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섭 충청북도의회 의원
송은섭 충청북도의회 의원
  • 정선옥 기자
  • 승인 2009.08.27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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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대표기자의 취중토크 열아홉번째 손님


'송검사'라는 별칭으로 불릴만큼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일하는 송은섭 충청북도의회 의원은 4선의 저력을 지닌 장수하는 정치인이다. 3시간에 걸친 취중토크 내내 그가 그려내는 진천군의 밑그림에는 4선 의원만이 지닐 수 있는 연륜과 번뜩이는 재기가 묻어난다. 일에 있어서는 처음과 끝이 명확해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고야 마는 고집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진 송은섭 의원. 끊임없이 연구하고 도전하며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사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고희(古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활기차고 패기가 넘친다.

Q 송 의원께서는 천년주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계시는데 평소 주량은 얼마나 되십니까?
A 천년주 홍보대사이기는 하지만 사실 술은 전혀 못한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취중토크라고 해서 내심 걱정했는데 예전에 故 오봉석 의장이 자기는 술을 못해 음료수를 마셨다던 기억이 나서 한시름 놓았습니다.

Q 전에 동생인 송기섭 대전지방국토관리청장에게서 들었습니다만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송 의원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하던데요. 형님과 형수님이 부모님이나 마찬가지라고 들었습니다만.
A 제가 24살 때, 송 청장이 7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상복을 입고 제기를 차던 생각이 납니다. 막내도 젖먹이였으니 저보다는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집사람이 고생 많았지요. 게다가 저까지 뒤늦게 군대를 갔으니 식구들 고생이 말이 아니었지요.

Q 군대를 상당히 늦게 가셨네요?
A 보충역으로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농사일을 하던 집안에 남자가 없으니 물 대는 일부터 어머님과 집사람이 해야 했으니까요. 동네 분들이 진정서를 내 주셔서 1년 반 만에 제대를 했습니다. 집사람도 집사람이지만 돌아가신 어머님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납니다. 당시는 밀주에 대한 감시가 심해 누룩까지 뒤져 가져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자식들 공부시키려 감시의 눈을 피해 밀주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다니셔서 어느 날 문득 보니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정수리 부분이 허옇게 보이더라구요. 그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형제들에게 '어머니가 이런 분이시다, 절대 잊지 마라'고 이야기 합니다.

Q 의정 활동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여쭤보고 싶은데요.
A 가장 보람 있었다고 한다면 금년에 준공되는 바들대교 가설, 초평지역 유지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사정을 듣고 저수지 만수위 밖 홍수면 부지의 농지에 대해 3년간 문제를 제기해 농림수산식품부의 규칙을 개정하게 되어 우리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해당농가가 쌀소득보전직불금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된 일, 전국 최초 첨단의료복합단지 특별위원회를 구성한 일, 충북 전통축산 보조육성 등에 관한 조례와 충북 종자산업 육성지원 등에 관한 조례 제정 대표 발의, 농촌 전문인력 기금설치 운영에 간한 조례 개정을 추진 중에 있고 도내 312호에 이르는 귀농인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발의 중이고, 15년이 넘게 활동했으니 어떻게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습니다. 사실 입법 활동이 가장 어렵습니다. 할 일은 많은데 따로 보좌관이 없으니 열심히 뛰는 수밖에 없지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검토해야 합니다. 답변하는 상대가 서기관급 이상의 30년 이상 된 전문가들 아닙니까? 이들을 상대하려니 힘이 들지요. 하지만 어렵게 얻은 결과일수록 더 보람 있고 성취욕도 큰 법이지요.

Q 그러면 의원 생활 하시면서 후회되시거나 아쉬웠던 부분이 있으시다면요.
A 진천군의회 의원을 8년 하면서 의장을 못해 본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일입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하지만 내가 의장이 되었더라면 군수와 의장이 함께 힘을 모아 진천군의 발전을 위해 소신껏 일해 봤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다못해 도나 중앙에 예산을 따내러 갈 때에도 군수와 의장이 한 차에 타고 가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의 인맥과 장점을 살려 힘을 모은다면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Q 의정 활동도 열심히 하셨지만 그 외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어떤 일일까요?
A 개인적으로 제가 15년 넘게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의정활동을 떠나 개인적으로 기억에 많이 남고 또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일입니다. 다섯 살 땐가 집에 불이 나 다리가 오므라들어 40년 반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았던 주민이 있었습니다. 마침 천안 단국대학교병원 정형외과에 아는 교수가 있어 환자를 보였더니 수술 하면 다리를 펼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역 분들에게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적십자에서 일일찻집을 열어 기금을 마련하고, 각 학교마다 자발적인 모금운동을 펼쳐 수술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저금통을 털어 준 것이라 끝 단위가 몇 십 원으로 끝났던 기억이 납니다.

