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진천군 자원봉사센터장
송영옥 진천군 자원봉사센터장
  • 정선옥
  • 승인 2010.08.16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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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 Talk! 서른여섯번째 손님


마더 테레사는 생전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위대한 사랑의 힘으로 작은 일들은 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나눔과 봉사에 거창한 명분이나 큰 재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도 얼마든지 남을 도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작은 마음들이 모이고 모여 위대한 일을 만들어 내는 곳이 있다. 바로 진천군 자원봉사센터. 9,000명이 넘는 가슴 따뜻한 이들이 모인 곳이다. 이 거대 조직을 이끌고 있는 여장부 송영옥 진천군 자원봉사센터장. 이제 막 취임 1개월을 맞는 송영옥 센터장을 초대해 근황과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Q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주량을 여쭤보지 않을 수 없네요.
A 제가 남들 술은 잘 주는데 정작 저는 술은 거의 못해요. 행여 제가 몇 잔을 마셨다고 이야기 한들 그 이야기만큼은 믿어줄 친구도 없답니다. 그래도 따라 주시면 받기는 받아요. 거기서 거절하면 소통이 단절되거든요. 두 세 시간 동안 앉아서 두 세 잔 받는 셈이죠. 술을 못하는 덕에 30년 가까이 친구들 기사 노릇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 닉네임이 송기사랍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집까지 바래다 줘야 제 마음도 편하구요.

Q 오늘 하루 무척 바쁘셨을텐데요.
A 예, 오늘은 바빴지만 정말 행복하고 가슴 벅찬 날이기도 합니다. 아시겠지만 오늘 제2기 햇살나눔봉사회 발대식이 있었습니다. 천주교에서 햇살나눔터를 맡아주신 만큼 행사는 간소하고 경건하게 치러졌지만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다 나더라구요.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또 그 결과물이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것,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싶었어요. 제가 수년 전 파리에서 한 교수님이 타향살이를 부르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린 뒤 이렇게 감동 받은 일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뒤에서 도와주셨구요. 또 이번 기회를 통해 종교단체와 지역봉사단체와의 연계성도 높아질 수 있을 것 같구요.

Q 자원봉사센터에서 하는 일을 한 마디로 요약해 주신다면.
A 자원봉사센터는 지역의 봉사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연계시켜 주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범위가 상당히 광범위하지요. 사실 이 자리에 오니 너무 좋습니다. 어느 자리도 부럽지가 않아요. 제가 어디에 가서 이렇게 능력 있는 직원들과 일해 보겠습니까? 5명의 직원이 90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과 200개나 되는 기업을 관리하다 보니 쉬운 일이 아니지만 너무 열심히 일해 줍니다. 사실 이들의 처우가 좋은 것도 아니거든요. 주말도 없고 퇴근도 늦고 직업이라는 이름만 가지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Q 센터장은 무급 아닙니까?
A 명예직이지요. 하지만 이 나이에 꼭� 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봉사라는 것이 그런 것 같아요. 아무 때나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봉사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Q 지금은 봉사자로서의 삶을 살고 계신데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A 1남 3녀 중 장녀인데 동생들과 나이 차이가 제법 나서 동생들이 저를 어려워했어요. 부모님이 식당을 하셨기 때문에 아무래도 저희들끼리 보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큰 언니인 저를 어른으로 생각했겠지요. 아버님이 저를 많이 혼내셨던 기억이 나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교육철학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어렸을 때는 저만 혼내는 아버님이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한 번은 제가 울면서 “왜 동생들이 잘못했는데도 나만 혼내느냐?”고 아버님께 따진 적이 있는데 아버님 말씀이 “첫째가 반듯하게 커야 동생들이 따라서 반듯하게 큰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서야 그 깊은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중요한 진실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Q 아버님이 상당히 엄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럼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나요?
A 예전에 제가 살던 집 앞에 터미널이 있었어요. 그 시절엔 버스마다 차장이 있어서 허리에 찬 조그만 가방에 돈을 마구 집어넣었잖 아요? 그 땐 그 돈이 다 그 차장의 돈인 줄 알았답니다. 그래서 크면 차장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고 보면 참 환경이 중요한거예요.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듯 해요.

