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창 진천읍장
이규창 진천읍장
  • 정선옥
  • 승인 2010.02.26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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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 토크 스물여섯번째 손님


지난 70년, 말단 공무원으로 출발해 교통행정, 공보, 청소행정, 농정, 사회복지, 경리, 예산팀장을 거쳐 문백면장, 의회사무과장, 재무과장, 진천읍장으로 40년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는 이규창 진천읍장. 평소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동료 직원들 뿐만 아니라 주민들로부터 호평을 받아온 솔직담백한 성격의 천상 선비같은 이 읍장이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 출발선상에서 힘찬 첫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몸담았던 공직을 떠난다는 것이 그리 시원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Q 무척 수척해 보이십니다.
A 그래 보이나요? 허허허. 막상 40년간이나 몸담았던 공직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니 부담이 적지 않습니다. 신년 초부터 이것저것 신경쓰다 보니 몸무게가 많이 줄었습니다.

Q 신년 초부터 읍장님 군의원 출마설로 진천읍이 떠들썩했습니다. 진천읍장이라는 상징성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읍장님의 지나온 행적을 되짚어 보건대 평소 과묵하신 성격 탓에 의외라는 분들도 계시는데 정작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읍장이라는 자리는 바람을 많이 타는 자립니다. 지금 여기까지도 그 바람을 타고 왔다고 봐야지요. 가끔은 너무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난처할 때도 있었습니다만 그냥 들어 넘기기 어려운 분들, 그리고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해 왔습니다. 물론 제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고 군민들의 심판을 받아야 하겠지만 요 몇 개월간 저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Q 가족들은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A 제 식구를 포함해 딸과 사위 등 온 가족이 모여 가족회의를 했는데 가족들이 모두 저의 의견을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출마를 권유해 어깨가 더 무겁습니다. 얼마 전 목사님을 찾아가 어쩌면 이것이 저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제 외모가 크게 호감이 가는 외모도 아니고 성격 역시 결단력 있고 추진력 있는 진취적인 성격이 아니지 않습니까? 특별히 잘난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저는 남들이 업신여기는 사람일지라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큰 결정을 많이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일단 결정을 하고 나면 온 힘을 다합니다. 사실 무슨 일이든 잘 한다기 보다는 열심히 노력하는 진실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 선거 모토를 '열정과 진실, 그리고 진천사랑'이라고 정했습니다.

Q 진천군에서는 사무관의 꽃이라고 불리는 진천읍장을 역임하셨고 그동안 문백면장, 의회사무과장, 재무과장 등 진천군의 요직을 두루 거치셨는데 공직자 출신이 의회에 갔을 때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집행부에서 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간파할 수 있어 장점일 수도 있겠지만 반면 너무 많이 알아서 제동을 거는 경우도 많이 생길 겁니다. 사실 사회생활을 하시던 분들이 처음 의회에 가면 1, 2년은 이것저것 공부를 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임기의 반은 그냥 흘러가 버리지요. 그런 면에서는 군정 시스템을 안다는 것 자체가 장점이자 강점이겠지요.

Q 군의원 출마를 선언하셨는데 읍장님이 생각하는 의원의 역할이라면 어떤 걸까요?
A 사실 의원의 역할은 대단한 겁니다. 최종 결정은 전부 의회에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의회에서 모든 예산을 승인하도록 되어 있는 거지요. 군에는 각 부서가 있어서 일 하나하나 면밀히 검토, 분석해 결재를 올립니다만 의회에서는 너무 쉽게 승인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또한 의원사업비로 지역의 조그마한 숙원사업들을 해결하는 일, 집행부에서 보내오는 안건만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행태는 상호간 반목과 적개심만 키울 뿐입니다.
집행부보다 더 큰 스케일, 더 넓은 안목으로 시책� 수립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들어 확정한 후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시행토록 해야 합니다. 주민의견을 수렴하는 방법과 절차도 새로이 개발해 진정한 민의가 의정에 반영되도록 해야 합니다. 정치는 지위나 권력이 아니라 일입니다.

Q 이번 선거에 고위 공직자 출신들이 많이 출마하지 않습니까?
A 공직생활을 40년이나 하고 또 군의원에 출마하느냐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만 제가 의원이 된다면 저는 현직 공무원들보다 출장을 더 많이 다니고, 밤 늦은 시간에 의회 사무실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으면서 지역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열띤 토론을 해보고도 싶습니다. 지역발전을 위해 아직 시도되지 않은 많은 것들을 해보고 싶습니다.

