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前 한국JC 사무총장
김종필 前 한국JC 사무총장
  • 정선옥
  • 승인 2010.02.10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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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 Talk! 스물다섯번째 손님


취중토크의 묘미라면 한 인간으로서의 인터뷰이의 모습을 가감없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그 사람의 살아온 모습부터 가치관과 세계관, 작게는 술버릇까지, 마치 오랜 세월 동안 한 공간에서 생활한 것 같은 친근한 느낌이 생겨난다.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입장이 아닌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나 선·후배 같은 공감대가 형성되곤 한다. 논어의 옹야편에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말이 있다.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는 말이다. 김종필 전 한국JC사무총장은 진천JC회장과 JC충북지구회장, 한국JC사무총장, 진천군체육회이사 등 굵직한 단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오면서 지도자적 역량 역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애초부터 뛰어난 능력을 타고나서가 아니라 일을 함에 있어 늘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즐기면서 일하기 때문일 것이다.일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현재에 안주하는 법이 없다. 늘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변화를 주도한다. 오늘 만난 인터뷰이가 맹자가 꿈꾸던 바로 그런 사람일게다.


Q 어린시절 이야기를 좀 해 주시지요.
A 지역이니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탓에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말까지 여동생과 외갓집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철이 없는 생각이지만 어렸을 땐 정말 방학이 싫었어요. 방학이 되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잘라서 땔감을 준비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너무 힘들었던 거지요. 게다가 할아버지가 돼지를 키우셨는데 그 당시엔 지금처럼 사료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구정물을 먹였어요. 물통 2개를 양쪽에 지고 4구를 돌면서 구정물을 얻어다가 돼지를 키웠습니다.
물론 좋은 추억도 있었겠지만 막상 떠오르는 건 힘들게 일했던 기억밖에 없네요. 참 어렵던 시절이었습니다.

Q 학창시절 이야기를 좀 해 주시지요.
A 중학교를 다닐 때에도 친구들과는 조금 별나게 놀았지만 졸업하고 청주 세광고에 진학하고 나서는 진천과 청주의 분위기가 너무도 달라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고 외로운 시기였는데 아는 선배나 친한 친구도 없었고 어머니와도 떨어져 있으니 의지할 곳이 없었지요. 자금이야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도 해 보았지만 어찌 생각해 보면 저에게 그런 시기가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청소년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Q JC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언젠가요?
A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 까지 아침마다 신문을 돌렸는데 그 때 충청일보 지사장을 하던 이상돈 씨 사무실이 진천JC 태동 맴버들이 주로 이용하던 곳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분들과 안면이 있었는데 제가 성년이 되었을 때 선배들이 먼저 가입 권유를 하셨습니다.
제대하고 읍에서 식당을 할 때였는데 저야 어렸을 때부터 동경의 대상이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만 기존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입회를 허가했을 땐 정말이지 꿈만 같았습니다. 제가 자라온 모습을 보아온 선배님들이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가입됐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Q JC 하면 전국 단위의 거대한 조직인데 혹시 진천 출신 중 충북지구JC 회장이나 한국JC 사무총장을 역임하신 분이 또 계셨나요?
A 제가 처음이었지요.

Q 한국JC 사무총장이 되셨을 때 국회의원을 할 거라는 소문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어렸을 때 꿈은 무엇이었나요?
A 글쎄요. 딱히 뭐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려서는 누구에게나 ㈀맛� 아버지, 누구의 삼촌 등의 우상이 있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 때 막연하게나마 '나도 누군가의 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Q 전국의 지인들에게 우리 진천군의 특산품을 자주 선물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A 한국 JC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인맥의 폭이 상당히 넓어졌습니다. 많이는 하지 못해도 명절때마다 기왕이면 우리 진천군을 상징하고 홍보할 수 있는 생거진천쌀을 택배로 보내주곤 합니다. 굳이 금전적인 값어치로 따지자면야 큰 선물은 아니지만 받는 분들이 상당히 좋아하십니다. 그런 반응을 볼 때마다 보내는 저 역시 뿌듯하구요.

Q 다른 여러 가지 일들도 많이 하시지만 그래도 JC 내에서 굵직한 역할을 해 오셨는데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일까요?
A 처음 JC에 들어왔을 때, 그리고 처음 진천JC 롬 회장을 맡았을 때겠지요. 회원도 40명이 채 되지 않았었고 단체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선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던 때입니다. 당시 롬 회장을 맡게 된 계기가 물론 사람도 없었지만 일을 눈앞에 두고 비겁해지기 싫어서였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 처음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구요. JC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단체였으면 좋겠는데 비주류다 보니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Q 그 당시 JC에서 나름대로 대민봉사 활동을 많이 하시지 않았나요?
A 주민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제가 롬 회장을 맡고 나서 장례지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이야 장례식장에서 어렵지 않게 장례를 치르지만 예전에는 상갓집에서 장례를 직접 치렀거든요. 당연히 상을 치르는 집은 마당에 천막을 치고 조문객들을 맞아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천막과 상, 돗자리, 난로, 수저, 하다못해 간장종지까지 일체를 구비해서 무료 대여를 했습니다. 그 사업으로 인해 지역민들과 유대감이 생겨나고 그 해에 12명의 신입회원을 받았습니다. JC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젊은이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던 거지요.