Q 좀 전에 부모님이 식당을 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A 해동옥 딸이라고 하면 어르신들은 지금도 기억하십니다. 덕분에 그 어려운 시절에도 쌀밥을 싸가지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학교에서 유니세프의 지원을 받아 옥수수죽과 옥수수빵을 급식으로 주던 시절이었어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빈 도시락을 가져와서 급식을 탔어요. 그러면 그 친구가 급식으로 받은 옥수수빵과 제 도시락을 바꿔먹곤 했습니다. 그 친구가 공부를 잘 해서 방과 후에 저희 집에 와서 제 숙제를 많이 도와주었어요. 그러면 집에 갈 때 도시락에 짜장면을 싸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Q 인정이 많은 분이셨네요.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시고 중·고등학교 시절은 어떠셨나요?
A 어린 시절은 다른 친구들에 비해 조금 여유롭게 지낸 편이었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 스케이트를 신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버님이 유난히 노름을 좋아하셔서 가산을 많이 탕진하셨어요. 그 때 갱변에 난장이 서곤 했거든요. 씨름대회도 열리고 노름판도 벌어지구요. 돈을 다 잃어 등록금을 못내 고등학교에 못 갈 뻔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학교 갈 운이 있었는지 아버님이 돈을 따오셨더라구요. 그 돈으로 입학금을 낼 수 있었습니다.

Q 고등학교 시절에 대대장을 하셨던 걸로 아는데 워낙 리더십이 뛰어나셨나봅니다.
A 아닙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도 그리 나서는 성격이 못됐었어요. 공부도 뛰어나질 못해 항상 중상위권이었는데 제가 운동신경은 좀 발달해서 중학교 다닐 때 배구를 했는데 운동을 하다보니 성격이 적극적으로 변했어요. 대대장은 당시 여고가 한 반 밖에 없어서 학급 실장이던 제가 자연스럽게 맡게 된 것이구요. 후배들이 선생님 말씀은 안 들어도 제 말은 들었어요.

Q 워낙 리더십도 뛰어나고 강직한 성품 때문 아니었겠습니까?
A 글쎄요. 저는 스스로 제가 가진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열심히는 했어요.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거든요. 그 나이 땐 모두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있잖아요. 학생이 인정받을 게 뭐 있나요? 공부만 잘 하면 되잖아요. 헌데 저는 운동을 하느라 영어와 수학 기초가 부족해서 도저히 공부로는 따라갈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다들 꺼리는 화장실 청소도 도맡아 하고, 높아서 청소하기 힘든 곳도 제가 다 청소를 했어요. 키가 작으니 배구를 할 때 점프도 열심히 했구요. 할 수 있는 건 뭐든 열심히 한 거죠.

Q 승부욕이 강한 분이시네요. 그럼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후에 바로 농촌지도소에 들어가신 건가요?
A 아뇨. 충북대학교 입학시험을 봤는데 떨어져 경찰시험을 준비했어요. 여순경을 처음 뽑던 해였는데 그 때 조금 요령을 부려서 허리를 조금만 폈더라면 합격했을텐데 너무 안타까워요. 경찰서장을 꼭 해보고 싶었는데. 그 이후엔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옛날엔 중학교에 못가는 애들이 많았어요. 지금 자동차학원 자리에 그 아이들을 위한 청운중학교라고 있었어요. 비정규직 학교지요. 거기서 1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수학과 영어만 좀 부족했지 다른 건 다 잘했거든요. 그래서 국어, 사회, 역사, 그리고 체육을 가르쳤습니다.

Q 1년을 넘게 계셨으면 제자들도 많으시겠네요.
A 예, 얼마 전 삼수초등학교 동문체육대회에 갔는데 누가 “선생님” 하고 뛰어와요. 누군지 몰라 당황해 하고 있는데 몇몇이 찾아와서는 그 때 배웠던 학생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너무 감사했어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에 있는 친구들도 꽤 많답니다. 그리고 나서 73년인가 74년인가에 농촌지도소에 영양사로 취직을 했어요. 지도소에 근무할 땐 직장여성들로 이루어진 '장미회'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어요. 장미회는 군청과 교육청 등 모든 공무원을 망라한 여직원들의 모임이었는데 당시 회원이 4, 50명 쯤 됐어요. 직장여성들의 결속을 다지고 지역을 위해 봉사활동을 해 보자는 취지에서 만든 단체입니다. 지금이야 독거노인이나 조손가정, 소년소녀가장 등 상당히 세분화된 명칭이 있지만 그 때는 그저 불우이웃돕기라는 명칭으로 통용되던 시절입니다. 기금 마련을 위해 일일찻집 같은 걸 했어요.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진천에서 축제를 한 번 열어보자 하는 생각으로 장미축제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진천농고 실내체육관을 거의 지었을 무렵인데 준공검사도 받기 전에 우여곡절 끝에 빌릴 수 있었어요. 거기서 회원들끼리 연극 '마의 태자'를 공연했습니다. 그리고 각 학교의 학생들이 직접 출연하기도 했구요. 두 시간이 넘는 공연이었는데 꽤 성공적이었어요. 그 때 마련된 기금은 소년체전 기금으로 기탁했어요. 진천군이 소년체전을 처음 유치했는데 기금이 없어 도에서 모금을 하고 있었거든요.