Q 어렸을 때 이야기 좀 해 주시지요.
A 저는 아주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먹을 것이 거의 없어 밀기울 한 되로 사흘을 살던 시절이니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 먹일 젖이 나오지 않아 암죽을 끓여 먹이는데 잘 먹지도 않을 뿐 더러 적은 양을 불을 때서 데울 수도 없고 해서 등잔불에 데워 먹였다고 하시더군요.
중학교에 다닐 때에도 지금처럼 운동화나 있습니까? 검은 고무신에 내복 한 겹, 얇은 교복이 전부였지요. 아침 조회시간에 운동장에 가만히 서 있으려면 얼마나 추웠던지. 손발은 늘 동상으로 벌겋게 부어올라 저녁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콩자루에 손을 묻고 잤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버님은 남의 것을 탐내지 않으셨습니다. 욕심이 없는 분이셨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과 한 방에서 같이 자고 생활했으니 아버지에 대해 특별히 위엄 같은 것은 못 느끼고 자랐지만 아버지의 삶이 진짜 사랑이었고 산교육이 되었던 것 같아요.

Q 사실 그 때는 모두가 어렵던 시절 아니겠습니까? 학교 다니실 때는 어떠셨나요?
A 학교 다닐 때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여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께서는 중학교 보낼 형편이 안 되니 진학을 포기하라고 하셨지요.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고는 시험을 쳐서 합격하고 말씀드렸더니 입학금을 준비해 주시더라구요.
아버지께서는 저희 형제들이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하길 바라셨지만 그 뜻을 따라드리질 못했어요. 고등학교에 갈 때도 취직을 원하셨지만 원서를 내고 합격을 하니 또 등록금을 준비해 주셔서 고등학교 까지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특별활동을 하면 수업료를 면제받을 수 있어서 2년 동안 연초재배 연구생으로 일했습니다. 그래야 동생들도 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니까요.
아버지께서는 어려운 집안 살림에 누구 하나만 공부시킬 수 없으니 3형제 모두 차라리 일찍 다른 일을 시키려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생각을 바꾸셔서 급기야는 논까지 팔아 아들 3형제를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해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장남인 저와 막내는 말단이지만 공무원으로, 둘째는 장교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Q 그러면 고등학교 재학시절에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신 건가요?
A 예, 그렇지요. 졸업과 동시에 발령을 받아 덕산면서기가 되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당부하신 말씀이 “너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 섭섭하게 대하지 마라”였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지금껏 공무원 생활을 해 왔습니다.

Q 대학 진학은 생각해 보지 않으셨나요?
A 감히 생각을 못했지요. 3학년 때 예비고사에도 합격을 하고 공무원시험도 합격을 했지만 선생님께서도 공무원을 권하셨고, 동생들이 있으니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때만 해도 대학을 가면 땅을 다 팔아먹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교대는 고등학교와 수업료가 같더군요. 그만큼 정보가 없었다는 이야기지요.

Q 처음 공직에 입문하셨을 땐 어떠셨나요?
A 초임지가 덕산면인데 그 때가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합니다. 당시는 버스가 지금처럼 많지 않아서 아침에 버스 한 대를 놓치면 한 시간을 지각해야 하던 시절이었거든요. 게다가 요즘처럼 제 시간에 퇴근을 할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었어요. 정부 비축량을 채우기 위해 추곡수매를 하던 시절인데 농민들이 헐값에 쌀을 내놓으려 하지 않으니 양을 채우기 위해 매일 밤, 마을을 돌며 회의를 하곤 했습니다. 다행히 문백에 사는 고모부가 중고 자전거를 한 대 내주셔서 그걸 타고 다녔어요. 그때는 포장도로가 아니었잖아요. 비포장 길을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면 그 뒤를 쫓던 저는 모래가 한 입 가득이었어요.
삼덕리에서 덕산까지 2년인가 다녔는데 그 때 통일벼가 나오고 새마을 사업이 시작돼 지역이 발전되기 시작했어요. 그 시기에 군 입대를 해서 3년을 복무했지요. 초봉이 13,000원이었는데 제대 후 복직하니 33,000원이더군요.

Q 말단 공직자부터 시작하셔서 현재까지, 우리 진천군의 발전 과정을 몸소 체험하신 분인데 공직생활 하시면서 보람 있었던 일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A 공직생활을 하며 보람이라는게 따로 있겠습니까? 공직사회라는 조직이 무슨 일을 하던지 내가 잘해서 자랑스럽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그래도 개인적인 보람이라면 공직생활을 하면서 스스로가 많이 변했단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님을 알고 이웃과 함께 어울리고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이지요.
굳이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주민들과 직접 부대끼며 살았던 시절이라고 해야지요. 문백면장으로 재직할 때에는 문백면민대상을 만들어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문백면발전협의회를 발족시켜 지역의 주요 사항을 협의 결정하도록 했으며, 문백면민 행동강령을 제정해 선진면민의 상을 제시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더 기억에 남는 건 문백면 산악회를 발족시킨 일입니다. 그 때는 동네 분들이 하루종일 면장실을 점령하고 회의실로 쓰실 기세였으니까요.
그리고 진천읍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의 일환으로 진천사랑 운동을 다각적으로 전개하면서 즐겁게 일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 개인적으로 끼니를 잇지 못하는 어려운 주민들을 위해 사랑의 쌀독을 운영한 일과 여름철 어린이 물놀이장을 만들어 준 일이 기억에 남아요.