Q 충북지구JC 회장직을 맡으신 때가 2001년이었나요?
A 그렇습니다. 회장직에 나서기로 했던 분이 갑자기 건강을 잃게 되어 부득이하게 제가 기용된 것입니다. 그 당시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모아 제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가서 진천JC를 빛내고 오라구요. 정말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나간 제가 지구에 나가서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사무총장이라는 자리까지 가게 됐습니다. 제게 큰 행운이 따랐다고 봐야지요.

Q 한국JC 사무총장을 역임하셨으니 인맥이 대단하실텐데요. 정치는 인맥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 정우택 도지사를 만났는데 경기도 모 국회의원이 하이닉스 이야기를 하면서 정 지사와의 인맥싸움에서 졌다고 이야기 한다고 하더군요.
A JC출신의 국회의원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분들과 직·간접적으로 네트워크가 연결되는 것이죠. 사무총장직을 맡아 일하던 시절이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우물을 벗어날 수 있었던 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물론 그 역할을 맡지 않았더라면 내 가족과 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 수는 있었겠지만 그로 인해 나무가 아닌 더 큰 숲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Q 도의원에 출마하신다고 들었는데 굳이 도의원 출마를 고집하는 이유가 뭡니까?
A 정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도의원의 역할이라는 게 뭡니까? 지역에 도비 많이 끌어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제가 이때까지 쌓아 온 중앙과 지방의 인맥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지역발전에 큰 보탬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Q 보선 전이라면 모를까 집권당의 인기가 많이 떨어진 상황에서 굳이 한나라당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터를 잡아야 하는데 이 때는 주변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인맥이 보수적 성향이 강하고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이런저런 여건을 놓고 볼 때 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한나라당이더군요. 쟁쟁한 경쟁자들이 계시니 제가 더 열심히 노력해야지요. 어차피 제가 넘어야 할 산입니다.

Q 아무래도 한나라당에 인맥이 포진되어 있으니 활동이 유리하시겠지요. 하지만 공천이라는 것이 어차피 하향식 공천인데 혹여 공천을 받지 못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A 제가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공천이 목적이 아니라 내 달란트를 가지고 지역에서 어떠한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돌아서 가더라도 끝까지 갈 것입니다.

Q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고등학교 시절 교회 선교단의 악기를 구매하기 위해 찹쌀떡 장사를 할 때 찹쌀떡을 지나치게 많이 사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에 피아노를 사주신 기억도 나구요. 가끔 차를 타고 지나다 보니 아침마다 교회 앞에서 교통봉사를 하시던데 얼마나 하신거죠?
A 3년째 하고 있습니다만 그건 신앙적인 문제니까요. 그래도 누군가가 사람을 만날 때 전혀 1%도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Q 죄송합니다만 일부에서는 모친의 이야기로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데요.
A 옛날부터 정치가는 3대를 본다고 합니다. 지역 정치에서 어머니 때문에 제가 불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압니다. 사실 정치를 해야겠다고 뜻을 세웠을 때 어머님이 가장 큰 걱정이었습니다. 모친이 수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고 지금도 많이 불편해 하십니다. 저로 인해 굳이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저로서도 당연히 좋지 않지요. 지난 선거 때도 주변의 권유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이유도 바로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단 어머니가 아니라 제가 출마하는 겁니다. 지나간 과거를 보기 보다는 현재, 그리고 또 다른 미래의 비전을 봐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Q 평소 어머님께 잘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인생의 방향타가 돼주는 좌우명이 있으신가요?
A 저의 좌우명은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정도를 가자'입니다. 어쩌면 지금이 제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저를 비난하는 사람, 거부하는 사람, 전혀 다른 동선에 있는 사람들 있으나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가 정말 정도를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Q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어떤 분이신가요?
A 저의 어머니 입니다.

