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 진천군의회 부의장
김상봉 진천군의회 부의장
  • 정선옥
  • 승인 2010.07.2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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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Talk 서른네번째


김상봉 진천군의회 부의장을 처음 만난 건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건 성실함, 정직함, 열정 같은 것이었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이 그에게 보여준 관심은 당선과는 무관하게 지나칠 만큼 많은 것이었다. 우선 공무원노조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과, 노조 출신의 강성 이미지와는 너무도 딴판인 이웃집 형님 같은 소탈함을 가졌지만 신념을 위해선 자신을 내던질 줄도 아는 이 화끈한 인물은 연일 사람들의 소주잔에, 주부들의 시장바구니에, 퇴근길 통근버스에 실려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 그가 민주노동당이라는 지역정서의 약점을 깨고 당당히 의회에 입성해 부의장이란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이제껏 내가 알고 있던 김상봉이라는 인물 외에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끌어당기는지 궁금했다.
그의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 때문인지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취중토크 자리에 김상봉 부의장을 초대했다. 그러나 자리가 취지에 걸맞아야 한다며 처음부터 소주 여섯 병을 시켜놓고 시작하는 그의 화통함에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오늘도 만만치 않은 손님을 초대했구나 하는 심정으로 취중토크를 시작했다.



Q 지난 선거운동 기간 자전거를 타고 선거운동을 하시던 일이 화제가 됐었는데요, 평소에도 자전거를 즐겨 타십니까?
A 예. 원래 자전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때도 약속드렸듯이 앞으로도 시내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닐 생각입니다. 자전거가 참 매력이 있어요. 자동차를 타고 다닐 때는 모르던 일들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더 많이 보고 듣고 느끼게 됩니다. 덕분에 선거운동 기간에도 더 많은 유권자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Q 부의장님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제가 처음 부의장님을 뵌 지 15년이 됐습니다. 공직에 계실 때 누구보다 신속했던 민원 처리가 기억에 남습니다.
A 원래 허가 업무 등의 민원처리 기간이 3일입니다. 헌데 저는 오전에 접수하면 늦어도 그 날 오후에는 처리를 했어요. 미리 민원인에게 몇 시쯤 갈테니까 꼼짝말고 계시라고 당부를 해요. 오후에 접수가 됐다면 다음 날 오전에는 처리를 했구요. 저도 나름대로 바쁘게 움직이면서 재미있게 일했지만 민원인들도 빠른 일처리에 고마워했어요. 만날 때 마다 소주라도 한 잔 사고 싶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Q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업주들에게는 허가업무를 가장 까다롭게 생각하니까요. 술 사주시는 분이 많으셨겠어요.
A 사주신다고 말씀하시는 분은 많았는데 한 잔도 못 얻어 마셨어요. 공직이라는 게 굉장히 조심스러운 자리예요. 오히려 정말 소주 한 잔 할 수도 있는 친분 있는 사인데도 그런 공적인 문제가 얽히면 만나기도 부담스러우니까요. 저도 민원인들에게 커피는 많이 마셔서 싫으니 시원한 물 한잔만 달라고 이야기를 해요. 당연히 제가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도 너무들 고마워하시니 오히려 제가 민망할 때가 있습니다.

Q 민원인들에게는 뭔가 신선한 느낌이 들었겠지요. 군민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야 할 서비스지만 그 땐 오히려 그것이 낯설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성실하고 정직한 모습을 보아온 군민들이 이번 회기에 부의장님께 거는 기대 또한 클 텐데요.
A 어깨가 무겁습니다. 진천군의회가 진정한 민의의 전당이 될 수 있도록 제6대 의원들과 함께 노력하겠윱求�. 군민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Q 이번 회기 의회는 이전의 다른 어느 회기보다 기대가 큽니다. 지난 의원간담회 자료를 보니 현직 의원들 나름대로 뭔가 의회 내부의 개혁을 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A장님도 노후 된 의전차량을 임기 내에 교체하지 않기로 했고, 출·퇴근 시에도 관용차량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셨을 뿐만 아니라 저 역시 부의장실의 상석을 없앴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급 기관 및 유관기관에서 주관하는 행사시 기존에 전면배치하던 의원석을 후면 배치토록 하고, 의원사무실에 음료를 비치해 의원들이 직접 내방객을 접대하기로 하는 등 의회가 스스로 낮아지고 군민에게 다가설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것부터 바꿔가고 있습니다. 기존의 잘못된 관행을 답습하지 않고 열린 사고를 가지고 활동하는 의회로 거듭날 것입니다.