Q 민원인들이 찾아오면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긍정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덕분에 직원들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농담 삼아 하는 걸 들었는데요.

A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선에서는 가급적 도와 드리려 노력했습니다. 물론 공직에 있는 몸이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어려움에 처해 저를 찾아오시는 분들은 하루 품이라도 팔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당장 식구들 먹을 양식이라도 챙겨드리려 노력합니다.
저는 직원들에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가진 것이 많고 많이 배운 분들은 우리가 굳이 챙겨드리지 않아도 사는데 큰 지장이 없다. 하지만 가진 것도 없고 많이 배우지도 못한 소외된 분들에게는 우리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구요.

Q 처가는 어디신가요? 연애결혼 하셨나요?
A 처갓집은 진천읍 삼덕리 하덕이고 중매결혼 했습니다. 부모님이 연로하시다 보니 결혼을 일찍 했는데 부모님 잘 모시고,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으니 어렵더라도 살림을 잘 꾸려갈 수 있는 사람을 바랬는데 집사람이 그 역할을 잘 해주었습니다. 시집 와서 아버님 돌아가실 때까지 매 끼니 숭늉을 떠다 드리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요.

Q 요즘에야 더 그러시겠지만 평소 업무도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만 특별한 해소법이 있으신가요?
A 저는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매일은 못하지만 새벽기도를 나가 전날 일어난 일을 전부 하나님께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7년 정도 새벽기도를 나갔는데 요즘에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으니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모든 행동거지 하나하나 하느님 말씀 가운데서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는 선거에서의 당락에 대한 부담은 크게 없습니다.

Q 신앙생활은 언제부터 하신건가요?
A 제가 초평에 근무할 때부터니까 78년 쯤 됐겠네요. 햇수로만 보면 30년이 넘었지만 중간에 5, 6년 쉰 기간이 있습니다.

Q 존경하는 인물이 있으시다면요.
A 중앙교회의 이익상 목사님과 유영훈 군수님입니다. 이분들은 언제나 말을 앞세우지 않고 우직하게 일을 추진하시죠. 순간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진솔한 분들입니다.

Q 민감한 질문일 수 있겠습니다만 민주당을 선택하신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A 군의원 출마를 결심하고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을 만나 고견을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민주당이 서민의 정당이라 이야기합니다. 저 역시 민주당이 그동안 지역발전과 서민을 위해 일해 온 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진천군에 민주당을 지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정치는 민심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심에 반하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촌로가 민주당을 거론하는 것을 보고 “민심이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민주당이라면 제가 소신껏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민과 진천군을 위해 열심히 일해 보고 싶었는데 민심을 따라야지요.

Q 혹시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는 상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A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복권에 당첨되면 복지시설 같은 곳에서 후원해 달라고 많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리고 1등에 당첨되면 지역을 떠나야 살 수 있다는 이야기들도 하십니다만 저의 경우는 복권에 당첨되더라도 지역에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오랜 공직경험 끝에 얻은 결론이지만 세상은 저 혼자만 잘 돼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잘 살아야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Q 후배 공직자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지요.
A 갈수록 공무원에 입직하는 직원들의 자질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수한 인재가 많아요. 저희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서 요즘은 9급이나 7급이나 5급이나 똑같이 어렵게 공부해야 합니다. 경쟁률도 만만치 않구요.
우리같이 70년대에 공직에 입문한 사람들은 머리나 이상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하는 거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전문적인 지식도 갖추고 감도 빨라요. 그들에게도 이제 경험이 필요합니다. 될수록 좋은 자리를 그들에게 내줘서 좋은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이요.
공무원이 열심히 일해야 지역이 발전합니다. 지역을 위해서, 나아가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해줄 것을 당부드립니다.

Q 40년 공직생활을 마무리하시면서 주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A 지역 주민들에게 이제껏 저를 믿고 응원해 주셔서 진천읍장이라는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는 세월 동안 군민을 섬기는 공직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과분한 사랑과 성원을 보내주신 군민과 선후배 공무원, 그리고 국가와 진천군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제가 그분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생각하면 후회스러운 부분도 많습니다. 물론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그래도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현장을 누비며 보고 들은 귀한 말씀들이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이제까지 쌓은 경험과 노하우, 지혜를 발판으로 삼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입장과 방향, 더 넓고 새로운 곳에서 진천군의 발전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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