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 진천자치신문
  • 승인 2019.05.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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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는 인간 삶의 근본이요, 복을 받는 지름길이다.”

김재식 진천노인대학장

일년 중 만물이 가장 힘차게 성장하는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조선왕조 500년 동안에 부모님께 효(孝)를 다함으로써 하늘이 내려준 천복(天福)을 받은, 조선 숙종 때의 실화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의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밖 구파발에 사는 최 서방이라는 농부가 있었다. 최 서방은 연로한 아버지와 건강한 딸아이 하나를 데리고 살면서 화전민에 날품팔이로 연명을 하는 가난한 천민이었다. 그래도 누구보다 남다른 효심이 있어서 집에 올 때는 항상 술과 고기 등을 사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지극한 효자였다. 최 서방이 사는 이웃에는 그의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는 안씨 성(性)을 가진 지관(地官:풍수를 보는 사람)한분이 계셨는데 최 서방은 그 친구 분까지 집으로 모셔다 극진한 대접을 했다.
세월이 흘렀다. 아들의 지극한 효도를 받아온 최 서방의 아버지는 천수(天壽)를 누린 뒤 저 세상으로 가셨다. 천민이라 선산도 없고 하여, 첩첩산중 외진 곳에 아버지를 모시고자 산소자리를 찾아 다녔다.
이 광경을 본 안 지관은 평소에 그토록 효성이 깊고 이웃 어른인 자기에게까지 친아버지처럼 모시며 효성을 다한 최 서방이 불쌍하기도 하고 고마워서 이번 기회에 그동안 진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묏자리 구하느라 정신없이 발품을 팔며 돌아다니는 최 서방을 불렀다. 
“아버님 묏자리는 어떻게 구했는가?”
“지관어른, 저 같은 천민이 묏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돌아가신 후에도 쉬실 곳 없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저 ·····”
최 서방은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그만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안 지관은 최 서방의 효심에 또 한번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최 서방! 실은 내가 죽으면 가려고 묏자리 한곳을 보아 둔 곳이 있네. 그 묏자리를 자네에게 주겠네. 아버님을 그 곳으로 모시도록 하게.”
최 서방은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했고, 안 지관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말이야, 그 묏자리는 보통 묏자리가 아니야. 명당 중에 명당이지. 외손이 크게 될 그런 묏자리야. 그러니 자네는 아버님 장례를 마친 후에 서울의 4대문 안으로 이사를 하게, 그래야 좋은 일이 생길 걸세.”
최 서방은 아버님의 장례를 치른 후 안 지관이 시키는 대로 돈의문(敦義門) 안의 어느 대감집의 행랑채를 빌려서 이사를 했다. 말하자면 대감댁의 집사 겸 하인으로 들어가 마당쇠 노릇을 하면서 지냈다.
하루는 최 서방이 대감님께 건의할 내용이 있어 말씀을 아뢰었다.
“대감마님! 제 딸아이가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대궐 안에 머물면서 허접한 일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아, 그렇지, 최 서방에게 딸아이가 하나 있지? 내 한번 알아봄세.”
대감은 최 서방이 비록 배움은 없고 천민 출신이긴 하나, 평소 진실한 성품에 부지런하고 부모님 살아계실 때 효성이 지극했다는 풍문을 들어 보기 드문 효자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대감은 즉시 자리를 알아보았고, 마침 중궁전에 있는 궁녀를 모시는 무수리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대감은 즉시 최 서방의 딸을 천거했다. 요즘말로 하면 취직을 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때가 마침 조선왕조 19대 숙종대왕이 희빈 장씨(장희빈)의 중상모략에 빠져 중전마마 인현왕후를 폐출하려고 하던 때였다. 그 후, 인현왕후는 결국 왕손도 두지 못하고 35세의 나이로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숙종대왕도 아까운 나이에 먼저 간 인현왕후를 늘 그리며 하루는 야밤에 미행으로 중궁전을 찾았다. 중궁전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인현왕후가 기거하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게 아닌가.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궁녀인 듯이 보이는 여인이 옷가지를 매만지고 있었다. 숙종대왕은 인기척과 함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험! 내가 이 나라의 임금이니라. 너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는고?”
“전하! 저는 중궁전의 최 무수리라 하옵니다. 왕비마마가 돌아가신 후 이 방을 지키면서, 생전에 입으셨던 마마의 옷가지를 손질하고 있는 중이었사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먼저 떠난 왕비 생각에 자주 마음이 허전하고 울적하던 차에 왕비의 옷가지를 매만지고 있던 마음씨 고운 이 여인을 보자, 숙종대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양 최 무수리에게 마음이 끌렸다. 숙종대왕은 그날 밤 그 여인과 하룻밤을 지냈다. 이후 숙종대왕은 최 무수리를 찾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밝은 날 숙종대왕이 최 무수리를 보니, 골격이 큼직큼직하고 얼핏 보기엔 사내 대장부처럼 생겨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열 달 후 최 무수리는 왕자를 낳았다. 내시는 이 사실을 즉시 숙종대왕께 고했다.
“최 무수리가 왕자를 낳았다고? 어허 이거야말로 나라의 경사로다. 왕실이 번창하려면 왕자가 많아야 하는데, 큰 기쁨이로다. 상궁은 어서 가서 그 왕자 아기를 데려다 내전에서 잘 기르도록 하라!”
숙종대왕의 어명에 따라, 그 아기는 내전으로 옮겨져 어엿한 왕실 교육을 받으며 잘 자랐다. 역대 왕자들은 보편적으로 나약하여 각종 질병을 안고 살았는데 이 왕자는 외가 쪽의 어머니, 즉 최 무수리의 튼튼한 유전자를 이어받아 감기도 한번 걸리지 않고 잘 자라주어 주상전하의 총애는 물론 왕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훗날 최 무수리의 아들 연잉군은 조선의 제 21대 왕으로 등극을 하니 그가 바로 영조대왕이다. 500년 역대 조선왕조 중에서 가장 오랜 집권(1724~1776년)을 한 영조대왕은 30~82세까지 약 50여 년간 재임한 왕으로서 사색당파 싸움의 병폐를 없애고자 탕평책을 시행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바로 이러한 영조대왕의 외할아버지가 돈의문 밖 구파발, 첩첩산중의 산골에서 날품팔이와 농사를 지으며 살던 천민 출신으로서, 효성을 다한 최 서방(영조에 의해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 추서됨)이었다.
이와 같이 최 서방의 가문이야기는 부모님께 효(孝)를 다하면 천민의 외손자가 왕이 될 수도 있고 가장 낮은 신분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벼슬인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영의정까지도 올라가는 것처럼 천복(天福, 큰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입증해준 좋은 사례라 하겠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 정보화 시대라고 하지만, 효사상(孝思想)은 여전히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임에 틀림없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인성의 근본인 효의 실천을 다 함께 되새기고, 그 정신을 후대에도 깊이 심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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