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식 진천군의회 부의장
이완식 진천군의회 부의장
  • 강성진
  • 승인 2009.09.0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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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Talk! 스무번째 손님


지난 2006년 5.31 지방선거를 통해 여성 의원(비례대표)으로 진천군의회에 진출하여 금년 4월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진천군의회 역사상 첫 여성 부의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이완식 진천군의회 부의장을 형식파괴! 격식파괴! 취중진담!의 현장에서 만났다. 인자하고 헌신적인 큰누님 같은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성격상 집안일도 완벽해야 마음이 놓인다는 이 부의장은 진천군의회를 대표하는 부의장으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두 아이의 엄마로서, 또한 평범한 이웃을 자처하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많은 역할을 소화해 내는 슈퍼우먼이었다.


Q 평소 술은 좀 하시나요?
A 원래 술은 잘 못합니다. 그 전에는 목마를 때 캔맥주 하나 정도 마셨었는데 의회에 들어와서 조금 늘었어요. 소주 두세잔 정도는 마시니까요. 반주로 하는 술 한 잔은 소화에도 도움이 된답니다.

Q 어릴적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A 여군이 되는게 꿈이었어요. 어릴적부터 사내아이처럼 성격도 와일드하고 운동을 좋아해서 여군장교가 되고 싶었지요. 하지만 여섯명의 동생들과 공직에 계셨던 아버지의 박봉으로는 장녀인 제가 저의 꿈을 고집하기엔 지워진 짐이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꿈을 접게 됐구요.

Q 유년시절 이야기도 좀 해주시죠.
A 지금 생각해 보면 학창시절에 개근상을 한 번도 못 받아본 것이 아쉬워요. 가게를 하시는 어머니를 대신해 여섯명의 동생들을 돌보는 일은 늘 맏이였던 저의 일이었습니다. 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 중학교를 졸업할때까지 개근상을 못받아 봤어요. 그 때는 개근상을 받는 친구들이 어찌나 부러웠는지.
하지만 그 시절엔 대부분의 맏딸들이 다 그렇게 살았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결국 진학을 포기하게 만들었지요. 그땐 막연하게나마 제가 부모님의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Q 이렇게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큰 누님 같고 어머님 같은 푸근함과 든든함이 느껴집니다. 동생분들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실겁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는 자녀들에게 몇점짜리 엄마라고 생각 하십니까?
A 글쎄요. 저도 살짝 걱정이 돼서 아들한테 물었더니 80점이래요. 그래서 '나머지 20점은 왜 못주느냐?' 물었더니 나머지 20점은 엄마가 바빠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라고 하는데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더군요. 저야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지만 그 아이에게는 이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엄마잖아요.

Q 아이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요. 의정활동이야 7만 군민을 위한 것이지만 아이의 입장은 또 다른 것이니까요. 그럼 남편께서는 부인으로서 몇 점이나 주실까요?
A 언젠가 남편에게 '50점은 주실 수 있어요?' 하고 물었더니 50점도 많이 준거라고 하던데요. 항상 가정보다 일이 우선이었으니까요. 저 스스로도 그 정도면 후하다는 생각이에요. 원래 말이 없는 분이니 남편이 말하지 못한 불만도 많았을 거에요.

Q 50점이면 좋은 점수는 아닌데 남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지면을 빌어 하시지요.
A 서른 살의 나이에 입당을 하고 진천군 반공연맹(자유총연맹) 부녀회 등 여성단체일을 도맡아 할 때부터 남편은 저에게 야당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항상 옆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실 의회에 등원하면서 남편과 한 약속이 있습니다. '아침은 꼭 차려드리겠다, 점심은 서로 사회활동을 하는 사이니 따로 먹자, 저녁은 일 끝나고 돌아와 차려드리겠다' 약속했는데 밖에서 일을 하다보니 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날이 많아 미안한 마음이 늘 있지만 남편이 이해를 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Q 부군께서 외조를 잘해 주시는 모양입니다. 두 분은 연애결혼하셨나요?
A 아버지가 공무원이셔서 진천여중 옆 원종장(現 충청북도 농산사업소)에 있는 사택에 살았는데 당시 남편은 진천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청주에서 진천을 오는데 막차를 놓치기라도 하면 오창에서 전화를 했지요. 그때마다 불평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절 데리러 와줬고 원종장 사택에 내려주고 가곤 했습니다.
그런던 어느날 남편이 저희 집엘 찾아와서는 부모님께 큰딸을 달라고 하더군요. 저도 필요할 때마다 전화하면 오창까지 데리러 와주면서 안전하게 귀가할 때까지 스킨십 한 번 시도하지 않았던 남편이 믿음직스러웠구요. '아, 이런 사람이라면 날 정말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겠구나' 하는 확신이 섰습니다. 그렇게 제 나이 25살에 남편과 결혼을 했습니다.

