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근 진천라이온스클럽 부회장
박재근 진천라이온스클럽 부회장
  • 이상훈 대표
  • 승인 2010.03.15 11: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Talk! 스물일곱번째 손님-1


자신을 이만큼 키워준 지역에 이제는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겠노라 지역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며 진천군의회 의원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박재근 진천라이온스클럽 부회장은 누구를 만나든 언제나 편안한 이웃 같은 얼굴로 사람을 대한다. 나름대로 정말 어렵게 자리를 마련했다고 생각했는데 취중토크를 하면서도 자신의 실익을 챙기기 보다는 그저 고향 후배를 만나 소주 한 잔 기울이며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분위기다. 사람을 만날 때면, 게다가 준비된 자리가 술자리라면, 술잔이 몇 번 부딪친 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서운하고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기 마련인데 오늘 토크 손님은 어째 처음과 끝이 한결같다. 처음부터 뭔가를 감추거나 꾸미는 성격이 아닌 게다. 어려운 손님을 청해 놓고도 모처럼 사람냄새 물씬 나는 대폿집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화자의 솔직하고 담백한 허물없는 본심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일 게다.

Q 평소 주량은 얼마나 되십니까?
A 전에는 많이 마셨었어요. 그런데 요즘자제하고 조심하다 보니 주량이 많이 줄었어요.

Q 군 의원 출마를 선언하셨는데 사실 주변에서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하시던데요.

A 제가 군의원 출마를 선언하자 가까운 지인들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껏 제가 지역에서 받아온 사랑을 빚이라 생각하고 이제는 그 빚을 갚으며 살고 싶습니다. 처음에 반대하던 가족들이나 친구들, 선·후배들도 이제는 제게 많은 격려와 응원을 보내 주십니다.
지방자치는 말 그대로 우리 7만 군민이 우리의 힘으로 지역살림을 꾸려가는 제도입니다. 군민이 군민의 뜻을 헤아리고 대변해 군정에 반영할 수 있는 대표를 뽑아 자신의 의지를 군정에 반영시키는 거지요. 군민의 대표성을 띤 군 의원은 도덕성과 본인의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민주당 진천읍 당원 협의회장은 몇 년을 하신건가요?
A 2년 정도 했습니다. 대의원도 했었고 민주당과는 전부터 인연이 깊습니다. 민주당은 야당으로 여당의 견제 역할을 충실히 해 왔습니다. 이런 당이야말로 진정 민의를 대변하는 당이라 생각했기에 민주당을 선택하는 것을 망설일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Q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해주시지요.
A 제가 어렸을 때는 저희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서민들이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4형제 중 제가 셋째거든요. 아버님이 열다섯 살 때 6·25 전란을 맞으셨는데 그 직전에 경상도에서 올라오셨다고 들었어요.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조적 일을 하셨는데 아마 당시에 지어진 읍내 집들 중 아버님의 손이 가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일을 많이 하셨답니다. 굉장히 엄한 분이셨는데 저희 4형제 뒷바라지 하시느라 정말 억척스럽게 일하셨어요.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저희 4형제. 누구 할 것 없이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남들이 제 이야기를 들으면 젊은 사람이 무슨 고생을 그리 했느냐 하시겠지만 그 때는 그랬어요. 지금들 이야기 하면 노동이라고 하지만 그 시절엔 그렇게 일하는 것이 생활이었어요.

Q 옛날에는 왜 그렇게 살기가 힘들었는지, 보통 남자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꼴을 베거나 나무를 하러 다니는 게 일이었잖습니까?
A 그럼요. 예전엔 집집마다 나무를 땠기 때문에 마을 가까이에서는 땔감을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백곡저수지가 얼면 리어카를 끌고 저수지를 가로질러 마차골에 가서 나무를 해 오곤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네요. 한 살 위의 외삼촌과 마차골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나무하는 데 정신이 팔려 어느새 해가 넘어간 거예요. 게다가 어린 욕심에 나무를 어찌나 많이 했는지 너무 무겁고 허기가 져서 고갯길을 못 올라가는 거예요. 동네에 내려가 누른 밥이라도 좀 얻어먹을까 했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동네에 먹을 것이 없더라구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마침 근처에 있던 함바집엘 갔어요. 다행히 사장님이 아버님과 친분이 있어서 저녁을 준비해 주시는데 한참 클 나이라고 커다란 들통에 라면 다섯 개를 끓여 주시지 뭡니까? 허겁지겁 그 많은 라면을 먹어치우고 찬밥까지 말아 먹었는데 지금도 눈물이 날 만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마침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형님들까지 저희를 찾아오셨어요. 애들이 나무를 하러 갔는데 날이 어둡도록 집에 돌아오질 않으니 걱정이 돼서 찾아 나선 거지요.
그 때가 고3 때였는데 그 날 했던 나무가 제가 마지막으로 해 온 땔감이었어요. 아버님도 그 나무는 무척 아껴서 쓰셨던 기억이 나요. 정말이지 그 땐 안 해 본 것이 없어요.

