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희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원장
김대희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원장
  • 김미나 기자
  • 승인 2018.11.23 1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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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과 소통하고 화합, 상생하겠습니다”

 

 

편안한 분위기.솔직고백.명사에게 듣는 취중진담 명사들이 술의 힘을 빌어 가슴에 담아있는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독자들에게 감동으로 다가가는 취중토크!
진천자치신문 쉰 세번째 취중진담 명사로 김대희(58) 제12대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원장을 초대했다.
그는 지난 8월 혁신도시 문화발전과 공공기관 직원과 지역주민들의 화합을 위해  '정보통신정책연구원과 함께 하는 지역주민 초청 팝's 오케스트라'를 개최해 주민들의 문화 갈증을 해소하고 뜨거운 호응과 감동을 이끌어냈다. 공공기관이 지역 공동체와 소통, 화합, 상생하는 모습을 보여준 첫 사례로 지방이전 공공기관의 모범이 됐다는 평이다.  
대한민국 정보통신·방송 전문 연구기관의 수장으로 어릴때 유난히 책을 좋아해 작가를 꿈꾸기도 했고 한때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김 원장, 그는 1982년 26회 행정고시 합격으로 체신부 행정사무관이 됐고 지금까지 평생 전문 공직자로의 길을 걷고 있다. 주미한국대사관 정보통신 참사관, 정보통신부 정보통신협력본부장, 대통령실 방송정보통신비서관,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등 요직을 두루거쳤다.
가끔 평일 저녁에는 혁신도시 주변 공원을 산책하며 혁신도시 주민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쉬는 날엔 무조건 한 눈을 팔아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김대희 원장의 열정 가득한 인생사가 궁금하다.  -편집자주

 

Q 평소 주량은 어떻게 되십니까?
A 술을 즐겨하는 편은 아닙니다. 가끔 직원들과 소통하기 위해 소주나 막걸리 한 두 잔 하는 정도입니다. 오늘은 이후 일정이 있어 간단히 하겠습니다.

 

Q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충북혁신도시로 이전하면서 많은 지역주민들이 관심을 갖고 있지만 좀 생소할 수 있는데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라고 하면 우선 이름부터 길고 많은 분들이 어렵게 생각하시는데, 사실 정보통신은 우리 생활에 매우 밀접한 산업 분야입니다.
옛날 산업화 시대에 도로, 전기, 노동력이 산업의 중요한 인프라라고 했다면 지금의 정보화 시대에는 인터넷 등의 정보통신 인프라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이 중요한 정보통신이 어떻게 발전하느냐의 문제는 기술적인 부분도 있지만, 요금이라든지 제도를 통해서 얼마나 경제적인 효과를 내느냐, 이런 효과가 어떻게 분산이 되고 잘 분배될 수 있느냐를 연구하고 그런 제안을 하는 곳이 바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입니다.

주민초청 팝's오케스트라 공연
기대 이상의 효과 “보람 크다”

Q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주민초청 팝's오케스트라' 공연이 아직까지 주민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기획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A 현재 충북혁신도시로 10개의 공공기관이 이전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이전한 공공기관에 나름대로의 기대가 있어 지역 주민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고민 끝에 문화 공연을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좀 더 대중적인 문화 공연이 어떨까 고민했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연령대의 많은 주민들이 참석해 뜨거운 호응과 성원을 보내주셔서 감동 받았습니다.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낸 것 같아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직은 문화 시설이 부족한 혁신도시 주민들의 문화적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던 기회를 만든 것 같아 매우 보람 있었습니다.

Q 우리 지역을 위해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A 정보통신 분야의 특성상 바로 지역사회와 완벽하게 밀착되기에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다만 지역인재 채용이나 직원들의 이주 문제 등에는 항상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충청북도가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서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연구를 의뢰했고 혁신도시 스마트 시티 계획과 관련해서 기쁜 마음으로 연구중입니다.
요즘 국토부 중심으로 스마트 시티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국토부가 건설 위주라면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은 주민편의와 참여 위주라는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Q 전문공무원으로 주요 요직을 거치셨는데 공무원이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습니까?
A 특별한 계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어릴 때 어머니께서 사주신 카프카의 '성'을 읽고 공무원이 되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죠.(웃음)
책을 좋아해 하루만에 한 권을 다 읽고 하다보니 어머니께서 자꾸만 책을 사주셨어요,
고3때 대입 원서를 쓰면서 우연히 행정을 전공하게 됐고 졸업할 즈음이 되자 친구들이 모두 고시 준비를 해서 함께 공부하게 된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어린시절에는 책을 좋아해서 막연히 작가를 꿈꾸기도 하고 과학자를 꿈꾸기도 했는데, 이렇게 평생 공무원으로 살게 될지는 몰랐네요.(웃음)

 

지역인재채용·직원이주 관심 많아
평일 혁신도시 공원 산책하며 휴식

Q 어렸을때와 학창시절 얘기를 해주시죠?
A 충남 공주가 고향으로 2남 1녀 중 장남입니다. 부모님 두 분 다 교편을 잡고 계셨는데 부모님 전근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공주에서 공부했습니다. 공주는 대표적인 교육도시로 여러 지역에서 공주로 유학 온 친구들이 많았죠. 그렇다 보니 공부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습니다.
공주사대부고를 졸업했는데 당시 야구부가 전국 우승을 해서 친구들과 함께 응원다니면서 고교야구에 푹 빠져 지냈던 시절이 있었어요. 특별히 일탈을 꿈꿔본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모범생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무척 엄격하셔서 학교 생활에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죠.

