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읍 삼덕리 상덕마을
진천읍 삼덕리 상덕마을
  • 최나훈
  • 승인 2009.11.0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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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가 우리 집, 한울타리 속에 너와 내가 없어요”


예부터 구전해온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 못산다”라는 말로 이곳이 생거진천쌀의 유래지임을 알 수 있는 마을, 인심 넉넉한 삼덕리 상덕마을을 찾아가 본다.
해마다 이맘때면 가수 김상희씨가 부른 불후의 명곡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은 계절의 분위기와 딱 어울려 우리의 맘을 향기롭게 때론 구슬프게도 만든다. 살살이 꽃이라 불리는 코스모스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한 몸에 사로잡는다. 별다른 전설이나 설화가 없어도 코스모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추억에 빠지게 하는 매력과 함께 그가 내민 가냘픈 모가지는 소녀의 순정, 애정 그리고 조화라는 꽃말도 가졌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코스모스에 대한 추억은 많으리라. 그러나, 연꽃방죽하면 이 마을이 떠오른다. 진천인이라면 당연히 이곳을 회상하게 된다.

■ 마을 인심 연꽃 성품을 닮다
덕문리 방죽의 연꽃 내음이 훈풍을 타고 사방에 진동 할 때 길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 옛 자취를 감췄다. 연꽃은 한마디로 너무나 아름답다. 저 풍부한 물 위에 누워있는 안락 때문이 아닌 것 같다. 지나친 수분 섭취량을 조절하고 풍우와 일사 등을 이겨내는 성품도 별로 어렵지 않게 지녔을 것이다. 마을 인심이 꼭 연꽃 성품을 닮았다. 마을을 둘러볼라치면 사라져가는 풍물 중에 정미소가 있다. 정미소는 찻길을 끼고 있고 정미소로 가는 길엔 그 옛날소달구지에 볏섬을 실어 날랐다. 정미소 언저리엔 늘 참새가 재재거리고 담배를 입에 문 아저씨들은 벼가 껍질을 벗고 쌀이 되어 나오는 정미소 안을 들여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덕문리 들녘은 '생거진천쌀'의 모태다. 곳간이 넘치니, 예부터 인심이 넉넉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했다. 삼덕리 상덕마을은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 도회지로 떠나는 청년들, 이곳도 사뭇 다르지 않다. 노인들이 많다. 그 중 나이 든 아낙들이 대부분이다. 연로한 남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집성촌이기에 유전적 요인에서 일까. 모를 일이다. 43가구 61세대 138명이 옹기종기 살고 있는 마을이다. 주민중 공무원이 10여명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논농사로 한해를 꾸린다.

■ 정으로 보여주는 이웃사촌들의 풍경
주민들은 농번기가 아니더라도 일손 놓는 일이 없다. 관에서 하는 일일 근로사업에 나가 적은 돈이라도 번다. 하다못해 마을 뒤 켠 하우스시설단지에서 딸기, 머위, 부추재배 일손을 도와 하루 일당을 받아 온다. 바지런한 것에 이골이 났다. 주민 개인당 열서너마지기 쌀농사를 짓는다. 남자가 모자라도, 요즘은 위탁영농을 하니 일손이 수월하다. 기계가 모든 일을 도맡으니, 품삯만 주면 농사는 해결된다. 나이 든 노인들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도움을 준다. 곰비임비 일손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부농으로 귀결된다. 이웃간에 눈 흘길 일 없다. 겨울과 여름철 동네사람들은 관광버스 대절해서 농사 시름 놓고 야유회를 떠난다. 여느 농촌이 그렇듯, 단합과 친목이 이런 모임에서 공고해 진다. 정월 보름마다 척사(윷놀이)대회를 연다. 모윷에 덩실덩실 춤을 추고, 도개에 뾰로통해지니 이를 보는 주민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한 가득이다. 상덕리 주민들 사이에는 사촌이 이웃이란다. 가가호호 벽을 대고 붙어 있으니, 한 집이 고기라도 구울라 치면 그 냄새에 이웃들이 찾아오고 집주인은 수저를 더한다. 참기름이고 밤이고, 곡식들이고 간에 나눠주려는 인심, 손기술이 있는 마을주민은 이웃의 문짝도 고쳐주고, 수도꼭지, 하수구 막힌 것도 뚫어주니 화기애애한 정이 깊을 뿐이다. 뿐만아니라 도로가에 난간이 없어 취객들과 보행자들이 논도랑에 빠지는 사고가 잦았는데, 마을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는 주민이 재료를 구해와 때우고 고쳐 줘, 안심하고 통행하고 있단다. 주민 34명이 500마지기 논농사를 짓고, 연간 쌀수확량은 2000가마에 이른다. 진천군민들도 그렇겠지만, 찰지고 기름진 생거진천쌀에 익숙한 사람들이 여타지역에서 밥을 먹을 때, 밥맛이 없다. 외지인들에게 쌀을 선물해주면 너무 고마워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해 한단다. 이렇듯, 생거진천쌀의 명성이 입소문을 타고 각 지역으로 흘러든 연유에서다. 이곳 덕문리 사람들은 옛날부터 구전하는 말로 “마누라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 못 산다” 얘기가 있다. 그만치 토양이 질고 비옥하다는 뜻이다. 이곳 상덕마을 사람들은 도시화되고 주변에 빌딩과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싫어한다. 인심이 빌딩이고 건물 아니겠느냐 되묻는다. 비록 쌀수매금이 가마당 14만5천여원 정도로 과거보다 논농사로 벌이가 힘들지만, 농투성이는 욕심을 땅에 부리면 된다는 말이 그들의 순박함을 대신해 준다.

