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그 옛날 진천의 모습은
사진으로 보는 그 옛날 진천의 모습은
  • 진천자치신문
  • 승인 2020.10.2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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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 말 진천에서의 토지조사 실시
진천 학당리 토지대장(1901년 작성,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일제가 1910년 조선을 강제합병 후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이보다 10여 년 전 대한제국정부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897년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야심차게 자신의 연호인 광무(光武)를 따서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개혁과제 중 하나로 근대적인 토지제도를 수립하고자 전 국가적인 토지측량 사업이 추진되었다. 이때 작성된 토지대장을 양안(量案)이라고 한다.

진천군에서 토지측량은 1900년 5월21일 시작하여 7월7일에 종료되었고 토지대장도 남아있다. 토지대장에는 필지별로 면적·소유자ㆍ경작자ㆍ가옥ㆍ토지등급ㆍ토지모양ㆍ물레방아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에서 시주는 토지소유자, 시작은 경작자(소작인), 적은 토지면적, 결은 수확량, 等은 토지등급(1~6등으로 구분하며 1등이 제일 비옥·肆은 4등급), 도형은 토지의 모양으로 사면에 인접 토지주 이름을 적었다. 

당시 진천군에서 조사된 토지면적은 47,050필지 7,610정보로 밭 2,839 논 4,549 대지 222 정보(1정보=3000평)이며 토지소유자로 등재된 인원수는 9,451명이다. 가옥은 6,780채로 초가 6,751 기와집 29채이며 물레방아가 70대 있었다.

진천군 토지대장에는 당시 15개 면의 동리지명 1,318개소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그동안 자세히 알지 못했던 조선후기 진천군 15개 면의 관할구역을 정확히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양안에는 지금도 부르고 있는 지명이 많이 등장하는데, 걸미산 앞 들은 乞味坪(걸미평), 원앙마을 들은 鴛鴦坪(원앙평), 사미마을은 沙尾村, 사랑깨 들은 舍廊坪, 광대배기는 廣大白里, 학당이 들은 學堂前坪 등 한자어로 표기되어 나온다. 지금의 지명이 조선후기에도 똑같았다는 것이 반갑기만 하다. 
신 태 선 (진천향토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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