Q 그런 작은 노력들이 가시화 되고 의원들의 진심이 조금씩 군민들에게 와 닿아 신뢰가 쌓여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군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의정활동 부탁드립니다. 이야기가 너무 딱딱해졌는데 부의장님 어렸을 때 이야기 좀 해 주시지요. 지금도 얼굴에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남아 있으신데요.
A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키가 작아서 맨 앞자리를 맡아 놓고 앉았어요.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땐 굉장히 얌전하고 착실했어요. 다만 가끔 우스갯소리를 잘 해서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코미디언이 돼 보라고 권하곤 하셨어요.

Q 모범생이었단 말씀이신가요?
A 아뇨. 운동은 좋아해서 좀 했는데 공부는 그리 잘 하는 편이 못됐어요. 그래도 부모님 속을 썩였던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요.

Q 형제는 어떻게 되십니까?
A 2남 2녀 중 장남이었습니다. 위로 누님이 두 분 계셨구요.

Q 어린 시절 특별히 기억나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A 저희 어렸을 때야 지금처럼 놀잇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놀이문화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면 그저 여름이면 냇가에 가서 미역 감고, 겨울이 되면 자치기나 구슬치기, 딱지치기 같은 것이 전부였어요.

Q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나요?
A 큰 꿈은 없었습니다. 집안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뭔가를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었지요. 다만 아이들에게 정말 존경받는 선생님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했지요. 하지만 그만큼 실력이 되지도 못했구요, 그런걸 생각할 만큼 집안에 여유도 없었습니다.

Q 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떠셨나요?
A 예전에는 중학교도 시험을 봐야 했었어요. 그런데 저희 때만 해도 무시험제였거든요. 그래서인지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 기를 못 펴고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지요. 정말 제가 실력이 출중했다면 아버님께서 빚이라도 내서 청주로 유학을 보내셨겠지만 그정도의 실력은 아니어서 고등학교 까지 진천에서 다니게 되었습니다. 동생 생각도 해야 했구요.

Q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얌전한 학생이었다고 하셨는데 고등학교 때는 어떠셨나요?
A 그 때도 그렇게 튀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공부를 썩 잘했던 것도 아니고. 아 참, 그러고 보니 냉막걸리 마시던 기억은 나네요. 요즘이야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면 큰 죄가 되지만 그 때만 해도 그런 단속 자체가 없던 때였어요. 유리병에 막걸리를 담아서 냉장고에 넣었다가 시원하게 해서 팔았는데 더운 여름에 차가운 막걸리 한 모금 마시면 뱃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 있었어요. 당시는 남녀노소 모두가 막걸리를 즐기는 분위기였다고나 할까요? 음주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는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Q 그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신 건가요?
A 아뇨. 작은 개인회사에 취직을 했다가 군대를 가게 됐지요. 제대 후에 공직에 몸담게 되었습니다.

Q 사모님은 언제 만나셨습니까? 지난 선거 때 잠깐 뵈니 대단한 미인이시던데요.
A 하하하하. 사실 처음 만났을 땐 미인이 아니었는데 저랑 살다보니 미인이 됐어요. 사실 마음은 외모보다 훨씬 더 고운 사람입니다. 집사람은 공무원 생활을 할 때 만났어요. 가깝게 지내던 형이 있었는데 저와 통하는 게 참 많은 분이었어요. 그 형님이 동네 아가씨를 소개시켜 준 겁니다.

Q 그럼 중매로 결혼하신 거네요. 만난 지 얼마만에 결혼하셨나요?
A 처음 만나고 나서 10개월 만에 결혼했어요. 무남독녀로 곱게 자란 사람인데 저를 만나 너무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저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사람입니다.

Q 어떻게 보면 공무원노조가 부의장님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처음 공무원노조를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아직까지 공무원노조에 대해 국민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않습니다만.
A 아직까지 국민들은 공무원노조가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단체라고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아첨과 뇌물이 인사를 좌우하고 온갖 비리가 난무하는 공직사회를 개혁해 보고자 뜻을 모은 이들의 단체가 바로 공무원노조입니다. 원리원칙대로 열심히 일하고 또 실력을 인정받고 그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공직사회 안에서 일하면서 너무나도 불합리한 것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공직사회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공무원노조는 단순히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공직자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지만 명절 때 민원인들로부터 선물 받지 말라는 이야기가 그렇게 잘못된 이야깁니까?