Q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A 고향도 같고, 남동생과 제일 친한 친구의 동생이 바로 지금의 아내입니다. 아내의 친정은 형제들이 많아서 집에 탁구대도 있고, 우리 집보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만화책도 읽고 그랬다는 이야기를 동생에게 많이 들어서 부러워했었죠.(웃음)
이후 군 복무 시절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그 곳에서 우연히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내는 당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 때 연락처를 교환하고 가끔 연락하고 지냈습니다. 군 제대 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아내의 하숙집과 가까운 거리에서 지내다보니 급속도로 친해지면서 3개월 만에 결혼하게 됐습니다.

Q 가정에서는 어떤 남편이십니까?
A 젊을 때는 큰소리치고 살았는데, 지금은 잡혀서 살죠. 우리 연구원 박사들한테도 물어보면, 다들 잡혀서 산다고 해서 위로가 되요(웃음).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남자들은 나이 들면 다 그런가봐요.

Q 슬하에 자녀분들은 어떻게 되시는지, 어떤 아버지이신지 궁금합니다.
A 1남 1녀를 두고 있습니다. 제가 3남매로 자랐어도 형제가 많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처음에 아내에게 사운드 오브 뮤직처럼 7남매를 낳자고 했지만 아내의 반대로 그 꿈은 이룰 수 없었죠.(웃음)
우리 아버지가 굉장히 엄하셨는데 저도 모르게 그걸 배웠나봐요. 그래서 아이들 군기는 제가 잡고 다독여주는 부분은 아내가 맡았죠. 너무 철저하게 그 역할 수행을 잘 했는지, 아이들이 어릴 때 아빠를 무서워했어요. 당시에는 일도 너무 바빠서 살가운 아빠가 되지 못했는데, 캐나다 유학시절, 가족 모두 함께 의지하고 지내면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요즘에 딸과는 농담도 많이 하고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Q 해병대 장교 출신이신데 해병대를 지원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A 해병대에 지원하게 된 데는 나름 웃지 못할 일화가 있어요. 고시 합격 후 군대를 가게 됐는데, 고시 합격자였던 관계로 장교로 지원할 수 있었죠. 충남 내륙에서 자랐기에 막연히 바다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또 해군 사관학교 출신 친한 선배의 군 시절 이야기가 재밌다고 느껴져 해군 장교에 지원했습니다.
해군에서도 여러 병과가 있는데, 배치하는 과정에서 연락이 먼저 닿는 사람들이 함상병과, 의무병과 등 나름 인기가 있었던 병과로 배치됐고, 집에 전화가 없었던 저에게는 연락이 닿지 않아 맨 마지막까지 배치 받지 못해 결국 남아 있는 해병대로 가게 됐습니다.
전화기가 보편화 되지 못했던 시절의 비화죠.(웃음) 지금은 해병대 출신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Q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십니까?
A 가급적 스트레스는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예전에는 마라톤도 했었는데요, 요즘 주말에는 등산도 하고 평일 저녁에는 혁신도시 주변 공원들을 산책하기도 합니다. 충북혁신도시 곳곳이 한적하고 예쁘게 조성이 잘 된 것 같아요. 쉬는 날엔 무조건 한 눈을 팔자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거든요.

 

최초로 통신시장 구조조정 계획 기획
미래대비한 부처간 융합된 노력 필요

Q 정보통신 공직자로 평생을 보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업은 무엇이었습니까?
A 정보통신부에서 일한 것은 저에게는 큰 행운이었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30년 동안 정보통신부 공무원으로 살면서 우리나라가 정보통신 후진국에서 IT 강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으니까요.
특히 지난 1995년 캐나다로 유학을 가기 전, 통신시장의 구조조정 계획을 기획한 일은 가장 자부심이 있는 사업입니다.
우리나라 통신사 구조 개편의 큰 틀을 제 손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입니다만, 사실은 운이 좋았던 거죠. 당시 시대적 상황과 잘 맞아떨어져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은 우리나라의 통신이 발화하던 1985년에 통신개발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습니다. 우수한 인재들이 이 곳에서 우리나라의 통신시장 설계를 한 거죠. 바로 통신시장 구조 개편 첫 단추를 꿸 때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정말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이렇게 올 수 있게 돼 너무 감사한 마음입니다.

Q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IT강국입니다. 미래의 우리나라 정보통신은 어떻게 변화될까요?
A 그 동안은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통신 강국을 만들기 위해 중심 역할을 수행한 기관이었고 많은 성과도 있었지만 4차 산업 혁명을 앞둔 이제는 정보통신의 미래에 대해 좀 더 다각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때입니다.
예전처럼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통신 산업을 추진하기에는 세계질서 자체가 바뀌었죠.
미래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세상을 이렇게 변화시키고 우버가 우리의 생활을 이토록 다르게 만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미래 정보통신은 정부도, 삼성도 아무도 알 수가 없는 분야입니다.
다만 제2의 스티브 잡스, 제2의 빌게이츠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창의력 있는 사람들이 어디서든 기회를 잡고 일 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누군가는 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릴 때부터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와 더불어 여러 정부 부처의 융합된 노력이 시대적 화두일 것입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사항으로 착착 실타래 엮이듯 모두가 함께 노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Q 마지막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지면으로나마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충북혁신도시로 이전한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은 앞으로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공공기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관심을 늦추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대담 = 이상훈 대표이사
정 리 = 김미나 기자
사 진 = 황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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