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우 우리치과 원장
이 동 우 우리치과 원장
  • 임현숙 기자
  • 승인 2020.09.1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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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살이 시작한 행복한 치과의사
이동우 원장이 우리치과가 위치한 건물에서 활짝 웃고 있다.
이동우 원장이 우리치과가 위치한 건물에서 활짝 웃고 있다.

 

단국대 치대, 서울대 치의학전문대학원서 임플란트 과정 연수
“지역정서, 추구하는 삶과 일치해 진천사람으로 더불어 살 것”   

한 젊은이가 진천에 반해 진천에 살기 위해 여덟 번이나 지역을 방문하고 치과를 개원했다.  ‘우리치과’ 이동우(35) 원장이다. 
그는 지난 7월 본격적으로 진천살이를 시작했다. 이 원장은 “남들보다 늦게 치과대학을 나와 천안에서 공중보건의를 거쳤고, 포항과 부여에서 2년 동안 빡세게 봉직의로 살았다”고 했다. 봉직의 시절 내 가족 살피듯 꼼꼼하고 섬세하게 환자들과 소통하면서 이 원장을 찾는 환자들이 많았고, 많은 선배들이 자신의 병원으로 끌어당겼지만, 그는 어린 시절 ‘시골에 살겠다’는 결심과 첫눈에 반한 진천에 이끌려 결국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진천에 반했다”
이동우 원장은 충남 금산이 고향이지만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와 대전,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릴 적 많이 아픈 아이였고 공부도 그다지 잘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린 시절에는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정기적으로 다닐 정도로 병약했고 중2때 서울로 전학 하면서 가장 활발한 시기를 보냈다. 그때 그는 공부만 빼고 농구, 축구, 배구 등 모든 운동을 잘하는 학생이었다.
그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고1 겨울방학부터다. 그는 “목표가 없어서 그런지 열심히 공부해도 잘 되지 않았다”며 “못했던 공부를 한다는 생각으로 수능을 5번 봤다”고 했다. 그 사이 한동대에서 대학생활도 했고 결국 단국대 치과대학 치의예과를 선택했으며 이후에는 서울대 치의학전문대학원 임플란트과정을 연수했다. 취미로 사진을 즐겼고, 대학시절에는 기독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이 원장이 진천에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어린 시절 잠깐이지만 시골에 살았던 기억 때문이다. 공중보건의와 봉직의 시절 경험한 소도시에 대한 연민도 작용했으리라. 그는 “복잡하지 않은 곳에서 편안한 사람들과 욕심내지 않고 급하지 않게, 슬로우(slow)한 삶을 살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진천이다”며 웃었다.  

환자 얘기 잘 들어주는 의사
진천에 젊은 치과 의사의 등장은 금방 입소문나기 쉽다. 그만큼 젊은이들이 귀하고 어르신들이 많기 때문이다. 
개원 한 달이 채 안됐지만 이 원장이 운영하는 ‘우리치과’에는 제법 예약손님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직장인들이 많고 어르신도 꽤 많다. 어린 시절 친할머니,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많은 이 원장은 특히 어르신들이 마음이 쓰인다. 그는 “의사는 환자의 말을 경청하고 환자들은 의사의 말을 받아들이는 쌍방향 관계를 가져야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어르신들과는 천천히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이다”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이 원장은 치과를 운영하면서 ‘과잉 진료없이 꼭 필요한 치료만 하고 환자들과 정보를 공유하겠다’는 진료철학을 실천할 생각이다. 환자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의사가 되겠다는 뜻이다. 
개원 후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을 살고 있는 이동우 원장, 그는 "봉직의 시절에는 병원을 개원하고 나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개원하니 준비해야할 것도 많고 익혀야 할 것은 더 많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낮선 곳에서 시작하는 아들을 불안하게 지켜보는 부모님의 걱정도 한몫하고 있다“며 눈이 보이지 않게 웃었다.  
귀촌한지 불과 두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급했던 마음이 넉넉해지고, 출퇴근길에서 만나는 이웃들이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형제 같다는 이동우 우리치과 원장, ‘순리대로 살자’는 좌우명에 기대 홀로서는 그의 진천살이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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