기 좋고 행복한 마을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할 것"

조용병 새마을지도자
조용병 새마을지도자

밖에서 일을 많이 하다보니 마을 안의 일들을 살뜰히 살피지는 못하지만 우리 양촌마을이 보다 살기 좋고 행복한 마을이 되는데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마을이 진천 관내에서도 으뜸가는 살기 좋은 마을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장님을 도와 마을일에 힘쓰겠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을 편히 모시는데 최선을 다할 것"

최유순 부녀회장
최유순 부녀회장

부녀회장이라는 직책이 봉사직인 만큼 마을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벌써 8년째 이 직책을 맡아오고 있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은 많기만 합니다. 부녀회장이라는 직책이 봉사직인 만큼 마을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좀 더 편안히 쉬실 수 있도록 마을회관의 관리에 신경쓰고 최선을 다해 어르신들을 모시겠습니다.



우리마을유적지


쌍오정터(雙梧亭址)

조선중기의 문신 이시발(李時發)의 후손 이인엽(李寅燁)이 지은 정자의 터로 초평천이 흐르는 양촌마을 양촌교 입구의 벼랑에 위치해 있다.
쌍오정이라 이름한 것은 이인엽의 조부인 이시발의 호가 벽오(碧梧)이고, 증조부인 이대건(李大建)의 호가 오촌(梧村)이었던 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이인엽은 이 정자를 지은 후에 천여권의 책을 모아 서고를 짓고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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