Q 아니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하셨어요? 그 나이 때는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텐데.
A 저희 형제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펌프질이요. 집에 꽤 큰 텃밭이 있었는데 매일 아침 밭고랑에 물을 다 대줘야 해요. 그 큰 밭에 물을 다 대려니 쉬운 일이 아니지요. 형제들끼리 교대로 100번씩 펌프질을 하는데 팔이 아파 한 번에 그 이상은 하기 힘들거든요. 그래도 두 살 아래 동생은 어리다고 숫자를 줄여주곤 했었어요. 그 밭에서 상추며 쑥갓, 아욱 같은 채소를 키워 할머니가 그걸 내다 파셨어요.
그리고 바구니 만들 버들가지 꺾으러 다니던 일 하며, 밀가루 포대로 종이봉투를 접는 일도 했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가 끝나면 깡통 하나씩을 차고 들에 나가 개구리를 잡았어요. 그 때는 사료라는 게 없어 개구리를 잡아다 풀과 겨를 섞어서 닭에게 모이로 주곤 했어요. 그리고 틈나는 대로 형들과 개울에서 모래와 자갈 채취도 했고, 돼지에게 줄 구정물을 고3때 까지 날랐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지만 그 시절엔 정말 힘들었어요.

Q 잠깐 이야기를 들어보니 할머님과 부모님이 생활력이 강한 분들이셨군요.
A 예. 자식들을 위해 당신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친 분들이세요. 사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형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대학에 진학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장학금을 받긴 했어도 맘껏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거든요. 형들은 대학에 못 보냈어도 제게는 기회를 주셔서 그 어려운 살림에 대학까지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Q 그럼 대학 졸업 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처음 현대에 입사해 현대알루미늄으로 발령까지 받았었는데 그다지 마음이 가질 않았어요. 그래서 중소기업에 취직해 몇 년 근무하다가 장사를 시작했죠. 중간에 농사도 짓고, 축산업도 하고 식당도 했었어요. 한 우물만 파야 성공한다는데 저는 그러질 못해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런 다양한 경험들이 오히려 제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경험만큼 큰 재산도 없잖아요.

Q 어릴 때 특별히 되고 싶었다거나 선망의 대상이 있었다면요?
A 꿈은 변한다고들 이야기하잖아요. 사실 어렸을 때는 부농이 되고 싶었어요. 땅을 많이 사서 식구들 먹을 양식 풍족하게 쌓아 놓고 사는 것이 꿈이었지요. 집에 논 한마지기 없어 소작을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땅에 대한 미련이 많아요.
그런데 꿈이라는 게 자꾸 변하대요. 고등학교에 갈 무렵에는 나중에 커다란 농장을 경영해 보고픈 생각에 축산과를 갔는데 또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서 대학은 기계과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Q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A 집사람과는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처갓집은 성석리구요. 초등학교 동창과 결혼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웃어요. 너무 어릴 때부터 연애를 시작한 거 아니냐면서요. 하지만 오랜 세월 서로 보아 온 만큼 저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저를 가장 잘 이해해 줄 것 같았습니다.

Q 그럼 연애를 몇 년이나 하신건가요?

A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나 스물여덟 살에 결혼했으니 20년은 사귀었나 본데요. 하하하. 너무 일렀나요? 같은 지역에 살고 동창이다 보니 사실 편한 친구로만 생각했었어요. 결혼을 전제로 사귄 기간은 길지 않습니다.

Q 그럼 언제부터 사모님이 여자로 보이기 시작하던가요?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A 저도 결혼이 늦어져서 할머니 소개로 선을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인연은 멀리 있지 않다는 충고를 해 주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어요. 그 때부터 진지하게 집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 기간이 2년 쯤 되나 봅니다.
집사람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주변에서 장가 잘 갔다고 이야기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집사람이 내조 잘 해주고 아이들을 잘 키워줬어요. 마음은 그런데 고맙다는 말은 하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 암튼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 삼수초등학교 운영위원장은 어떤 계기로 맡게 되신 건가요?
A 무엇보다 저의 모교이기도 하고 저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자연 교육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거지요. 저 어렸을 때는 선생님들이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어렸을 때 육성회비 100원을 못 내 선생님께 혼나고, 매일 어머니를 졸랐던 기억이 나네요. 어려웠던 시절이라 가슴 아픈 일도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빈곤 가정의 아이들에게 특히 마음이 쓰여요.
학교 운영위원들과의 협의해 이 아이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 받지 않도록 해주려 노력 많이 했어요. 다행히 요즘엔 자모들이 섬세하게 많이 챙겨주셔서 아이들의 소외감이 덜합니다. 자모회와도 긴밀한 협조 체계가 이루어져 운영위원회 일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Q 교육에 관심이 많다고 하셨는데 우리 진천군 교육발전을 위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교육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우리 지역에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머지않아 우리 진천군민의 숙원사업이던 우석대도 개교하겠지만 그 이전에 명문고 육성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벌어지는 현상이긴 합니다만 고교 진학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의 유출이 심각한 실정입니다.
진천고등학교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입니다. 올해 서울대는 물론 국공립대에 많은 학생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역사회가 함께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머지않아 타 지역에서 진천고 진학을 위해 인적·물적 자원의 흐름이 역류하는 현상이 나타날 겁니다.
이제 교육문제는 학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역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숙제인 것입니다.

