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대 NH생명 前사장
채희대 NH생명 前사장
  • 정선옥 기자
  • 승인 2009.08.1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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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취중토크 열여덟번째 손님


숨이 턱턱 막히는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일요일 저녁 진천읍에 위치한 한 식당에서 채희대 NH생명 前사장을 만났다. 반가운 악수를 나누기가 무섭게 천년주 한 잔을 먼저 권하는 그를 보며 '오늘도 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수십 회를 거듭해 온 취중토크지만 초대 손님들이 보여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은 매번 나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십대 중반에 농협중앙회 최연소 과장으로 승진하는 기록을 세우며 지난 2007년 1월 NH생명에 취임, 후발업체인 NH생명을 대한생명, 삼성생명을 잇는 빅3 반열에 올려놓았을 만큼 CEO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온 채희대 사장은 만년 꼴찌의 지점들을 1위 지점으로 바꾸어 놓는 마이더스의 손으로도 유명하다. 근자에 고향인 진천의 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에게 많은 물음표들을 던지는 군민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잠시 동안 미뤄왔던 취중토크 자리에 채희대 사장을 초대했다.

Q. 이 자리에 모시는 모든 분에게 가장 먼저 드리는 질문입니다만 주량이 얼마나 되시나요?
소주 반 병 정도면 딱 기분이 좋던데요. 하지만 주량이라는 것이 본래 자리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Q. 고향이 덕산이시죠? 고향 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시나요?
고향 이야기를 하니까 가슴이 따뜻해지는데요. 지금은 몽촌마을이라고 부르는 곳이 제가 태어나 자란 곳입니다. 그곳에서 꿈을 가꾸고 살았지요. 다 아시겠지만 여름이면 마을 앞 방죽에 연꽃이 만발합니다. 텃밭이 있어 한 달에 3번 정도는 들르는 편이고 가끔씩 마을 어르신들과 막걸리도 한 잔씩 나누곤 합니다. 세월이 흘러 외양은 많이 변했지만 이렇게 살아서 만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것에 감사합니다. 이런 것이 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Q. 특별히 농협에 입사한 계기가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 봅니다. 부친이 농업은행에 근무 하셨는데 그 영향인지 초등학교 때는 주산경진대회나 산수경진대회에 진천대표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은행원이 최고의 직업이었습니다. 부친께서 은행에 취직하라고 하시더군요. 장남이라고 청주에 유학을 보내주셨는데 막상 청주에서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고등학교를 인문계로 가게 된 것입니다. 굳이 농협에 입사하게 된 동기를 따진다면 자라온 환경을 무시하지 못하겠지요. 어렸을 때부터 농협, 농업, 농촌을 접하고 살았으니까요.

Q. 26세의 나이에 농협 최연소 과장이 되신 일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농협에서 근무하는 동안 내내 톱클래스를 유지하지 않으셨습니까?
처음 농협에 입사할 때는 합격자 100명 중 11등이었습니다. 입사 후 4주간 연수를 마치고 친 시험에서 100명의 연수생 중 1등을 했지요. 농협책임자 시험에서는 초시에 수석 합격, 과장 시절엔 정종택 농림부장관 비서실 파견근무 등 다른 직원들에 비해서는 다양한 경력을 쌓을 수가 있었습니다. 1993년에 농협에서는 최연소로 청주 지점장을, 40대 초반에 단양지부장, 1996년 진천지부장으로 3년을 근무했습니다. 당시에도 본부로 들어오라는 것을 고향에서 일하고 싶어 진천에 눌러 앉았었지요. 남들 1, 2년 있는 기간을 3년이나 눌러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내가 고향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땐 소신껏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일부에서는 군수 나오려는 것 아니냐는 등의 이야기가 많았었지요.

