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읍 원덕리 원동마을
진천읍 원덕리 원동마을
  • 강성진
  • 승인 2009.09.3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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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자락이 따스히 품고 있는 올갱이 속 같은… 무한한 발전 잠재력을 지닌 마을


진천읍에서 남쪽으로 약 1.8km에 위치한 원덕리 원동마을은 가구수 45호 127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70호에 350명이 넘는 인구수를 가졌던 원동마을은 여느 시골마을과 다름없이 고령화와 인구감소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을을 관통하는 17번국도와 우석대학교건립승인 등 진천읍에 인접해 향후 무한한 발전 잠재력을 지닌 진천읍 원덕리 원동마을을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9월 중순경 찾았다.

■ 원동마을의 연혁
본래 원덕리는 진천군 남변면(南邊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원동, 현조동, 덕배리(원덕리에서 제일 처음 형성된 마을로 원동 동북쪽 700m 지점에 위치해 있고, 다른 가구는 모두 이주하고 박덕배(朴德培)라는 사람만이 산다 해 덕배리라 함)를 병합해 원동과 덕배의 이름을 따서 원덕리라 하고 진천읍에 편입됐다.
원동은 옛날에 청주로 왕래하는 도로가 있었고 벼슬아치들이 쉬었다 가던 집터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옛날 기와가 출토되면서 숙소의 흔적이 남아있다.
검은 관복을 한 벼슬아치들이 쉬었다 갔다해 검은새라는 뜻으로 현조동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고 있다.
뒷편엔 고즈넉히 솟아있는 봉화산이 원동마을을 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고, 옛날 청주와 진천을 잇는 대로였던 한티고개(원동에서 문백면 태락리로 가는 고개인 데, 거리가 10리가 된다 해 한(一)재란 뜻에서 한티고개라 함)를 넘어서면 옛날 역원이 있었던 태락리가 나온다.
하지만 원동마을 출신의 남명수 진천문화원장으로부터 보다 이전의 마을연혁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는데, 오래전부터 구전에 의해 마을지명을 부를 때 매장골(또는 매봉제)이란 명칭이 있어 유래가 궁금하던 차에 청주~진천을 잇는 17번국도 공사현장에서 신라 6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 병사들의 무덤과 토기 240점이 출토되면서 그로 미루어 볼때 원동마을의 연대는 1500년이 훨씬 넘는다는 것이다.
현재 교성리 잣고개에 있는 자료전시관에 이때 출토된 무덤과 토기가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 봉화산자락 올갱이 속 같은 마을
마을 뒷편에 고즈넉히 자리잡은 봉화산을 한껏 품고 있는 원동마을은 남쪽으로 대전 계룡산, 청주 거질대산(淸州巨叱大山) 북쪽은 충주 망이산(忠州望夷山) 봉수대를 바라보고 있는데, 오늘날의 통신망과 흡사하다는 점은 옛 조상들의 지혜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봉화산은 보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청주에서는 송곳처럼 날카롭고, 이월에서 볼 때는 일본 후지산처럼 사석방향에서는 날카로운 시어머니처럼 원동마을에서 바라보면 마음이 너그러운 맏며느리의 치마폭같은 형상으로 보인다며 변화무쌍한 봉화산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봉화산 중턱에 자리잡은 대흥사는 해마다 해돋이행사를 하는 지역의 명소이기도 하다.
또한 산자락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은 아늑하기 그지 없고 마을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마을의 안녕을 바라는 듯 15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버드나무 한그루가 장승처럼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원동마을은 봉화산자락이 따스히 품고 있는 올갱이속 같이 생겼다는 마을주민의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 빈집이 없는 동네
마을의 어른인 남기홍 노인회장은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던 1975년 원덕리 마을회관이 준공됐고, 당시 원동마을은 70호가 넘는 가구에 350명이 넘는 주민들이 모여 살았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간 지금은 65세이상 노인만 70%를 넘는다. 하지만 계속되는 인구감소와 고령화에도 불구하고 원동마을에는 빈집이 없다.
그 만큼 살기가 좋다는 것이 아닌가 ?
봉화산의 정기를 받아서 인지 원동마을은 언제나 활기가 넘쳐난다. 마을모임을 연방계로 통합시킨 이후 부지런한 마을 사람들은 부역 등의 공동작업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단체사진촬영을 위해 취재진이 찾은 날에도 마을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마을안팍의 제초작업을 위해 마을회관에 모였다.
특히 이날 마을총무인 박광호씨의 딸과 사위는 주민들이 부역 후에 마을 어르신들이 먹을 음식을 직접 준비하면서 칭송을 들었다.
또한 40년전만해도 봉화산은 벌거숭이 산이었지만 마을 주민들은 수십년이 넘도록 함께 나무를 식재하고 가꾸는데 함께 힘을 기울여 왔다는 것이 김홍식이장의 설명이다.
이렇듯 우애가 깊은 형제처럼 이웃간 울타리가 없는 원동마을은 살기좋은 마을로 소문이 나서 빈집이 없다는 것이 마을주민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 숙원사업
원동마을은 수십년간 자연재해가 없었고 청정지역으로 소문이 난데다가 17번 국도가 마을을 지나며 교통까지 편리해지고는 외지인들의 발걸음이 많아지고 있다.
전원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수년동안 큰 비로 인해 마을로 토사가 밀려내려와 곡식을 덮는 등의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전원마을로의 진입로가 확보되지 않아 빚어지는 마찰도 적지 않다고 했다.
김홍식 이장은 비단 원동마을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외지인과 부락주민과 함께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주민들은 마을 윗편에 들어오고 있는 전원마을 사람들과의 화합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직은 서로 낯설고 어색한 관계에 있지만 그들도 같은 원동마을사람들이기에 함께 상생하는 길을 찾는 것이 원동마을의 숙원이었다.


