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용균 진보신당 진천군당원협의회(준) 위원장
원용균 진보신당 진천군당원협의회(준) 위원장
  • 이상훈 대표
  • 승인 2010.06.1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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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 talk 서른번째 손님


원용균 진보신당 진천군당원협의회(주) 위원장의 이력은 좀 특이하다. 대학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10개월 간 수감되었던 전력과 이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선정된 이력이 눈에 들어온다. 젊은 시절부터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았을 그가 이번에는 군수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다. 채 30일도 남지 않은 선거일을 앞두고 여전히 매 순간순간을, 하루하루를 치열한 전투처럼 살아내는 원용균 위원장을 취중토크에 초대했다.

Q 원 후보님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편한 자리니만큼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요즘 많이 바쁘시지요?
A 예. 그렇지요. 늦어도 6시 이전에는 집에서 나와야 하니까요. 다른 후보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침에 나와서 밤늦도록 다녀도 시간이 늘 아쉽지요. 관내 자연부락을 돌아다니는데 꼬박 한 달이 걸리더군요. 많은 분들이 응원해 주셔서 힘이 납니다.

Q 진천에 오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A 1989년 말에 제천에서 왔으니까 2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이사 와서 바로 둘째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가 벌써 스물 한 살이니 21년이 됐나 봅니다.

Q 진천으로 오시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A 진천에 특별한 연고는 없었습니다. 아는 목사님이 진천에 와서 농민상담소를 운영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시기에 무작정 보따리 싸가지고 왔습니다. 당시만 해도 진천지역에 농민회 활동이 열악했거든요.

Q 그럼 제천에 사실 때부터 줄곧 농민운동을 하신건가요?
A 그렇지요. 한 해는 고추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 고추값이 폭락을 했어요. 제천농민회 회원들이 군청으로 몰려가 얼마나 격렬하게 시위를 했는지 제천농민회가 결성된 이후로 그렇게 격렬한 시위는 처음이었습니다. 결국 군수가 나와서 사죄를 하고 농협에서 고추를 수매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 직후에 진천으로 이사를 왔어요.

Q 진천에 정착하는데 어려움은 없으셨습니까?
A 어려움이라. 집사람이 고생 많이 했죠. 처음 이사 오던 날이 생각나네요.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다 낡은 집에 들어서니 마당에 풀은 제 키보다 높게 자라 있고, 부엌엔 그을음이 가득했어요. 마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집 같다고나 할까요? 짐을 실은 트럭도 들어오기 힘들 정도였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집사람을 보니 눈물을 연신 훔쳐내고 있더군요. 곱게 자란 사람이라 저도 미안한 마음이 컸지요. 그 집에서 6개월을 살았습니다.

Q 그럼 그때부터 닭을 키우기 시작하신건가요?
A 아뇨. 그건 한참 후의 일입니다. 신월리 월촌에 정착해서 마을회관에 농민상담소를 열고 오토바이를 타고 털털거리며 안다닌 곳이 없습니다. 그 때는 이월에서 덕산 넘어오는 길이 아직 포장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그렇게 1년을 보냈습니다. 이후에 동네에 담배농사를 크게 짓는 분이 계셔서 거기서 담뱃잎 따는 일을 했어요. 새벽 4시 반이면 담배 밭에 나가 일을 했습니다. 그 전에는 담배농사를 지어 본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담배 밭이 살이 익는 느낌이 날 만큼 뜨거웠던 기억이 나요.

Q 양계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A 우연한 기회였죠. 마을에 오리농장을 하던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오리사육을 그만두게 되면서 저희에게 오리를 키워 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기존에 그 분이 오리를 납품하던 회사와의 사이에 문제가 있어서 저희도 오리를 못 받게 되었습니다. 별 수 없이 하우스를 1년이나 비워놓게 되었지요. 때마침 마을에 병아리 부화장을 하던 분이 계셨는데 그 때 병아리 값이 폭락해 돈이 안 되니 그냥 묶어두는 상황이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이 우리 하우스에 병아리를 풀어 놓으셨어요. 그러면서 저에게 그 병아리들을 키워서 나중에 돈이 되면 주고 안 되면 그냥 두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얼떨결에 병아리를 키우게 되었답니다.