Q. 가족관계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노모와 처, 그리고 3남매를 두고 있습니다. 권사님이신 모친은 저를 위해 매일 기도하십니다. 어머님의 기도로 오늘날 제가 사회에 기여하고 이만큼 활동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 살다보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툴 때도 있지만 밤늦게 집사람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어차피 인생은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가는 것인데 머무는 동안 나와 함께 해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Q. 이제 보니 대단한 애처가시군요. 그나저나 사모님 같은 대단한 미인을 어떻게 만나셨나요?
청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고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추석 연휴에 집에 왔다가 청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앞쪽에서 남학생들이 한 여학생에게 장난을 치지 뭡니까? 젊은 혈기에 다가가서 '여학생을 괴롭히면 어떡하느냐? 그만해라' 했더니 순순히 물러나더라구요. 그 때는 힘이 없어도 공부를 좀 하면 인정을 해 주는 분위기였거든요.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청주에서 오며가며 마주치다가 7년간의 연애를 시작했지요. 그때 제가 청고 특수반이었는데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서울대를 못갔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연애하다 일류대 못 갔다고 책망하셨지만 오히려 충북에서 학교 나와 농협에 몸담을 수 있었으니 그것이 주어진 운명 아니겠습니까?

Q. 제가 알기로는 사모님 친정이 대단한 집안으로 알고 있는데 장인어른께서 미래의 인재를 알아보신 건가요?
사실 처가는 진천에서 대대로 살아 온 부유한 양반가라고 해야 할까요? 옛날에는 처갓집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진천을 지나칠 수 없다고 이야기 할 정도였으니까요. 집사람이 8남매인데 그 형제들 역시 진천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처가의 어르신들은 생각이 남다른 분들입니다. 현재의 진천경찰서나 상산초등학교 부지도 집사람의 조부께서 희사하신 땅입니다. 진천군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온 집안입니다. 저를 인정하셨다기 보다는 집사람의 고집이 셌다고 보는 편이 무난할 것 같은데요.

Q. 밖에서 보는 진천의 위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안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면이 많을 것 같습니다만.
사실 밖에 나가서 보면 안타깝고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다행히 도지사나 도교육감이 진천분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상당한 인센티브입니다. 이분들 이외에도 많은 출향인들이 알게 모르게 밖에서 큰 힘이 되어주고 계십니다.

이제 진천군이 충청북도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할 때입니다. 출향인들 중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습니다. 이제 그들을 고향으로 불러 지역의 발전을 위해 그들의 능력을 발휘토록 해야 합니다. 고향에서 받은 혜택을 고향을 위해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천군을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로 만드는 데는 그들의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들의 인맥과 능력을 십분 활용해야 합니다.

Q. NH생명의 비약적인 성장은 이미 업계에서는 하나의 신화가 되지 않았습니까?
NH생명·화재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 첫 해 조직 역사상 최대매출(7조 5,556억원)을 달성했고 전년 대비 자산 증가율이 14.3%였습니다. 당기순이익은 연초 목표보다 41.5% 늘어난 798억원에 달했구요. 당시 선보였던 '삼천만인보장보험'이 신규가입 11만3000건과 신규 보험료 650억원의 실적을 올렸으니 신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요. 나름대로 농협브랜드를 가지고 최고의 보험사로 키워야겠다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확신도 있었구요.

Q. 당시 NH생명이라는 명칭 사용에 대해 타사에서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습니까? 어렵게 명칭을 변경한 이유와 그 효과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명칭 변경은 사실 집사람이 조언해 준 것입니다. 당시 농협공제라는 명칭을 사용했었는데 일반인들에게 공제라는 단어 자체가 영 불편하고 어색했던 거지요. 변경 과정도 쉽지는 않아서 명칭 때문에 소송까지 갔었습니다. 다른 보험회사들 입장에서는 우리의 존재가 결코 반갑지만은 않았을 테니까요. 제 생각에는 재판에서 지더라도 대단한 홍보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다행히 승소했습니다.