/우/리/동/네/사/람/들/

김홍식 이장
김홍식 이장
이사오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마을
만들어 갈 것

김홍식 이장은 11년째 원동마을을 이끈다.

어르신들을 돌보며 소외되는 이웃이 없는지 주변을 살피고 편의 도모를 위해 마을노인정과 회관을 청결히 유지·관리하고 있다.

김 이장에게 최근 고민이 하나 있다면 마을윗편 전원마을에 진입로가 없고, 길도 없는 곳에 열채 이상의 집이 지어지고 있어 전원마을에 이사온 주민들과 마찰이 잦아지고 있는 것이다. 진천읍과 5분거리지만 낙후지역이었던 원동마을이 17번국도다 들어서며 교통의 요충지가 되고 있어 잘사는 마을, 외지에서 이사오는 사람도 원동주민이며 그들과 함께 행복한 마을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남기홍 노인회장
남기홍 노인회장
마을내 농로 좁아
농기계 통행 불편
안전위한 조치 필요

원동마을 주민들 대부분 65세이상 노인들이라며 5년째 노인회장을 맡고 있다는 남기홍 회장는 마을내 농로가 좁은 데다가 진입로가 없는 전원마을 출입차량들 때문에 곡식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와 농기계 통행에 불편함이 있고 사고위험까지 있어 늘 불안하게 통행하고 있다면서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남기홍 노인회장의 동생인 남기석씨(진중 20회)는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부행장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김옥자 노인회총무
김옥자 노인회총무
서로 화합하고
온정 넘치는 마을
만들도록 노력할 것


우리 모두가 건강하게 일하고 빈부격차가 없는 우리마을이 더욱 윤택해져 지역 최고의 풍요로운 마을을 만들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바쁜 일상에서도 마을 일이라면 내집 일처럼 발벗고 나서주는 원동마을주민들이 비록 진천읍에서 낙후된 부락이기는 하지만 노인들도 젊은이들을 도와 서로간에 싸움이 없고, 화합하고 온정이 넘치는 마을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




곽윤희 부녀회장
곽윤희 부녀회장
우리 마을 숙원사업인
농로 확·포장 공사
원활히 이뤄지길


년간 마을 대소사에 궂은 일을 도맡아서 해오고 있는 곽윤희 부녀회장은 마을을 청정지역으로 가꿔 나가는데 우리 부녀회원들도 적극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을 깨끗하게 유지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바 원동을 찾는 손님들도 이에 동참해 주시길 바란다

러 우리 마을의 숙원 사업 중 하나인 농로길 확·포장공사가 원활히 이루어 지길 바란다.





박광호 마을총무
박광호 마을총무
노인을 공경하고
어르신들은 사랑으로
젊은이를 감싸는 마을


우리마을은 따뜻하고 아늑한 기운이 감도는 봉화산자락에 위치해 온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마을이장을 중심으로 노인회,부녀회, 청년회가 삼위일체가 되어 혼신해 젊은 사람들은 노인을 공경하고, 어르신들께서도 젊은 사람들을 사랑과 이해로 감싸주시는 모범적인 마을임을 자부한다.

“정이 넘치는 분위기를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우리마을 가볼만한 곳 - 봉 화 산

옛날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높은산 위에 횃불을 들어서 외난(外亂)이나 내란(內亂)등을 조정이나 일반국민에게 알렸다.
진천의 봉수지는 진천읍에서 청주로 가는 곳을 바라보면 봉화산(烽火山)이 있다.
거기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남쪽은 청주 거질대산(淸州巨叱大山) 북쪽은 충주 망이산(忠州望夷山) 봉수대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는 청주에서 오는 봉화를 받아서 충주 망이산으로 보내는 중간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러나 봉수대가 문명의 이기(利器)에 밀려서 자취를 감춘지 벌써 100여년이 된다.
봉화산을 봉수대가 있기 전에는 소을산(所乙山 所仁山 蔬乙山 所月山)이라고 했다.
봉수대가 있기 전에는 소나무가 무성해 솔산이라고 불렀던 것이 한자로 소을산이 됐다.
그 뒤에 봉수대가 있었기에 봉화산이라고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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