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수 (사)한국음식업중앙회 충북지회 진천군지부장
정영수 (사)한국음식업중앙회 충북지회 진천군지부장
  • 이상훈대표기자
  • 승인 2010.04.06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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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 Talk! 스물여덟번째 손님



취중토크를 할 때 가장 어려운 손님 중 하나가 바로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일 게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알고 지낸 세월의 햇수만큼 깊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아무리 오랜 세월을 만난 사이일지라도 그 사람의 진가를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취임하자마자 회원업소들의 현황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하루 20개가 넘는 회원업소를 일일이 방문하는 강행군으로 화제가 됐던 정영수 (사)한국음식업중앙회 충북지회 진천군 지부장을 보며 그 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지역에서 가까운 선·후배 사이로 지내면서도 그의 과감한 행보에 내심 놀랐던 기억이 난다. 처음엔 그저 경기 불황이 장기화 되고 있는 어려운 시기에 음식업지부라는 무거운 짐을 맡아 겪었을 마음고생이나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아 보라고 마련한 취중토크 자리였다. 하지만 이야기 하는 내내 마주한 이의 가슴까지 뛰게 만드는 그의 일에 대한 열정 앞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술병이 제법 쌓여 가는데도 정 지부장이 풀어내는 이야기 한 마디 한 마디에 더운 알코올 기운이 몸 속으로 스며들 사이도 없이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Q 현재 진천군에서 음식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얼마나 됩니까?
A 관내에 회원업소가 800곳 정도 되니까 약 2,400명 정도가 종사한다고 봐야죠.

Q 적지 않은 숫자네요. 지부장님도 음식점을 하고 계시지만 요즘 음식업계도 경기가 좋지 않지요?
A 저도 걱정이 많습니다. 작년에 취임하면서 회원업소들을 두루 돌아봤는데 워낙 경기가 나빠서인지 경영이 힘든 업소가 많습니다. 경기가 회복되어 하루빨리 회원업소들의 경영이 정상화 되어야 할텐데요.

Q 어렸을 때 부터 음식업 쪽에 관심이 있으셨던 건가요?
A 그렇지는 않습니다. 워낙 어려서부터 아버님 일을 돕다 보니 막연하게나마 아버님 뒤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진천군에서 낙농업을 가장 먼저 시작하신 분이 바로 아버님인데 당시 축정계장이던 친구분 소개로 시작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 때가 막 캐나다에서 젖소를 수입해 진천에 보급할 때였다고 해요.
덕분에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침저녁으로 소에게 사료 주는 게 일이었지요. 아침이면 동생들은 곤히 잠들어 있는 이른 시간에 일어나 소를 돌봤습니다. 3남 3녀 중 위로 누님만 두 분이셔서 제가 장남이거든요. 그 땐 당연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또 잘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있었구요.
당시만 해도 농사에 비해 낙농업이 수익이 월등히 높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만 아버님은 늘 앞서가는 분이셨습니다.

Q 어린 시절은 그렇게 보내셨고 그럼 중·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좀 해 주시죠.
A 저는 사회 생활을 남들보다 조금 일찍 시작한 편입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집유소에 우유를 납품하는 일을 했습니다. 원래 다른 분이 하시던 일인데 그 분이 일을 못하시게 돼서 제가 대신 아침마다 사석 일대의 목장을 돌며 우유를 받아다가 집유소에 가져다 주고 등교를 했어요. 15일에 한 번씩 유대가 나오니 다른 업종보다는 비교적 큰 돈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아버님이 용돈을 풍족하게 주신 편이었죠.

Q
그럼 농고에 진학하게 된 계기도 아버님의 뒤를 잇기 위해서였나요?
A 몇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작은 아버님들이 '네가 장남이니 아버지 뒤를 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저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시작한 4H활동은 제게 큰 자신감을 심어 주었구요.

Q
진중 31회 주관기 회장, 진중 총동문회 사무국장을 역임하셨고, 지금도 진중 총동문회 부회장을 맡고 계시네요.

A 잠시 진천을 떠났다가 돌아와 진천에서 장사를 하다 보니 중학교 친구들이 지역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더군요. 친구들이 저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데 내가 뭐라도 도와야겠다는 마음으로 총무를 보게 된 것이 시작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주관기 회장까지 맡게 되고 지금까지 총동문회 일을 보고 있습니다.

Q
동문회 일을 보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요.
A 주관기 회장을 맡았을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동문회 일과 사업을 병행하려니 힘들 수밖에요. 그래도 보람이라면 후배가 선배를 챙기는 바람직한 전통을 만든 것이라고 할까요. 저희가 선배들을 챙기니 자연스레 후배가 저희를 챙기더군요. 지금도 30회와 31회는 체육대회를 따로 할 만큼 관계가 돈독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큰 보람이라면 상조회를 정착시킨 겁니다. 상조회를 통해 자연스레 유대관계가 돈독해 지고 딱히 눈에 보이는 유형의 것은 아니지만 이제 조직이라는 큰 틀이 잡힌 것 같아요.

