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완 재경진천군민회 회장
이강완 재경진천군민회 회장
  • 이상훈 대표
  • 승인 2015.09.25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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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없이 달려온 기업인으로서의 인생, 이제 낳아준 고향 진천을 위해 봉사할 시간”


출생지

이월면 장양리 출생

학 력
1954 이월초등학교 졸업 (33회)
1957 광혜원중학교 졸업 (4회)
1960 청주고등학교 졸업 (33회)
1968 청주대학교 경상대학 졸업
1975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약 력
대원다이캐스트공업(주) 설립 대표이사 (현)
대광다이캐스트공업주식회사 전무이사 역임
재경청주중·고등학교 총동문회 부회장 역임
재경청주대학교 총동문회장 역임
한국알루미늄공업협동조합연합회 감사 (현)
서울특별시알루미늄공업협동조합 이사 (현)
인천서부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 (현)
(사)서예협회 인천지회 감사 (현)
(사)국민예술협회 초대작가
재인천 청주고등학교 동문회 고문 (현)


올해 재경진천군민회의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이강완 신임 회장은 국내 자동차산업과 함께 성장해 온 자동차 산업계의 산증인이다.
70세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아직도 현장에서 경영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그가 이제는 자신을 낳아준 고향을 위해 봉사할 시간이라며 서두를 꺼냈다.

Q 고향엔 자주 내려오시나요?
A 고향에 선산이 있어서 명절 때 성묘를 오거나, 이모님 댁에 인사 드리러 찾아뵐 때 외에는 고향에 올 일이 그리 많질 않네요.

Q 유년시절은 어떠셨나요?
A 해방을 맞고 혼란한 시기에 태어나 6·25를 거치면서 그 시기의 우리나라 국민 누구나가 그랬듯 어렵고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10살에 세대주가 되었지요. 어머님이 포목장사로 저희 형제를 키우셨어요. 어머니가 옷감을 머리에 이고 저녁까지 장사를 하러 다니시다가 집에 돌아올 때 쯤이면 제가 지게를 지고 고개마루까지 마중을 나갔어요. 그때만 해도 화폐보다는 현물거래가 많을 때 아닙니까? 그러면 그 곡식을 받아서 지게에 지고 어머니와 함께 돌아오곤 했어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이 제가 살던 이월면 장양리가 저희 외가가 있던 동네여서 외삼촌이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저희 형제도 늘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무엇보다 어머님께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어요.
겨울이 되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다녔어요. 나무라고 해봐야 열 살 남짓한 어린애의 나뭇짐이 얼마나 되겠어요. 게다가 키가 작으니 지게 다리를 잘라내 중심 잡기가 어려워 자칫 균형을 잃으면 지게와 함께 넘어지고 말아요.
그런데 그렇게 나무를 해 와도 방안에 놓아둔 걸레가 얼어붙을 만큼 춥게 지냈어요. 어린 아들이 2, 30리 길을 걸어 고사리손을 불어가며 해 온 나무를 어머니는 차마 땔 수가 없으셨던 거죠. 그 때 하도 춥게 지내서인지 지금도 늦봄까지 내복을 입어요.

Q 그렇게 어려운 살림에 대학까지 공부를 시키신 걸 보니 어머님의 교육열이 대단하셨네요.
A 저는 지금도 어머니를 가장 존경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들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셨어요. 자식들을 위해 당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인하신 분이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셨어요. 저희도 워낙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워낙 성품이 인자하신 분이라 우리보다 더 힘든 이들에게 베푸는 것을 기꺼워 하셨습니다.