Q 현재 청주대학에서 최고경영자과정을 밟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학구열도 높으시고 일인다역을 소화할만큼 부지런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보통 하루 일과는 어떻게 시작하시나요?
A 아침마다 남편은 운동을 가는데 함께 하기엔 저의 아침 일정이 너무 바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중학교 1학년인 막내 학교 보내고, 그제서야 출근을 합니다. 그래도 의회에 가장 먼저 출근을 하는 편이지요. 출근해서는 그날 일간지와 주간지를 훑어보고 지역의 현안을 살핍니다.

Q 우리 진천군도 2015년 진천시 건설을 위해 인구 늘리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만 부의장께서도 (사)한자녀 더 갖기 운동연합 진천군지부를 맡고 계시지 않습니까? 얼핏 이름만 들어도 감이 오지만 이 단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해 주시지요.
A 한국의 출산률은 현재 1.2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이대로 가면 2015년 이후 우리나라도 인구 자연감소국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한자녀 더 갖기 운동은 저출산의 심각성을 깨닫고 아이를 갖는 즐거움과 아이를 통해 얻는 행복을 나누고, 주변의 육아를 도와 주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는 실천운동입니다.
각계 각층의 저명인사들이 참여한 중앙본부 임원진과 전국 시·도의 19개 지역본부와 지부 등 여러 민간단체들이 참여해 저출산 극복을 목표로 하는 전국 규모의 유일한 시민단체입니다.

Q 정말 인구문제는 전세계적으로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얼마 전 보도를 보니 아이낳기 좋은세상 진천군 운동본부 출범을 준비하고 계신다던데요.
A 예. 오는 10월 경 아이낳기 좋은세상 진천군 운동본부 출범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여건이 안되는데 무조건 아이만 낳으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육아문제는 제가 아이를 키워본 엄마이기 때문에 더 절실하고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저도 7남매라는 대가족 안에서 어렵게 성장했지만 자녀 양육 문제는 개인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아이의 양육을 보조해야 합니다.
아이낳기 좋은세상 운동본부 출범을 계기로 실질적인 양육프로그램 지원과 출산 장려를 위한 정부의 법제도 및 조례 제·개정 촉구에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이는 출산을 앞둔 젊은 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초고령화를 앞둔 국가 전체를 위한 일이 될 것입니다.

Q 늦둥이를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시다고 들었는데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자녀 더 갖기를 망설이는 분들을 위해 한 말씀 해 주시지요.
A 옛부터 어르신들 말씀에 내리사랑이란 말이 있지요. 큰아이 명현(34)이를 키울 때는 '이 아이가 없었더라면 무슨 낙으로 살까?' 하며 아이 하나도 늘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큰 아이를 군대 보내고 둘째 아들 장현(14)이가 태어나면서 집안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남편은 쉰둥이 아빠라고 장안에 화제였답니다.
장현이는 먹성이 얼마나 좋은지 앉은 자리에서 통닭 1마리, 피자 한판을 뚝딱 해치웁니다. 오죽하면 이웃 아줌마들이 장현아빠 장현엄마는 장현이 먹여살리기 어렵겠다고 농담을 할 정도지요.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먹고 자는 것 하나하나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만큼 눈에 넣기도 아까운 아들입니다. 이 아이로 인해서 생활에 활력이 생기고 삶이 즐거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늦둥이를 적극 권합니다.