Q 저도 기억합니다만 그 때 지역사회에서 큰 이슈가 됐었지요.
A 아마 97년도나 98년도 쯤 되었을 겁니다. 수술 전에 결혼했던 A씨의 부인이 집을 나갔다가 몇 년 만에 병든 몸으로 돌아와 A씨의 곁에서 죽기를 소원했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가는 길을 너무나 평온하게 갔다고 하더군요. 그 일이 TV에도 방영이 돼서 여러사람 심금을 울렸습니다.

Q 그럼 또 한 가지는 어떤 일인가요?
A 그분도 이월 분인데 하루는 선거운동을 하러 다니는데 한 집엘 들어갔더니 B씨가 집안에 홀로 있는데 귀에서 계속 물이 나온다고 해서 연유를 물었더니 6·25 때 입은 부상 후유증이라고 이야기 합디다. 6·25 전쟁 당시 강원도에서 있었던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이송되었다가 의병제대를 했는데 군적을 찾을 길이 없어 전혀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육군본부에 수차례 전화도 하고 편지를 보내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Q 군적이 없는 분들도 계신 모양이네요?
A 전란 중이라 워낙 혼잡한 상황이었으니 서류가 제대로 취합이 되지 않았나 봅니다. 마침 중학교 동기인 이규태 준위의 도움으로 부상당해 이송된 기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훈처에서 지정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떼 와야 인정을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당시는 저도 차가 없을 때라서 버스를 타고 공주까지 모시고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다행히 3급 상이용사 판정을 받아 가족들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지금도 직접 농사지은 고추를 가져다주시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남을 위해 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더 열심히 일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Q 도의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하고 계시니 아무래도 보는 시야가 넓어지셨을 텐데 충청북도 12개 시·군 중 진천군의 위상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A 도 단위 중에는 진천군이 지방자치를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봅니다. 인구도 적당하고 재정자립도 역시 청주시와 청원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습니다. 사실 도 단위 예산심의 할 때에는 농담으로 진천군은 돈 안줘도 될텐데 하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부러워서 하는 소리지요. 덧붙여 개인적으로는 청주와 청원군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서울이나 광역시들을 보면 위성도시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청주와 청원이 통합되면 진천군은 더불어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Q 진천군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해 송 의원께서 생각하시는 방안이 있으신가요?
A 진천은 사통팔달의 교통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문제라면 철도가 없다는 것인데 진천군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철도가 놓여야 합니다. 지금쯤이면 진천군에서 철도사업이 논의되고 기획되어야 합니다. 누가 하든지 청주공항에서 끌어오든 천안에서 끌어오든, 현실적인 여건 하에서 유치되어야 합니다. 도지사나 지방자치단체장에 출마할 후보들은 반드시 공약 사항에 넣어야 합니다.

Q 송의원님 하면 '송검사'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신데 그런 별칭이 붙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A 허허, 송검사요? 그게 기자들이 붙여준 별명인데 아마 집행부에 까다롭게 군다고 그리 부르는 게지요. 저는 일단 집에 들어가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도 '이 시간이면 집행부나 다른 의원들은 다 자고 있겠지, 나는 30분만 더 일하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다음 날 회의 자료를 챙기고 관련 자료를 검토하고 공부합니다. 법적인 근거, 이전 속기록 등 꼼꼼히 훑어보고 이전 회의 시 나왔던 이야기들을 일일이 재확인 시킵니다. 집행부 입장에서야 그리 편안한 상대는 아니겠지요.

Q 그만큼 지역에서 신뢰를 받으셨기 때문에 4선까지 하실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A 군의회 재선, 도의회 재선까지 모두 4선이 맞네요. 아직까지 진천군에서는 4선 의원이 전무(前無)하지만 후무(後無)는 아니지요. 앞으로 5선, 6선 의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경륜과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자산입니다.

Q 혹자들은 내년 지방선거 제2선거구(초평, 덕산, 이월, 광혜원)에서는 송의원의 행보에 따라 판도가 많이 바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던데요. 다음엔 군수 아니냐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의원님의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A 당적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의 의사에 따른다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만 기회가 된다면 진천군의 발전을 위해 소신껏 군정을 펼쳐 보고 싶습니다만 꼭 제가 아니더라도 당에서 선택한 사람이라면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Q 군수 출마 의사가 있으시다는 이야긴데 만약 군수가 된다면 어떤 군수가 되고 싶으신가요?
A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제가 이제까지 해 왔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은 어려운 사람들의 편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잘 사는 사람보다 어려운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는 것이 정치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도 나이가 있으니 노인들이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진천군은 농업군입니다. 작금 농업이 어렵다지만 지역적으로 특화시키면 분명 길이 있을 겁니다. 또 한가지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학이 필수입니다. 유영훈 군수가 추진하고 있는 우석대학교 진천캠퍼스 건립 사업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야겠지요. 수장이 바뀌면 물론 전면적인 재검토는 이루어져야겠지만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서 추진하던 사업들을 군민의 공감대 형성 없이 멋대로 중단해서야 되겠습니까? 전임자가 잘 한 일은 그 뜻을 이어 후임자가 더 잘 해야 하는 겁니다. 제가 군수가 된다면 중대 사안 발생 시 설문조사나 투표 등을 통해 6만 군민의 의견을 묻고 뜻을 수렴해 사업을 진행하되 투명하게 공개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모든 일이 군민의 화합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100% 공감은 아니더라도 최대한 군민 속에 가까이 들어가서 생각해야지요.