Q 자식에게 인정받는 부모야 말로 성공한 인생이겠지요. 어머니를 존경하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A 제가 최선을 다하는 효자는 아니지만 만약 제가 어머니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어머님이 하셨던 것처럼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 봅니다만 저는 그만큼 하지 못했을 겁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어머니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고 또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막걸리 집 아들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피해갈 수 없는 현실입니다. 제가 어머니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다면 저는 당연히 감수할 것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저의 어머니를 가장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어머니나 저나 나름대로 어려운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는 많은 이들에게 저로 인해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살아보니 세상이 녹록치 않더군요. 29세에 혼자 되셔서 오직 자식 하나만을 보고 여지껏 살아오신 분입니다. 6, 70년대에 여인의 몸으로 자식들을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홀몸으로 자식들 먹여살리기 위해 시장에서 막걸리 장사를 하셨다고 해서 제가 어머니를 부끄러워 해야 합니까? 어느 누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를 부끄러워 하겠습니까?

Q 처갓집 역시 진천으로 알고 있는데 연애결혼 하신건가요?
A 엄격히 따지면 중매결혼인 셈입니다. 어머니들이 서로 친구사이여서 저희도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장모님께서 적극 맺어주셨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 집에 와서 밥 할 생각 있느냐고 물어봤지요. 그리고 3개월 만에 결혼했습니다.

Q 장모님과 어머님이 친구사이였으면 서로 속속들이 너무나 잘 아는 사이였을 텐데 장모님 입장에서는 그만큼 신뢰가 컸기 때문에 따님을 선뜻 내어 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A 집안일과 바깥일 두 가지를 다 잘 하면 좋겠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 장모님을 찾아뵙고 출마 이야기를 꺼냈더니 걱정이 많으시더군요. 하는 일이 많으니 당신 딸 고생시킬까봐 걱정도 되시겠지요.

Q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A 현재 4개 종목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충북궁도협회 부회장을 맡게 된 계기는 대한궁도협회와 충북궁도협회 사이에 어려움이 있던 시기여서 당시 대한궁도협회 임원들과 친분이 있던 제가 조정자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잘 해결이 됐습니다.
진천군탁구협회장은 제가 진천군체육회의 이사를 맡은 첫해에 친구가 탁구협회 경기이사로 있었습니다. 이왕이면 친구를 좀 도와줄 수 있겠구나 해서 인연을 맺은 것이 벌써 11년째구요, 야구는 예전에 동호회 2개가 전부였던 것이 이제는 직장인 야구단까지 더해져 인원이 많이 늘었습니다. 제가 세광고 출신이거든요. 하지는 못해도 눈으로 보는 것은 좋아해서 창구역할을 하게 됐고, 또 도 협회장이 지인이다 보니 함께 협회일을 보게 되어 충북야구협회 부회장까지 맡고 있습니다.
당구협회는 4년째 일을 보고 있는데 JC활동 하면서 많은 도움을 줬던 후배가 당구협회를 만들면서 좀 도와줬으면 하기에 처음에 가볍게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대회 형식부터 틀이 잡혀 있더라구요. 요즘엔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많이 나아져서 생활체육에 관심이 높습니다.

Q 훌륭한 지도자란 어떤 지도자일까요?

A 고을을 다스리는 사또의 생각이 바뀌어도 고을을 지키는 향리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 고을은 발전이 없습니다. 고을의 여론을 주도하고 지역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이들의 생각이 바뀌고, 지역 현안에 대안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해 주어야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에 다섯 가지 부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최악의 지도자는 억압과 강제로 백성을 이끌고 가는 이요, 네 번째는 억압하지는 않지만 일방적으로 자신을 따르기를 고집하는 자요, 세 번째는 백성을 이끌고는 가는데 다툼과 혼란이 끊이지 않고, 두 번째는 지역민들을 교육시키고 계도해 끌고 가는 이요, 여러사람의 이익을 찾아가는 자가 최상의 지도자라 했습니다.

Q 지난해 우석대학교 진천캠퍼스 건립이 교과부의 승인을 받았는데요, 개인적인 견해로 볼 때 2012년 개교가 가능할까요?
A 모두가 안될거라고 이야기 했던 교과부 승인을 지난해 4월 얻어내지 않았습니까? 진천군민 모두가 합심해서 집행부에 힘을 실어준다면 2012년 개교가 충분히 가능하리라 봅니다.
지방자치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교, 관광, 기업체 유치가 필수적입니다. 지역에 학교가 없음이 늘 안타까웠는데 지역의 발전을 논할 때는 당리당략을 떠나 정치적 입장 없이 큰 틀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진천군민들에게 한말씀 해 주시지요.

A 제가 이 길을 가고자 하는 이유는 이 일을 내가 즐길 수 있고, 또한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 지역에 도움이 되고 제가 가는 길이 후배들에게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업가로서 지역에 해야 할 역할이 있지만 도의회에 가서 할 수 있는 다른 일 역시 큽니다.
이번 도전에서 실패할지 살아남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떠한 경우에라도 감사한 마음 갖고 살겠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운동화 끈 질끈 동여매고 열심히 뛰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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