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곡면 양백리 이티(배티)마을
백곡면 양백리 이티(배티)마을
  • 정진희
  • 승인 2009.12.09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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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 피해 함께 한 성지,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하는 곳


겨울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신 날 백곡면 양백리에 있는 배티마을을 찾았다. 비가 온 직후 산과 들의 나무와 땅이 만들어 낸 입김 같은 옅은 안개가 대기를 고요히 감싸 안아 한적한 길을 달리는 차안에서 본 풍경은 수묵화를 감상하는 듯 담담하고 운치가 있었다. 배티마을을 찾아가는 길을 따라 펼쳐진 풍경의 아름다움은 날씨와 계절에 따라 각각의 다른 매력으로 다가 와 마음에 스며들어 오붓하게 자리 잡았다. 별세계를 찾아 구름마차를 타고 가는 기분으로 배티마을을 찾아 가 본다.

☆ 고요한 숨결이 머무는 별천지
배티마을의 이름에 대한 유래는 동네어귀에 돌배나무가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쉼의 자리가 되다보니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란 말이 생겨나 불리게 되다 이티가 되었다는 설과 조선 영조 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이 마을 팔십 노인 이순곤이 이끄는 주민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 쪽으로 향하다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 패전하였다는데서 패치라 불리 우다 바뀌었다는 설이 있고 행정적인 지명은 이티마을이지만 배티마을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산골물을 따라 길게 형성된 마을로 맑고 상쾌한 공기가 무의식적으로 해오던 호흡을 깊고 긴 호흡으로 의식하며 들이쉬게 하고 진수성찬의 음식을 먹은 것처럼 뿌듯한 미소를 짓게 한다. 이렇듯 경치가 수려하여 갑갑한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전원주택을 짓는 경우가 많다 한다. 또한 마을엔 성지가 있어 수려한 경치에 정성스런 손길로 만든 조경을 더했으니 금상첨화라,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성지를 찾는 성도들의 발길 뿐 아니라 아름다운 경치를 익히 듣고 찾아오는 등산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하니 더 이상의 말이 필요치 않다.
맑은 공기만큼이나 물도 깨끗하고 맑아서 마을사람들은 내에 호수를 대서 물을 끌어다 사용한단다. 요즘 웬만한 시골 마을의 오염된 물과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냄새를 생각하면 이곳이 바로 별천지라 해도 손색이 없다.

☆ 고즈넉이 자리 잡은 순박한 마을
화전으로 땅을 일구 던 부농의 마을이었다던 배티마을을 조용식 이장은 “어렸을 때 마을 앞의 내에서 친구들과 멱 감을 때 오솔길을 따라 100여 마리의 소를 몰고 안성 5일장과 진천 장을 오가 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난다”고 회상했다. 부농의 마을이었던 배티마을이 자급자족 정도의 농사를 짓는 사람만 남아 있는 이유는 유통과 판매의 벽을 넘지 못함으로 경제적인 타산이 맞지 않게 되어 서다. 현재 젊은 사람들은 직장을 찾아 도외지로 이주하고 20가구의 30여명의 주민이 함께 하고 있으며 70세 이상의 노인분들이 대부분이고 남아있는 젊은 사람들도 직장을 다니고 있어 품앗이를 하며 정이 돈독했던 예전을 생각하면 지금은 얼굴을 마주할 시간도 적어져 아쉽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떠난 출향인도 아름다운 고향으로 언젠가 꼭 돌아오기를 소원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매해 7월 셋째주 50여 명이 향우회로 모임을 갖고 있는데 18년이나 되었고 넉넉한 찬조로 마을 예치금이 있다고 하며 84년부터 만들어진 위친계는 15명의 회원들이 마을 경조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있으며 음력 10월 30일의 대동계는 60년 동안 이어져 오는 동네의 자랑이다. 또한 최인영노인회장의 이장시절 새마을 사업의 성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을 만큼 마을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배티마을 사람들은 출향인과의 관계도 돈독하지만 마을로 찾아든 사람들과의 돈독한 정을 나누고 있다. 새로운 환경으로 이주해 와서 흔히 말하는 텃새로 힘든 경우가 종종 있지만 배티마을에선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배타적이지 않고 마을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집은 다르지만 마을이라는 집에 살고 있는 가족이 아니냐고 주민들은 입을 모아 말을 한다. 서로 도움이 필요하면 아끼고 도와주고 더 좋은 마을을 만들어 가기 위해 합심을 하며 살아가고자 항상 노력하는 마음이 아름답다.