Q 4선이나 하신 일꾼이신데 혹여 당명에 의해 물러나게 되면 진천군으로서는 커다란 손실이 아니겠습니까?
A 그렇게 이야기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공무원들 속성은 일과성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진천군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최소한 본전은 뽑을 수 있지요. 사실 주변에서는 도의원 한 번 더 나와서 도의회 의장직을 맡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들도 합니다만 진천 지역의 발전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맡겨지는 역에 충실할 생각입니다. 사실 저와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한 집사람의 건강도 염려 되구요. 농협조합장 선거까지 치자면 여섯 번이나 선거를 치렀으니 집사람 고생이야 말 할 수도 없지요.

Q 이월면 조합장을 지내셨지요?
A 그 때가 스물아홉 살이었는데 농협중앙회에서 임명장을 안주더라구요. 대한민국 농협 조합장 중 20대 조합장이 없었다는 이유지요. 어린 나이에 조합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4H 활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자전거도 없어서 호롱불 들고 칠판 짊어지고 마을마다 다니면서 한글을 가르쳤었거든요. 그 영향이 컸지요. 그런데 당시에는 농협이 적자가 나거나 사고가 나면 조합장이 다 물어내야 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어느 조합장이건 논 팔고 산 팔고 소 팔아서 적자를 메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때보다 더 힘든 건 94년 낙선하고 나서였습니다.

Q 이제 보니 6전5승1패의 대단한 전력을 가지고 계시네요. 낙선하고 나서 가장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그 때 이야기를 좀 해 주시지요.
A 정치인은 머슴에 불과합니다. 주인은 유권자임을 명심해야지요. 한 번 낙선하고 나니 이월면 사람들이 무서워보입디다. 후일담이지만 2박 3일 동안 군대에서 뒤늦게 배운 담배만 계속 피워댔지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속은 것 같고 그 때는 하늘 보기도 부끄럽고 땅 디디기도 서럽고 그냥 담배만 피워댔는데 사흘만에 천주교에서 이야기 하는 '내 탓이오'라는 문구가 생각나더라구요. 그 순간 '정말 내 탓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떨어졌는데 온 집안 사람들이 전전긍긍했던 거지요. 그래서 지금은 군대 간 손자 민석이를 무릎에 앉혀놓고는 '오늘부터 담배를 끊고 밖에 나가 일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뒤로는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대 본적이 없습니다.

Q 대단한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정계에 입문하신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A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 보다는 지방자치제 이전부터 공화당의 지역 관리자를 11년이나 했으니 당연히 해야 되는 것으로 알았지요. 당시는 마을별로 조직화가 잘 되어 있어서 사실 첫 선거가 가장 쉬웠습니다.

Q 몇 해 전 신문에서 장기기증 서약을 하셨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만.
A 지금은 건강하지만 제가 심장이 좋지 않아서 충북대학교 병원에서 3차례에 걸쳐 수술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경과가 좋질 않아 병원을 옮겨 현대아산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큰 수술이어서 만약의 경우 수술에 실패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장기 기증을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서약서에 보면 눈부터 기증할 장기 목록이 있지 않습니까? 한 줄을 결정하는데 두 시간씩 걸리더군요. 물론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겠지만 '한 쪽 눈이 없으면 어떨까?, 한 쪽 귀가 없으면 어떨까?' 별 생각이 다 드는데 결국 장기 전체에 동그라미를 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단 본인의 장기는 충북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한다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우리 고장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수술 직전에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마지막일 수도 있었던 순간에 아이들이 고맙게도 '아버님, 결심 잘 하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주는데 '아이들이 잘 자라주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Q 평소 가지고 계신 인생철학이나 좌우명, 혹은 가훈 같은 것이 있으신가요?
A 저는 언제나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이야기 합니다. 이는 비단 한 집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어서 만약에 제가 군수가 되어도 군민화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입니다.

Q 지역구 주민들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A 저를 믿고 재선을 시켜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Q 진천군민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지요.
A 군정은 군민들의 도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현재 진천군은 2012년 우석대학교 개교와 2015년 진천시 건설이라는 두 가지 큰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 군민이 일심협력하여 성공적인 우석대 개교와 진천시 건설에 적극 동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며칠 동안 뒤늦게 수확한 농가의 수박을 팔아 주느라 발품을 팔고 있다는 송 의원과의 유쾌한 취중토크를 끝내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참 멋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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