Q
유독 진천중학교 동문회를 많이 챙기시던데요.
A 보람도 있었지만 일이 너무 힘들어서 사실 주관기가 끝나면 동문회에서 바로 손을 놓자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당시 진중 교장으로 재직 중이시던 박시관 교육장이 진중 총동문회 활성화를 위해 좀 더 수고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셔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리고 동문회 일도 일이지만 무엇보다 재학 중인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재원 마련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저는 중학교가 살아야 고등학교가 살고, 그래야만 지역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더 이상 강조하지 않더라도 그 문제는 우리 진천군민 모두가 충분히 느끼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Q
현재 진중 총동문회 장학재단 설립이 추진중이지 않습니까?
A 총동문회 장학재단 설립은 모든 진중인의 숙원사업입니다. 현재 저희 31회에서 지원하는 장학금이 2,000만원 있는데 그 이자로 재학 중인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고, 지금도 31회 이름으로 적금을 들고 있습니다. 그 31회 장학금이 기폭제가 되어 진중 총동문회 장학재단 설립이 추진중에 있습니다.

Q
지금도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4H 진천군 연합회장을 역임하셨네요?
A 일찍 활동을 시작하다 보니 스물네 살에 4H 진천읍 회장을 하게 되고, 스물다섯 살에 군 연합회장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4H 활동을 하면서 만나게 된 분들이 지금은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그 인맥이 제게는 큰 재산이고, 4H 클럽 활동 경험이 제 인생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죠.

Q
음식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어렸을 때부터 달리 생각해 오던 일이 있으셨을텐데.
A 계속 아버님의 일을 도왔는데 역시 농촌의 현실은 제가 발을 디디기에 녹록치 않았어요. 수차례의 소 값 파동으로 무척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 때 작은 아버님이 청주 도축장에서 부산물을 취급하셨는데 아버님 권유로 그 일을 돕게 되었어요.
그런데 유통업이라는게 약간의 브로커 기질이 있어야 하거든요. 성격상 잘 맞지 않았어요. 도매상 보다 소매상의 마진이 더 높기도 했구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조그만 식당이라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리고 무작정 찾아간 곳이 청주에 있는 「청주왕족발」이었습니다.

Q
그 때가 몇 살 때였지요?
A 스물여섯 살 때였는데 다행히 사장님이 진천분이어서 생각해 주시는 게 남달랐어요. 저 역시 마음이 든든했구요. 거기서 8개월 정도 일을 배우고 진천에 가게를 오픈하게 되었는데 사장님 내외분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Q
사실 자기 가게만의 요리비법은 아무에게나 전수해 주지 않는데 지부장님의 성실함을 눈 여겨 보셨나 봅니다.
A 안그래도 사모님이 제가 가게를 차려 나올 때 딸을 키워 시집보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었어요. 참으로 감사한 분들입니다. 돌이켜 보면 늘 제 주위에는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많이 계셨던 것 같습니다.

Q
다 지부장님 인복 아니겠습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여기서 내조의 여왕으로 이름난 사모님 이야기를 여쭤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사모님은 언제 만나셨나요?
A 함께 4H 활동을 했습니다. 제가 읍 회장을 할 때 집사람도 광혜원에서 활동하고 있었거든요.

Q
프로포즈는 어떻게 하셨나요?
A 달리 프로포즈를 한 기억은 없어요. 그냥 4H 활동 하면서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되고 정이 들었어요. 연애할 당시 저의 어머님이 병석에 계셨는데 그래도 저에게 시집을 와 주었어요. 시집 와서 가게 일 하랴, 편찮으신 시어머니 봉양하랴 맘고생 많이 했어요.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가끔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Q
참진회 회장을 맡고 계시는데 가끔 기사를 통해 접하긴 했습니다만 어떤 단체인지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참진회는 66년생 백말띠들의 모입니다. 애초에 장학사업을 해 보고자 만든 모임인데 3년째 중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에게 교복지원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교복 한 벌에 30만원 이상 하는데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는 큰 돈이거든요. 첫 해에 10명, 그 다음 해에도 10명, 그리고 올해는 15명을 교육청에서 추천을 받아 교복을 지원했습니다.
비록 저희가 시작한 일은 첫 단추를 끼우는 아주 작은 일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많은 단체에서 더 많은 아이들에게 교복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작은 시작들이 조금씩 번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수혜자가 되고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제 조그만 바램입니다.