☆ 배티마을 사람들의 소망
옥처럼 아름다운 배티마을에 작은 소망이 있단다. 그것은 외지에서 찾아 온 성도들이 성지 참배를 위해 지역일대 1.5㎞정도를 걸으며 돌 때 인도가 부분적으로 끊긴 곳이 있어 교통사고의 위험과 등산객들이 자주 찾는 등산로에 풀어 우거져 혹시 안전사고가 있지 않을까 항상 염려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인도개설과 등산로 정비에 관심을 가져주길 소원하고 있다. 마을에선 매월 1일과 15일에 청소를 해오다 지금은 항시 마을청결에 힘을 쏟고 있는데 한정된 인원으로 이 마을의 인도만을 돌보는 것은 힘든 일인 것을 알지만 좀 더 아름답게 꾸며주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고 진천 지역의 명소라 할 수 있는 배티성지를 위해서도 매실나무 같은 조경수가 있다면 더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라 말하며 군에 협조를 바란다고 전했다.
또 배티마을엔 마을회관이 아직 없다. 군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고 마을 사람들도 여러모로 고민을 하며 부지를 선뜻 내 놓는 분도 있었지만 적당한 부지를 찾을 수가 없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부지문제가 잘 해결되어서 모임의 장소로써 정을 돈독하게 해 줄 회관이 세워지길 고대하고 있다.
배티마을은 풍경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찾아오는 한 분, 한 분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마을을 가꾸고 사랑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있어 더 아름답게 빛이 난다. 사람들이 찾아들고 떠난 사람도 항상 돌아오기를 꿈꾸는 이유는 아름다운 경치처럼 마을사람들의 마음 또한 아름답게 빛이 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동/네/이/장/님/

조용식 이장
조용식 이장
정 있고 활기 있는
마을 만들 것

마을 발전을 위해 늘 도움을 아끼지 않는 주민께 감사를 드린다며“요즘은 소득이 늘어 삶이 윤택해졌을지 모르나 활기가 없고 사람들 마음도 삭막해져 가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먼저 손을 내밀기를 어려워 하지만 정이라는 것은 나눌수록 커지는 것입니다. 정을 나누는 따듯한 마을로 누구든 머물고 싶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 더 노력하겠습니다”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최인영 노인회장
최인영 노인회장
마을회관 부지 문제가
빨리 해결되기를…

마을일을 집안 일로 생각하며 살아 온 회장은 “예전에는 25리 되는 거리를 지게를 짊어지고 걸었었는데 이제는 교통도 좋아지고 편리해져서 좋지만 사람들이 적어 마을이 적적한 감이 있다. 마을회관 부지문제가 어서 해결이 되어서 회관을 멋지게 세워 함께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음식도 만들어 먹으며 생활이 생동감 있어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최종성 새마을지도자
최종성 새마을지도자
전국적으로 유명한
배티성지가 될 때가지

대대로 천주교 신자로 본인의 땅을 기증 해 성지 발전에 힘쓴 최종성 새마을 지도자는 “마을에서도 힘쓰지만 군과 지역의 더 많은 관심과 협조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성지가 되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배티성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하며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와 예전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동구 밖까지 들리는 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희기 부녀회장
정희기 부녀회장
모든 부녀회원들
사랑합니다.

늘 마을을 위해 수고 해 주시는 이장님과 마을 임원께 감사드린다며 “우리 마을 부녀회는 다른 마을보다도 적은 회원 수 이지만 화합하는 모습은 다른 마을 부럽지 않습니다. 언제 어느 때의 행사든지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어서 언제나 감사하고 자랑스럽습니다”고 말했다.


최요한 마을반장
최요한 마을반장
배티성지를 무한한
관광자원으로…

마을의 힘 되는 일에 솔선하는 최요한 반장은 “많은 외지인 뿐 아니라 외국인까지 찾아오는 배티성지는 진천을 대표하는 곳으로 배치성지로 인해 진천도 많이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자원이 있음에도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고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이고 수렴하여 군과 기관, 마을주민 모두가 합심하여 지역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를 소원합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마을 가볼만한 곳 - 최양업 신부 동상과 배티의 옛 신학교

최양업 신부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도에 힘쓰며 6월 중순부터 8월 초순까지 장마철에는 이곳, 이티(배티)마을에 머물며 각종 자료를 정리하고 교리를 전파했다.
기도서(천주성교공과)를 번역하고 순교자의 기록을 정리한 것도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박해 때 순교자들을 조사하여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번역하고 이를 다블뤼주교에게 전달케 함으로써 훗날 순교자 103위가 복자위를 거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음은 그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할 것이다.
최양업 신부가 활동하던 시기는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등 세 차례에 걸쳐 큰 박해를 겪은 뒤라 신자들의 교리지식은 거의 백지에 가까웠다. 성직자와 전교회장등 지도자급 인물들이 모두 순교한 뒤였기에 신앙생활 또한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신앙의 자유도 없었고 드러내 놓고 집회를 갖기도 어려운 상황에 종교행사 또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치러야했던 때였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최양업 신부는 짧은 시간에 많은 신자들에게 기본 교리를 알 수 있게 기사체로 만들었다. 이것이 (천주가사)이다.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는 모두 19편으로 되어있고 이 천주가사를 곡조에 맞추어 노래한 것은 1900년대 부터이고 성가에 본격적으로 도입 된 것은 1920년경이었다. 천주가사가 서구적 그리스도 사상을 우리나라 사람의 전통사상과 의식구조에 토착화 한 작품으로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국문학사에도 크게 이바지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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