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그 옛날 진천의 모습은
사진으로 보는 그 옛날 진천의 모습은
  • 진천자치신문
  • 승인 2020.09.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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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10년대 신작로 개설

 

조선 말 도로는 매우 열악하여 노선은 구불구불, 노폭은 들쑥날쑥하여 일정하지가 않았다. 노폭은 원래 5m 이상은 유지했으나 한말의 혼란기에 인근 농민들이 노면을 잠식하여 경지로 이용하면서 볼품없는 도로가 되었다(최영준 외, ≪한길역사기행1≫, 1986).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신작로를 개설하였는데   진천에서 신작로가 제일 먼저 개통된 구간은 진천~백곡 도로로 1912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이미 개통된 것으로 나오고, 진천~사석~청주 간은 공사 중으로 나온다. 청주 방면 신작로는 1915년에 개통되고, 진천~만승·덕산은 1916년까지는 개통한 듯하다. 노폭은 6~7m 정도이고 노선은 대체로 조선시대 옛길대로 잡았으나 구불구불한 길은 버리고 곧게 닦은 경우도 많았다. 1918년 현재 진천~초평 구간은 아직도 달구지길로 용화사 앞~괸돌 냇가 쪽다리를 건너 다녔다(왼쪽 사진).
조선시대 진천에서 청주로 가는 옛길은 GS수퍼마켓 동쪽 골목~장산아파트앞 사거리~진천상고 앞~성공회 앞~원동마을~한티고개(진천터널 위)~태락리 역리마을~문백~청주이다(오른쪽 사진). 현재도 진천터널 입구까지 옛길이 대부분 남아 있다. 지적도를 통해 확인한 결과 당시 이 길의 노폭은 대체로 3~5m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은 쇠락하여 사람들에게 역사에서 잊혀진 길이 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당당한 진천의 국도 1호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작로는 이 직선 길을 버리고 잣고개로 우회하면서 사석까지는 천안 방면 신작로와 같이 쓰게 만들었다.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진천읍 원덕리 원동(院洞)마을은 당시 도로가 있을 때 노숙자가 쉬어가는 숙소가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역원제도가 있었는데 역이란 말을 준비해 놓은 곳이고, 원이란 관아 근처나 역, 역과 역 사이에 설치했던 숙박시설로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이다. 청주에서 진천으로 들어오는 입구, 현 세화목욕탕 옆 황소곱창 자리(교성리 30번지)에 시태원(時泰院)이 있었다. 
신 태 선 (진천향토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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