Q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을 너무 과잉보호 한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A 저희들 자랄 때처럼 형제가 많지 않다보니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지나칠 때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식 귀하고 예쁘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내 자식이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잘못을 했을 때 부모인 나한테 혼나고 밖에 나가서 남들에게 교육 잘 받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낫지,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서야 쓰겠습니까?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도 중요하지만 사람 된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Q 봉사단체에서도 활동 많이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A 많이는 못합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사회단체는 진천라이온스클럽, 미래환경연합, 국악협회, 진천군체육회, (사)농다리보존회, 미래환경연합 정도입니다.

Q 미래환경연합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시나요?

A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환경 단체다 보니 하천정화 활동이나 미호종개 살리기 운동, 토종어종 보호운동, 폐석면공장 저지운동 등 가까이에서 할 수 있는 환경보호 운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Q 라이온스클럽 역시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단체 아닙니까?
A 예, 그렇지요. 특히 저희 진천라이온스클럽에는 빨래봉사 차량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독거노인 세대나 사회복지 시설 등지를 찾아 빨래를 해 드리고 있어요. 봉사라는 것이 돈이 많아서 필요한 곳에 기부하는 것도 좋지만 노력봉사 역시 보람 있는 일입니다. 제가 몸 담고 있는 국악협회도 명분만 이사지 사실은 일꾼이나 다름없어요. 워낙 적은 예산으로 움직이는 단체다 보니 의자를 나른다거나, 무대를 설치한다거나 하는 등의 웬만한 잡일은 몸으로 때운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이라면 다 느껴보셨겠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며 흘리는 땀의 가치는 금전적으로 계산할 수가 없어요. 나로 인해 누군가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리고 조금 더 편해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없어요.
솔직히 이야기 하면 일하다 지쳐서 정말 힘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봉사라는 것이 마약 같은 것이어서 조금 쉬어야지 하다가도 몸이 불편해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고 차라리 나가서 일하는게 맘 편해요. 아마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겁니다.

Q 조금 전에 농다리 보존회에서도 활동하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농다리 하면 역사적인 건축물 아니겠습니까? 과연 우리 진천군에 농다리가 주는 의미는 뭘까요?
A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농다리 주변이 엄청 깨끗했어요. 그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기도 했으니까요. 세월이 흐르고 환경의 변화가 생기다 보니 주변 환경도 많이 변했습니다만 농다리는 보존가치가 충분한 지방문화재입니다. 역사적인 유물이지요. 군 차원에서 보존하고 나아가 상품화 시켜 지역경제에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구요.
농다리보존회에서도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만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축제라도 할라치면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답니다. 제 생각은 그래요. 농다리 같은 훌륭한 유물이 우리 진천군에 있다는 건 커다란 축복입니다. 다른 지역은 없는 것도 일부러 만들어 내는 형편입니다.
진천군은 관광자원이 빈약합니다. 농다리 정도면 훌륭한 관광상품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농다리축제 역시 테마를 살리고 보완한다면 함평의 나비축제나 화천의 산천어축제 처럼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침체에 빠져 있는 우리 지역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활력소가 되어줄 것입니다.

Q 존경하는 인물이 있으시다면요?
A 저를 사랑하고 이해해 주는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하지만 그분들 중에서도 저에게 쓴 소리를 해 주는 분들이 가장 존경스럽습니다.

Q 10년 후의 모습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A 지위를 떠나 어떤 위치에 있건 간에 뒤에서 묵묵히 진천군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 하고 있을 겁니다.

Q 마지막으로 진천군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A 저도 진천사람입니다. 우리 진천군은 유난히 보수적 성향이 강한 지역입니다. 지역이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열려 있어야 합니다. 진천 출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편협한 사고는 이제 버려야 합니다. 사회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문을 열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스스로 해 보자는 이야깁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구태의연한 사고를 버리고, 더 멀리, 더 넓게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역할은 그런 지역사회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은 겁니다. 앞으로 우리 진천군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본과 인재를 끌어들일 수 있는 발판을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