Q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심은 언젠가는 통하게 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계셨더라도 그런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A 발단은 직장인협의회였어요. OECD에 가입하기 위해선 공무원과 교사들의 노조가 있어야만 해요. 그래서 교사들에게는 교원노조를 만들도록 하고 공무원들에게는 직장인협의회라는 것을 만들도록 했지요. 제가 진천군 직장인협의회 초대회장이었어요. 직장인협의회는 명분이었지요. 어떠한 힘도 없었습니다. 정부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단체에 불과했어요. 그래서 전국적으로 공무원노조가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더 이상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구요.

Q 충북지역에서는 공무원노조 조직에 거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A 예. 그렇지요. 덕분에 고생도 좀 많이 했어요.

Q 어쨌거나 그 일로 인해 상당한 고초를 겪으셨는데 정확히 해직기간이 얼마나 되나요? 단적인 예로 생활은 어떻게 하셨는지도 궁금하구요.
A 집사람이 직장생활을 해서 생활을 했습니다. 고맙게도 큰 딸이 생각이 깊어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해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많은 도움을 주었구요. 해직기간은 만 6년이었습니다. 그동안 유치장에도 몇 번 가고 구속도 두 번 됐었구요, 수배생활도 했었습니다. 저도 저지만 가족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첫 번째 구속되었을 때는 부모님도 담담해 하셨는데 두 번째는 아버님이 병원에 입원중이어서 집행유예로 나왔습니다. 아마도 아버님이 위독하시니 그 점을 배려해 준 것 같습니다.

Q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작 자신의 부모와 가족에게는 아픔을 준 경우가 많더군요.
A 저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도 아버님 생각을 하면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집행유예로 풀려나 아버님 병간호를 했는데 20일 쯤 지나서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당시 아버님 연세가 79세였는데 저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것 같아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불효자지요. 이후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님 산소에 찾아가곤 합니다. 지난번에 당선증을 받고서도 바로 아버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는데 통곡이 절로 나오더라구요.
선거운동 할 때 아버님 친구분들이 저에게 많은 힘이 되어 주셨어요. 길에서 만나면 아버지 생각해서 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시는데 다른 어떤 말보다도 힘이 됐습니다. 눈물도 많이 흘렸고 더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구요. 그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Q 취중토크에 초대되는 분들은 어느정도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대중적인 관심도도 높은 편이구요. 지금까지 많은 분들은 초대했습니다만 이 자리에 오기까지 평탄한 길만을 걸어오신 분은 안계셨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어려운 고비를 겪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남들과 다른 건 넘어졌을 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바닥을 딛고 일어나 남에게 인정받는 지위에 올랐다는 겁니다. 부의장님 역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옥고도 치르시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정말이지 인간승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A 딸아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우리 아빠는 다른 아빠들처럼 못하냐구요. 아버지학교라도 다니면 안되겠냐구요. 딸아이의 주장은 큰일도 좋지만 가정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긴데 그러질 못했네요.

Q 부의장님은 대의명분이 있으시지만 가족들은 섭섭함이 많겠지요. 오히려 피해자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A 자꾸 일이 눈에 보이니 내 가정을 소홀히 하게 되더라구요. 미안한 마음이 크지요. 하지만 그만큼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Q 가족이 가장 큰 힘이지요. 존경하는 인물이 있으시다면?
A 전에는 몰랐는데 나이를 먹고 세상을 겪다보니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이 가장 존경스럽습니다. 김구 선생 같은 분이요. 대의를 위해 자신은 물론 가족의 고통까지 감내하신 분이지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도 63일 간의 수배생활을 해 봤습니다만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그분의 고통에 비할 수야 있겠습니까?

Q 선거운동 하시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A 많은 분들이 당을 떠나 무소속으로 출마할 것을 권하셨습니다. 그래도 군민들께서 기회를 주셨으니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Q 언제쯤 내가 당선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셨는지요?
A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민노당이라고 거부감을 많이 표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그분들 말씀이 “그래도 김상봉이 공무원 생활도 했고,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 가서 바른말은 할거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군민들이 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의회에 출근하면서부터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대로 일하려면 행사장에 일일이 얼굴을 다 비출 수가 없어요. 의원들은 제 자리에서 할 일 하고, 의장님이 계시니 의회를 대표해 의장님이 참석하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곱 사람이 각기 당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것은 같다고 봅니다.

Q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민노당의 경우 당론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A 분명히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주민을 위한 것이지 당이 정권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Q 마지막으로 군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초심을 잃지 않고 군민과의 약속을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군민 여러분께서 저를 군의원으로 선택해 주실 때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소신껏 일하는 의원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신뢰하고 지지해 주신 군민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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