Q 오늘 취중토크가 활자화 되어 나가면 한번쯤 늦둥이 계획을 세워 보시는 분들도 많을 것 같네요. 그럼 여기서 정치에 입문한 계기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네요.
A 민정당 시절, 주변의 추천을 받아 여성부장으로 당사무실에서 15년을 상근하면서 조직을 관리했습니다. 그때부터 대선, 총선, 지방선거 등 크고 작은 선거를 치르면서 많은 후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한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 한결같은 마음을 인정 받아 2006년 지방선거에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15년간의 정당활동과 여성단체 활동 경험을 토대로 '나도 도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정치에 입문한 계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Q 의정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있다면요?
A 아까 절보고 푸근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민원인들도 저를 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게는 수급자나 장애인, 심지어 취직을 하지 못해 고민하는 청년들까지 다양한 민원인들이 찾아오십니다.
사실 충분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임에도 법을 몰라 제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정말 어려운 처지에 계신 세분을 수급자 담당과 연결해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드렸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직접 키웠다며 옥수수 한자루를 쪄가지고 오셨는데 눈물이 나서 혼났습니다.
저의 작은 노력들이 어렵고 힘없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작은 빛일지라도 살아가는 희망을 드릴 수 있다면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단편적인 예지만 이럴 때마다 '내가 이 길을 걷기를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Q 살면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이 있으시다면 어떤 때였을까요?
A 제가 비례대표로 공천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그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자가용이 없었던 그 때에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데 진천이 가까워질수록 선거비용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더라구요. 경제력이 여의치 않던 때라 그렇게 속을 태우고 있는데 시동생들과 시누이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주면서 “언니가 우리 집안 둘째 며느리로 시집와서 시동생들 다 키워 학교 보내주고 돌봐준 은혜는 맏며느리라도 하기 힘든 일”이라며 선거자금으로 쓰라고 3500만원이라는 거금을 보내주는데 감격스러워서 얼마나 울었나 모릅니다.
그리고 당선이 되고 나서 아들이 자동차를 한 대 선물해 주더군요. “의정활동 열심히 하시라”면서요. 정말 가슴이 벅차서 말을 못하겠더라구요. '가족들이 나를 이렇게 믿고 지원해 주는데 정말 열심히 일해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했습니다.

Q 아드님도 어머니가 굉장히 자랑스러웠을겁니다.

A 여담입니다만 청주에 사는 큰 아들이 가끔 은퇴 후에 청주에 와서 자기와 함께 살자는 이야기를 합니다만 저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지금껏 지역을 위해 일해 왔고 군민들이 이만큼 성원을 해주셨는데 의원직을 물러났다고 해서 진천을 떠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저 저를 낳고 키워준 진천군을 지키며 힘 닿는데가지 봉사활동을 하면서 여생을 마감할 겁니다.

Q 부의장께서는 진천군의회 역사상 첫 여성 부의장이신데 여성이기때문에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일까요?
A 아직 우리나라의 정치에는 남성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조화를 이룰 때 집안이 편안하듯이 정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남성 의원들이 굵직한 업무를 처리하는 면은 돋보이지만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섬세한 부분은 여성 의원들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의정일을 해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Q 그럼 진천군의회의 홍일점으로써 의정활동을 하시는데 애로사항은 없나요?

A 다수가 남성의원인 지방의회에서 가끔은 외롭고 고독할 때도 많습니다. 가정에서 역시 가사일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주부이기에 남성의원들보다 많은 육체적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 아직은 전통적인 사상이 남아있는 사회에서 여성이 갖는 페널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거에 비해 여성들의 정치참여가 활발해졌지만 넘어야 하는 장벽은 여전히 많습니다. 무엇보다 여성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사회의 통념이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가 자각을 하고 변화를 주도해 나가야 합니다.
또한 체계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여성들의 힘을 결집시켜 제도적인 차원에서 여성이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Q 다들 궁금해 하실텐데 내년 지방선거는 어떻게 준비하고 계십니까?

A 정치의 통로인 정당에서 기회를 준다면 여성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민주주의 원칙에 기반한 적절한 대표성을 가져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제 욕심보다는 이후에 진천군을 대표할 우수한 여성인재들이 나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코자 합니다. 그것이 여성 정치인으로서 제가 후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Q 말씀을 아끼시는 걸 보니 신중하게 결정하시겠다는 이야기네요. 그럼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정계은퇴 이후까지도요.
A 기회가 주어진다면 군민 여러분의 성원을 얻어 좀더 역동적이고 힘 있는 우리 진천군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지지해주신 여러분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보다 충실하게 의정활동에 전념하면서 만사에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만큼은 반드시 실천하는 자세로 살면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값진 가치가 항상 제 주변에 머물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최초의 진천군의회 여성부의장으로 제2,의 이완식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A 앞에서도 언급을 했지만 과거에 비해 여성들의 정치참여가 활발해졌다 해도 여성 정치인들이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정계에 입문하기에는 아직은 너무나 험한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어떠한 말씀을 드린다기 보다는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한번 더 돌아보고, 남을 먼저 배려하고, 남에게 베풀 수 있어야 하고, 늘 감사하고, 상대의 아픔을 감싸안고, 언제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번 더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대답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편하려면 먼저 상대를 편하게 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나로 인해 도움을 받아야 할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인생의 목표"라고 말하는 이완식 진천군의회 부의장의 달뜬 얼굴에는 자신의 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정치인으로서의 사명감이 어둠을 걷어내는 새벽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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