Q 그렇게 시작하셔서 대한양계협회 진천지부장까지 맡게 되신거군요.
A 당시 양계업을 하는 농가가 많지 않았는데 질병이나 백신 등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공유할 수 있는 협회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모임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러데 지금이니까 이야기 하지만 그 때는 주변에서 어르신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대학까지 나온 놈이 뭐 할 짓이 없어서 농사를 짓느냐구요. 게다가 저야 좋은 뜻을 가지고 농민운동을 한다고 하지만 남들이 볼 때는 그냥 한심해 보일 수밖에 없었던 거죠. 미래에 대한 꿈은 있었지만 현실은 하우스에서 사는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렇게 3년을 보내고 주인이 땅을 비워달라 해서 구산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누님들이 대출을 받아서 자금을 지원해 주셔서 땅을 샀는데, 길도 없어 자갈을 깔고 다니던 땅이었지만 그래도 터전이 있으니 농협에서 대출도 되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Q 어려움도 많으셨을텐데요.
A 그럼요. 닭 값이 폭락해서 도계한 닭을 포크레인으로 땅에 파묻기도 하고, 폭설이 내려서 하우스가 내려앉기도 하고, 하우스가 전소된 적도 있어요. 또 한 해는 수해가 나서 병아리들이 물에 동동 떠다니는데 손 쓸 방법은 업고 정말이지 가슴이 찢겨져 나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빚더미에 올라앉았죠. 그래도 그때마다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분들이 참 많았아요. 시설도 원가에 외상으로 지어주시고 보증도 서 주셨어요. 지금이야 보증이라면 다들 고개를 돌리지만 당시만 해도 농민들끼리 맞보증을 서 주는 인심이 있었고, 농협에서도 보증을 서 주면 대출이 쉽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제가 열심히 일 할 수 있었고 빚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주위에 정말 고맙고 좋은 분들이 많아요. 저는 다른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아왔습니다. 때문에 그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건강을 위해 하는 운동 있으신가요?
A 실은 제가 지난 '94년에 심장수술을 받았어요. 그 전에는 운동이란 운동은 다 좋아했고 특히 축구를 좋아했는데 수술을 받고 나니 할 게 없더라구요. 그 때 의사가 권해준 운동이 바로 골프였는데 처음엔 고민도 적지 않았어요. 농민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골프를 치러 다닌다고 하면 뭔가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은 많이 대중적인 운동이 되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골프 하면 무조건 돈도 많이 들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귀족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했거든요. 사실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마침 운동을 시작한 때가 폭설로 계사 2동이 무너진 직후였는데 게다가 1동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전소되는 사고까지 겹쳤었어요.

Q 설상가상이라고 정말이지 불행한 일은 겹쳐서 오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시기에 운동을 시작하셨는데 사모님은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A 워낙 수술 후에 몸이 좋지 않았던 데다 그런 큰 사건들을 겪고 나니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어요. 마음 둘 곳이 없었던 거지요. 집사람이 오히려 저를 격려해 주고 운동을 권했습니다. 막상 운동을 시작하니 스트레스도 풀리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에 정말 어려운 시기에 골프라는 운동이 저 자신을 되찾게끔 도와줬다고 할 수 있지요.

Q 어릴 때부터 농민운동을 생각하진 않으셨을텐데 꿈은 무엇이었나요?
A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제 밑으로 다섯 살 된 동생이 있었는데 홍역을 심하게 앓다 죽었어요. 그 때 처음 죽음이라는 것을 접했는데 저에겐 충격이었지요. 우리가 돈이 있었다면 동생이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자라서 의사가 돼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며 살고 싶었습니다.

Q 그 꿈을 접게 된 계기는요.
A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현실이라는 것이 녹록치가 않았어요. 당장 집안이 어려우니 고등학교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의사의 꿈을 접고 청주기계공고에 입학을 했습니다. 7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정책 일환으로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고 해서 중학교에서 공부 잘 하는 학생들에게 공고진학을 권유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공부에 대한 미련은 있었지만 사정이 그러니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요.

Q 그러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신 건가요?

A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자격증을 땄기 때문에 3학년 1학기에 경남 창원으로 취업을 나갔어요. 거기서 1년 간 노동자 생활을 했는데 그 때 5·18 사건에 대해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죠. 사실 저야 TV에서 보여주는 내용밖에 몰랐으니 그들의 원망과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직접 그들을 겪어보니 이해를 할 수 있겠더군요.

Q 창원에서 1년간 근무했다고 하셨는데 그 이후에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바로 대입을 준비하신 건가요?
A 회사에 다니며 느꼈던 건 우리나라 경제구조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제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일단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 농사를 도우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지게 지고 다니면서 혼자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더군요. 시험보기 3개월 전에 서울로 올라가 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신대에 입학하게 됐는데 햇수로 따지면 3수인 셈이지요.

Q 한신대 하면 전통 있는 신학교 아니었습니까?
A 예. 역사가 70년이나 됩니다. 신학교로 출발을 하다 보니 선배님들은 대부분이 목사님이십니다. 종합대학으로 바뀌긴 했지만 신학의 뿌리가 깊은 학교입니다. 저는 무역학을 전공했는데 지금도 정말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시 강의하시던 교수님들이 국내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학문을 추구하던 분들이셨어요. 그분들에게 경제를 배우면서 현실에 눈을 뜨게 되고 학생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Q 그렇게 시작한 학생운동이 농민운동의 시발점의 되었던 거군요?
A 그렇지요. 정말로 가슴 아픈 건 80년대에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습니까? 물론 성과도 있었지만 그 때 이룬 민주화가 최근엔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맘이 들 때가 많습니다.