■ 보리밥에 열무김치 대접, 노인들 “에구, 고마워라”
이춘자 이장(55)에 따르면 340여만원 자체기금마련을 통해 자연부락 처음으로 CCTV를 6대 설치했다 자랑이다. 한 해 이웃에 도둑이 3번 들어 집안에 현금과 패물을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해, 마을주변에 CCTV를 설치하니, 더 이상 도둑이 얼씬도 못한단다. 자체기금마련은 과거 어른들이 두레공동체를 운영하면서 통장에 넣어둔 금액의 이자와 마을회관 창고를 임대한 수익금,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주민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마을 애경사와 경노당을 찾아가 노인을 대접한다. 부녀회에서는 보리밥에 열무김치 썰어 넣어 된장국에 밥을 비벼드시게 한다든지, 산해진미보다 마음으로 버무린 정겨운 밥상으로 어른들을 봉양한다. 경로당 청소도 부녀회 몫이다. 올 해는 군에서 마을정비사업으로 2천만원의 사업비를 받아, 매실나무 삼백주를 심고 꽃길 가꾸기에 쓰였다. 마을사람들 누구나 할 것 없이 나무심고 꽃길 가꾸는데 동참 했다.
이 이장은 마을숙원사업에 대해 마을에 정자하나 짓는 것을 바란다. 노인들과 주민들이 여름 한 철 시원한 바람과 덕문리 뜰을 바라보며 정담할 수 있는 담소의 장이 상덕에 세워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또한 노인인구가 많다보니, 사시사철 할 수 있는 운동시설들을 마을 한 모퉁이에 설치해 줘 노인들이 건강한 여가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바램도 덧붙였다.
자본주의 철옹성인 첨단의 도시, 치열한 다툼을 통해 살아남는 자만이 승리를 독점할 수 있는 극단의 승자독식사회인 대도시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순수한 표정을 삼덕리 상덕마을에서 만나봤다. 거친 듯하면서도 수줍고, 격한 것 같으면서도 부끄러움이 섞여있는 그곳 사람들의 표정에는 들판의 벼이삭 같이 연한 순박한 자연스러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리/동/네/이/장/님/

이춘자 이장
이춘자 이장
“며느리·딸같은
이장 될 터”

인근 초평면에서 삼덕리 상덕마을로 시집와 살고 있어 평생 고향 지킴이로 붙박은 이춘자 이장은 어르신들에게 며느리처럼 딸처럼 대하며 직분에 충실한 것을 다짐한다. 그녀는 여성 이장들 특유의 꼼꼼함과 열정으로 주민과 행정기관 간 가교역할을 충실해 해주고 있다는 주위의 평가를 받고 있다. 애경사가 있을 때마다 정이 살아있는 마을, 서로 돕고 의지하며 마을 발전을 위해 헌신을 다하고 특히 행정과 긴밀히 협조해 남성이장과는 차별화된 꼼꼼하고 섬세한 시책을 추진하겠다”며 향후 당찬 포부를 밝혔다.