Q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나요?
A 어린 시절을 너무 어렵게 보내서인지 기업을 경영해 보는 것이 꿈이었어요. 자식들만큼은 남들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막연하게나마 사회사업을 해 보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Q 현재 장학사업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A 부끄러운 이야깁니다만 제가 워낙 학교를 어렵게 다녔던 탓에 중학교 후배들을 위해 조그만 일을 하고 있습니다. 농촌지역 학교의 환경이 워낙 열악하더군요. 선생님들도 거의 청주에서 출퇴근을 하시니 미처 아이들을 세세히 보살필 여유가 없고, 형편이 어려운 조손가정도 많은데다, 더 잘 아시겠지만 학생들도 조건만 된다면 진천읍이나 청주로 유학을 가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미력하나마 뒷받침을 해줘서 우수한 아이들이 지역에서 공부하고, 지역에 남아 지역을 위해 일 할 수 있도록 해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Q 현재 운영하고 있는 회사는 어떤 업체인가요?
A 자동차부품을 제조하는 작은 중소기업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취직했던 회사와 동종업종이죠.
직장을 다니다 처음 기계 한 대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현장에서 직원들과 작업도 같이 하고 납품도 직접 다니고. 그렇게 5,6년 하니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더군요. 나름대로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점이 제가 개인 사업을 하는데도 큰 플러스 요인이 돼 주었습니다. 먼저 다니던 회사에서도 도움을 많이 주셨고, 그 때 거래하던 은행이나 동문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Q 어렸을 때부터 경영자가 꿈이셨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어떤 계기로 이 업종을 선택하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A 제가 회계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금융기관 쪽으로 취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방학 때면 서울 막내 이모님 댁에서 신세지며 학원을 다녔는데 이모님과 이모부님이 저를 친자식처럼 아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님 형제들이 우애가 남달랐어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로는 막내 이모님이 제 어머니나 마찬가집니다.
이야기가 잠시 빗나갔는데 당시 이모부님께서 친척분이 경영하는 회사를 추천해 주셨어요. 그 회사가 바로 제가 20년을 근무한 (주)대광다이캐스트공업입니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발전사와 함께 커온 회사지요. 자동차부품 제조 업계에서는 국내 굴지의 업체입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대원다이캐스트공업(주)을 세운지 올해로 23년째가 되었습니다. 이 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이제껏 한 우물만 파 왔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Q 고향 친구들은 자주 만나십니까?

A 1개월에 한 번씩은 만나는 편입니다. 서울에 초·중·고·대학 친구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그리 외롭지는 않습니다.

Q 고향을 떠나신 지 오래 되셨는데 밖에서 보는 진천군의 이미지는 어떤가요?
A 어딜 가나 충청북도 사람이라고 하면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게다가 진천사람들은 양반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좋은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지켜졌으면 합니다.

Q 사모님도 진천 분이신가요?
A 예. 집사람은 문백이 고향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 맞선을 봤는데 어머님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살면서 매번 느끼지만 어머님의 눈이 정확하셨어요.

Q 사모님과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A 예. 물론이지요. 이 이야기를 하자면 어머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 어머님이 올라오셨는데 서울에 오셔서 1년 만에 뇌출혈로 쓰러지셨어요. 몸이 마비되신 상태에서 12년을 누워계시다 돌아가셨는데 좀 더 많은 시간을 어머니와 보내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돼요.
어머님 생각을 해도 눈물이 나지만 집사람 생각을 해도 가슴이 아픕니다. 원래 몸도 허약한 사람이 12년 동안 어머니 병수발을 들었어요. 매일 어머니를 업어서 모시고 다녔어요. 저야 한참 일을 시작할 때라서 새벽에 나오면 밤늦게나 집에 들어가니 집안의 사정이야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변 분들이 집사람 칭찬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강남구청에서 효행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 대신 집사람이 너무 고생 많이 했지요. 그래서인지 며느리들도 시어머니에게 참 잘해요. 손주들도 잘 따르고.

Q 재경진천군민회의 회장이라는 어려운 타이틀을 맡으셨는데 앞으로 군민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건지?
A 어렵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계층이 다양하다 보니 각자의 개성도 뚜렷하고 각 지역별로 분산된 경향이 뚜렷해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초·중·고·대학 동문회 회장직을 두루 거쳤는데 학교조직과는 그 성격이 확연히 달라 사람을 모으고 뜻을 모으기가 쉽지 않네요.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7개 읍·면의 임원들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화합하는 일입니다. 일단 재경진천군민회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활성화시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또한 군민회에서 추진하는 사업에 회원들이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향인 진천군을 위해 앞으로 재경 회원들이 할 일도 많습니다. 군정이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고, 고향의 농·특산물 홍보에 적극 노력할 것입니다.

Q 처음 재경진천군민회 회장직 제의를 받으셨을 땐 어떠셨나요?
A 사실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사업도 안정이 되고 큰 어려움 없이 지내지만 저 역시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지금의 사업체를 일구기까지 명절 이외에는 쉬어 본 적도 없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제 아이들도 잘 자라주어 명문대를 졸업하고 모두 출가를 했고, 저도 마음이 예전만큼 조급하지는 않습니다. 어릴 때 꿈도 이뤘고 부유하지는 않지만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동향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사는 것도 가치 있게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향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군민회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Q 개인적으로 계획이 있으시다면?
A 남은여생을 고향에서 일하며 지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현재 사업장이 비좁아 진천군으로의 이주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관내에 진척중인 산업단지가 분양되면 가급적 고향으로 내려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인력 수급 문제가 걱정입니다.

Q 마지막으로 진천군민들에게 당부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A 방금 말씀드렸지만 중소기업은 인력난이 가장 고민입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사업할 수 있는 인프라를 조성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행정을 맡고 계시는 분들이 우리 기업인들을 뒷받침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 많은 중소기업들이 진천군으로 이주해 올 것이고 진천군의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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