Q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깁니다. 그 외에도 봉화로타리클럽, 진천군노인회, 카네이션클럽 등 많은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사업하시는 분이 벅차지 않으신가요?
A 그냥 일하는 것이 좋아서라고 밖에 말씀 못 드리겠네요. 아마 4H 시절부터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음으로 인해 내가 더 큰 위안을 받고, 감사함을 알고,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특별히 남들보다 봉사활동을 많이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시간도 많이 없구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리고 혹시나 저를 보고 또 누군가가 그 일을 시작해 준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Q
오는 6·2 지방선거에 모 유력정당에서 공천 제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거절하신 이유가 뭡니까? 사실 유력정당의 공천이면 당선권이나 다름없는데요.
A 예, 물론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다만 애초에 정치적인 꿈이 있었더라면 이 어려운 시기에 음식업지부장이라는 책임을 맡지도 않았을 겁니다. 음식업지부장이라는 타이틀을 정치적 징검다리로 이용할 생각도 없구요. 지금 저의 위치는 (사)한국음식업중앙회 충북지회 진천군지부장입니다. 장기간 지속된 불황으로 회원업소들이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Q
사실 청주왕족발 하면 이젠 인근에서는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성공한 외식업체 아니겠습니까? 처음 시작하셨을 땐 어려움도 많으셨을텐데요.
A 올해로 20년 째 족발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처음 10년은 저희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집사람이나 저나 나이도 어렸고 장사 경험도 없었으니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지요. 기술을 전수받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은 맛을 내기 위해 삶아서 버린 족발만도 꽤 됩니다.
족발이라는 음식 자체가 원래 야식으로 많이 먹는 음식이다 보니 새벽녘 잠결에도 전화를 받고 배달을 해야 했어요. 한 번은 눈보라가 치는 밤에 집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초평면 오갑리까지 배달을 간 적도 있어요. 집사람은 단 한 분의 고객이라도 절대 소홀히 하는 법이 없어요.
10년 쯤 지나니 자리가 잡히더군요. 그 뒤로도 한 달에 두 번 있는 휴일마다 아이들까지 데리고 서울로, 전주로, 경주로, 부산으로 맛있다고 소문난 집을 찾아 다녔어요. 메뉴선정 부터 상차림, 인테리어, 음식 맛, 서비스 까지 장사가 잘 된다는 집은 어디든 찾아다녔습니다. 그게 많은 공부가 되었던 것 같아요. 제 사업에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음식업 지부의 일을 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런 저희의 마음을 알아주시는지 20년 전 부터 저희 족발을 드시던 분들이 이제는 손주들과 함께 찾아주십니다.

Q
음식업지부장으로서 앞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사업이 있으시다면요?
A 현재로선 가장 시급한 일이 우리 회원업소들의 경영 정상화입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기본을 지키고 차근차근 경쟁력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우리지역만의 특색있는 향토음식의 발굴과 개발은 물론 초평 붕어찜 축제 같은 개성 넘치는 음식문화 축제를 만들어 전국적인 관광상품으로 개발해 지역경제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Q
충북에서 진천군지부의 위상은 어느 정도일까요?
A 위상도 위상이지만 무엇보다 우리 진천군지부 회원들의 열의만큼은 전국에서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이런 가슴 뛰는 열정과 굳은 의지가 있는데 무엇인들 못해내겠습니까? 머지않아 우리 진천군 음식업지부의 위상 역시 전국 최고가 될 것입니다.

Q
20년을 음식업계에 몸담아온 선배로서 지금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지요.
A 처음 청주왕족발이라는 음식점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실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줄곧 사회활동을 하던 사람이니 족발을 들고 배달을 다닌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했구요. 그렇게 몇 년이 흘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그만둔다면, 이만한 일도 못해낸다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 분야에서 반드시 성공을 해야겠기에 기왕 시작한 일이니 제대로 한 번 시작해 봐야겠다는 마음에 청주에 있는 요리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수강생 대부분이 여자였고 남자는 고작해야 한 두 명이 전부이던 시절이었어요.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진정한 외식인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니 더 욕심이 생기더군요. 실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로 노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중앙대학교 산업교육원의 외식산업경영자 과정을 이수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배움이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제가 음식업지부장을 맡게 된 발판이 되기도 했구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기계발의 중요성입니다. 자신이 얼마만큼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자기계발에 힘써 실전에 활용하느냐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결정됩니다. 비단 사업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일이든 시작이 어렵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렵게 시작한 일을 쉽게 포기해 버리기엔 그 일을 준비하며 바친 열정과 패기가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일을 일이라 생각지 말고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Q
너무 어려운 시기에 군지부장을 맡으셨는데 마지막으로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다면 해 주시지요.
A 불경기로 인해 회원업소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때일수록 회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는 기본에 충실해 달라는 겁니다. 음식업의 기본은 맛과 청결, 친절, 그리고 가격경쟁력입니다. 물론 입점 위치나 주변 환경 같은 부수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우리가 꾸준히 경쟁력을 키워 나간다면 얼마든지 이 불황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시 한 번 운동화끈 질끈 동여매고 힘을 냅시다.
우리 회원들 스스로가 성심을 다해 노력한다면 고객들도 언젠가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요?

취중토크 소문에 정영수 지부장의 친구들이 응원을 왔다. 평소 사람 좋기로 소문난 그인지라 주변에 사람이 많음은 알던 터이지만 그리 친근한 내색 한번 할 줄 모르는 그에게 친구들이 보내는 애정은 좀 유별나다. 하지만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재주를 숨기고 살아도, 그 사람됨의 크기가 주머니 밖으로 비어져나오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정 지부장을 보며 과연 사람의 눈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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