Q 왜 굳이 어려운 정치인의 길을 가려 하십니까?
A 물론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저는 진천군에 '보수와 같이 가는 진보' 정치를 실현해 보고 싶습니다. 사실 IMF 이후 빈부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민정부 10년 동안에도 우리 민중들의 삶의 질은 개선된 것이 없습니다. 진정 노동자·농민을 위하는 진보정치가 지역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려야 이들의 삶이 풍요해질 것입니다.

Q 진보정치라는 단어가 아직 우리 군민들에게는 낯선 것도 사실입니다만.
A 진보적 성향을 지닌 자치단체장이 이끄는 지자체가 꽤 있습니다. 나주시, 남해군, 함평군 등이 대표적인데 지역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군·시정을 펼치고 있습니다. 진천도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바로 현실이 됩니다. 저는 그동안 공장에서, 들녘에서, 어르신들에게서 모두가 행복한 진천을 만드는 해법을 들었습니다. 어렵게 구한 해법이 이번 선거에서 현실화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제게 너무 이른 것 아니냐고 물으시지만 저는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Q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십니까?
A 집사람과 남매가 있습니다. 아들아이는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짓고 싶다고 하더니 지금 농수산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사실 교육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부모들이 자녀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버려야 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무조건 자녀들이 더 좋은 대학, 더 나은 직장에 다니길 원하지만 그런 경우는 다분히 제한적입니다. 자녀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그걸 부모가 밀어주는 것이 국가발전을 위한 인재양성의 길입니다. 경쟁적 교육의 결과는 결국 내 동료를 밟고 올라서야지만 출세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주게 됩니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입니다. 협동하고 창의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Q 사모님은 언제 만나셨나요?
A 집사람은 대학 동아리 후배입니다. 기독교 교육학을 전공했는데 농활반에서 만났지요. 대학에 다니며 10개월 동안 제 옥바라지를 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 연애결혼을 하셨군요. 프로포즈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A 출감하고 나서 바로 결혼하자고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집사람에게 “나는 앞으로 농민운동을 할 사람인데 함께 농촌에 가서 농민운동을 하자”고 말했어요. 사실 집사람은 우리나라 농촌의 현실을 잘 몰랐지요. 그저 도시인들이 꿈꾸는 전원생활 정도로 생각을 했던 모양이에요. 그러니 선뜻 승낙을 했지요.

Q 좀 전에 하던 이야깁니다만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투옥되어 10개월을 교도소에서 생활하셨는데 옥중 생활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A 옥중생활이요? 한 마디로 재미있었습니다. 그 해가 1986년이었는데 한 사동에 40명의 정치범이 수용돼 있었어요. 그 중에 문익환 목사와 김민석 씨 등 당시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민주화운동가들이 다 모였던 거지요. 그들과 대화하며 인생에서 그동안 배우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공유하게 되고,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대학 다닐 때 제가 책을 2,000권 가량 읽었는데 그 중 1,000권이 수감생활 중에 읽은 것입니다.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Q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으시다면.
A 집사람과 결혼했을 때죠. 저의 영원한 동반자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그만큼 이해해 주는 반려자를 만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요.

Q 20년이 넘도록 진천에서 사셨는데 진천군이 이런 모습은 변해야 겠다 하고 느끼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A 진천에 와서 느낀 것은 그래도 다른 농촌 지역보다 살기 좋다는 겁니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입니다. 진천군에도 외지나 심지어 외국에서 온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진천군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격려해 주고 끌어안아 진천군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합니다. 진천에 들어와 살면 그들도 다 같은 진천사람입니다. 넓은 포용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Q 만약에 군수가 되신다면 어떤 군수가 되고 싶으신가요?
A 군수가 된다면 당연히 진천군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는 군수가 되어야지요. 저는 진천군민이 직접 참여하는 참여 예산제를 실현하고, 또한 지역 현안에 대해 최대한 군민의 의견을 수렴해 민주적 절차에 의해 얻은 결론을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실천하는 시스템으로 진천을 운영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진천군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젊은 시절 옥중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연속이며 과거와 현재만이 미래를 제시해 줄 수 있다」라는 E. H. 카의 유명한 명제를 고찰하며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을 원용균 위원장. 대폿집에서 소주잔을 부딪치며 그날 신문의 톱 기사 하나를 가지고 밤을 지새워도 지루하지 않을만큼 열정적인 그는, 젊은 날 자신이 꿈꿔왔던 신념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끊임없이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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