Q. 실적 최하위의 지점들을 전국 최고로 끌어올리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지점을 활성화 시키고 직원들을 독려할 수 있는 비법이 있으신가요?
지난 1999년 천호동 지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전국에서 최하위를 기록하는 지점이었습니다. 그 지점을 최상위로 끌어올렸지요. 그 실적을 인정받아 최고 경영자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른 부임지들 역시 우수한 성적들을 거두었구요. 비법이라고 말씀하시는데 특별한 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직원들의 능력을 믿고 의견을 존중하고 소신껏 일할 것을 주문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상호 신뢰가 있어야겠지요. 그래야만 직원들이 신념을 갖고 일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직원들이 집을 방문할 때 선물을 가지고 오면 문도 열어주지 말라고 집사람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집사람은 저보다 더 강직한 사람이어서 만약에 제가 잘못을 저질러 감옥에 가게 되면 면회도 안 온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Q. 농협에 근무하시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아무래도 고향의 발전을 위해서 직접적으로 동분서주하던 시기가 가장 보람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역본부장 재임 시 충북농산물 명품화사업단(단장 최창필 現 진천군지부장)을 창설해 난립된 브랜드를 정리하고 브랜드에 걸맞는 품질 관리와 1지역 1명품 갖기 운동을 펼쳐 충북 농산물의 명품화, 브랜드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상공회의소와 함께 기업사랑, 농촌사랑 운동을 펼치고 1사1촌 운동을 활성화 하는데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지부장 재직 시절엔 문백농협에 장례차량, 초평농협에 지게차량 등을 지원하였으며 진천노인대학에 출강하면서 노인위안잔치는 물론 의약품을 제공하고, 서울대병원과 협력하여 특수진료차량을 구입해 농촌 순회 진료를 활성화 시켰으며 지역발전 예산을 확보해 살구나무 가로수 길을 조성하였습니다. 특히, 농협공제 모델 조주희(미국 ABC뉴스 지국장 겸 워싱턴 포스트지 서울특파원)씨의 모델료 전액을 충북장학회에 기부하는데 일조했고 그 장학금 수혜자가 학업을 마칠 때까지 지원한다는 약속을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정말 즐겁게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Q. NH생명을 떠나 지금도 다른 일을 하고 계시고 좀 더 편안한 노후를 즐길 권리도 있으시지만 사실 채 사장님의 능력을 아깝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고향인 진천군을 위해 일하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아직 특별히 생각해 둔 방향은 없습니다. 다만 고향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크던 작던 최선을 다해 일할 생각입니다. 젊은 시절 세상과 부대끼며 사는 것도 좋지만 행복한 노후생활도 이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게 됩니다. 집사람과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정치가 아니더라도 고향에 돌아와 고향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면서 지역에 봉사하는 삶을 살 고 싶습니다.

Q. 농촌의 환경 역시 급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시기에 농협의 역할과 나아갈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부 농민들은 농협이 돈 장사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농협은행의 수익금은 농민을 위해 재투자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농협모델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농협 역시 개혁이 필요합니다. 농협은 농민의 자주적인 의지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농민이 원하는 것을 찾고 농민의 삶을 변화시켜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농협과 행정, 기업인의 힘을 모을 수 있도록 조직적으로 변해야 농촌의 개혁이 가능합니다. 가장 시급한 개혁과제는 농협을 시·군 단위로 통합 관리해 행정기관과 대등한 능력을 가지고 사업계획을 세우고 생산, 유통, 소비에 농협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행정기관에 농협이 농민들을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농협의 직원들이 농협 직원으로서가 아니라 농민의 대변자로서 농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이제껏 살아오는 과정에서 남을 힘들게 했다거나 대가를 바랬던 적은 없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제 내가 태어난 고향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습니다. 개인의 공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의 발전을 위해 뜻 있는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겠지요.

개인은 힘이 없지만 여러 사람이 한 목소리를 내거나 직책을 가질 수 있다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50대 중반에 들어섰으니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신중히 찾아야겠지요. 고향의 발전을 위해 혼신을 다해 활활 타오르는 장작으로 살렵니다.

Q. 진천군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내년에도 지방선거가 있습니다만 출마자 중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의 치적이 아니라 진천군민이 진정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정치인으로서의 지자체 수장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모두를 어우르는 지역사회의 주춧돌 역할을 해주어야 합니다. 누가 하든지 얼마나 열정과 사명감을 갖고 일하느냐가 관건이겠지요.

진천군은 농사에 적합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직은 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입니다. 허나 지금은 농업에만 기댈 수 있는 사회 환경이 아닙니다.

농업이 단순히 1차 산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3차 산업과 상생하는 시스템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적극적인 투자 유치는 물론 유치된 기업에 대한 지자체와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지지로 세계 굴지의 기업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Q.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마지막으로 진천군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고향을 떠나 있었지만 이제까지 단 하루도 고향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고향분들의 격려와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진천에서 태어난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며 군민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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