지교만 노인회장
지교만 노인회장
“노인들의 행동,
젊은이의 표본”

이제는 마을에서 젊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고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마을의 노인회는 마을 발전을 이끄는 중심에 위치해 있단다. 지 회장은 특히 “이곳 노인들은 다양한 활동으로 다른 마을 노인회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노인들을 생각하는 마을 젊은이들에 대한 고마움은 곧 환경정화활동으로 이어졌다. 꽃길가꾸기 나무심기에 노인들 스스로 작은 일손을 보태 젊은 사람들의 귀감을 보였다. 노인회 회원들은 마을주변을 돌아다니며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시우 새마을지도자
“살가운 인심,
찰지면 그만”

“마을자랑이 뭐 있겠나요. '인심'하나 찰지면 그만이지요. 넉넉한 곳에서 인심 나고, 곳간에서 나눠줄 양식난다 하지 않았나요” 이웃 간 한데 모여 식사를 하다 보면 옆집 뒷집 대소사를 자연스레 알게 되고 희로애락을 함께 하니 절로 정이 쌓인단다. 주민들끼리 단합도 잘 되고 이웃 간 인심도 좋아 마을 전체가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고 자랑이다. 특히 '나 홀로 노인'이 많은 농촌 특성상 끼니를 소홀히 하는 노인이 적지 않는데, 젊은 사람들이 음식이라도 할라치면 먼저 노인들을 찾아가 살갑게 대접한다'며 마을인심에 엄지를 추켜세운다.

손태옥 부녀회장
손태옥 부녀회장
“숟가락 놓는
이웃간 정 돋보여”

후덕한 마을 인심과 나눔을 통해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은 상덕마을의 자랑이지요. 부녀회에서는 어르신들의 며느리 역할을 하고 있어요.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는 마을에서 일년에 몇번이고 어떤 행사보다도 신경써서 꼭 치르는 일이 있단다. 바로 마을의 연로하신 분들을 모아놓고 음식대접을 하는 것이다. 음식대접이라고 해서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집집마다 있는 그대로를 대접한다. 보리밥에 된장찌게 열무에 겉절이, 아니면 집안 식구수 보다 많게 밑반찬을 만들어 경로당을 찾아가 어르신들께 나눠 주기도 한다. 담장 너머 고소한 냄새가 넘어올라 치면 숟가락 하나 더 놓는 이웃간 정이 있는 마을이다.



우리마을 가볼만한 곳 -
보재 이상설 선생 생가

진천읍에서 초평방면으로 약3km를 가면 도로 좌측으로 이상설생가 입구 푯말이 있는데 그곳에서 포장길을 따라 2km를 가다보면 생가를 만날 수 있다. 진천읍 산척리에 위치했다. 생가는 1987년 3월 3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됐다. 생가 건물은 잡석(雜石)의 기단 위에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진흙으로 마감한 초가(草家)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40여년 전에 무너진 것을 근래에 복원 수리했다. 선생은 현 가옥에서 학자이신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나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 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면서 영어, 프랑스어 등 7개 국어를 구사해 신학문을 깨우쳤다. 1904년에는 보안회의 후신으로 대한협동회를 조직해 민족 운동을 하였으며, 탁지부 재무관 법부협판을 거쳐 1905년 에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된다. 같은 해 11월7일에 수옥헌에서 이또 주재 하에 대신회의가 강제 개최돼 이완용 박제순 등의 찬성으로 조약체결을 선언한다. 선생은 대신회의에 실무 책임자임에도 일본군의 방해로 참석치 못하고 다음날 새벽에 알게 되어 땅을 치며 통곡했다. 1906년 4월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 상해를 거쳐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자비로 항일 민족교육을 시켰으며 1907년 6∼7월 헤이그에서 개최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한국의 실권과 국권의 회복문제를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후 이준은 현지에서 순사한다. 선생은 귀국하지 않고 (선생이 귀국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에서는 궐석재판으로 이상설은 사형, 이준과 이위종은 종신형으로 판결하자 이준은 자결을 하고 이상설은 외국으로 망명을 한 셈이다.)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여러 나라로 다니면서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소련령으로 이주, 한흥동의 한인마을을 건설, 민족교육을 시키다 1917년 47세 때 병으로 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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