Q
농촌지도소에서 10년 넘게 근무하셨는데 그만두신 이유가 있나요?
A 지금 이야기 하자면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이었는데 아이를 둘이나 키우면서 직장생활을 하려니 힘이 들었어요. 결국 고심 끝에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지요. 장사를 하면 아이들을 돌보면서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어서요. 그러다 아는 분 소개로 흥국생명 조직주임으로 가게 됐지요. 그 때의 내근경력으로 동양생명 부소장으로 스카웃됐구요. 1년 뒤 바로 소장으로 승진해 10년을 그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그 땐 제법 재미있게 일했어요. 계약 효율이 삼성생명을 이기고 진천군에서 1등을 했거든요. 전국적으로도 7위에 속하는 성적이었구요. 게다가 영업소를 3개소나 확장했습니다.

Q 오늘의 센터장님을 있게 한 인생의 전환점 같은 것이 있으셨나요?
A 10여 년 전에 미용실을 하던 친구가 칸느미용대회에 출전하면서 저를 데리고 간 적이 있어요. 보름 동안 프랑스, 그리스, 모로코 등지를 돌았는데 그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선진 유럽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인들에게도 여행을 많이 권합니다. 아들도 대학생 때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보냈었는데 지금도 그 일을 가장 감사하게 생각한답니다.

Q 진천여중고 총동문회장을 오래 하셨던데 가장 큰 보람이라면?
A 나중에 여중과 여고가 분리화되긴 했지만 어찌어찌 총동문회장을 15년이나 했는데 사실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의 동문회 참여는 미약한 수준입니다. 총동문회 일을 하는 것 역시 봉사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했습니다. 장미회의 모태 역시 동문회 중심이었었구요. 30대 때부터 동문회장을 맡다 보니 그나마 경제적 지원도 많이 하질 못했구요. 하지만 총동문회는 학교의 위상을 세우는 상징적인 역할이 큽니다. 물론 동문회장상이나 기금마련 같은 부수적인 일들이 있지만 핵심은 그거죠.

Q 미선라이온스 초대회장을 지내셨는데 미선라이온스 활동도 좀 소개해 주시죠.
A 당시 진천에 상산·덕산·광혜원 3개 클럽이 있었어요. 라이온스 자체에서도 여성클럽 창립이 숙원사업이었죠. 24명이 시작해 지금도 그 인원 대부분이 핵심 맴버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뿌리가 튼튼하다고 봐야죠. 미선라이온스클럽 이후 진천과 이월 2개 클럽이 탄생을 했습니다. 비록 신생클럽이었지만 남들이 주저하는 합동주회 같은 큰 행사를 많이 치렀어요. 덕분에 클럽의 역량을 인정받는 계기도 됐고 클럽 기금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련된 기금으로 결식아동돕기와 저소득층의 건강보험료 대납 등을 했어요. 지금은 국가나 지자체에서 관리하고 있지만 이를 계기로 전국의 지자체에서 저소득층 보험료납부 사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 바로 안구사업으로 저소득층의 녹내장 수술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Q 좌우명 같은 것이 있으시다면?

A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언제나 즐겁게 살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뜻입니다.

Q 센터장께 잘 어울리는 글이네요. 개인적으로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으시다면 어떤 꿈일까요?
A 개인적으로는 국제라이온스협회 충북지부 총재를 맡아 김명자 총재처럼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에 매진하고 싶습니다.

Q 진천군자원봉사센터장으로 취임하신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어떠신가요?
A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예뻐졌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자원봉사센터의 옷을 입고 있으니 전보다 더 많은 호감을 보여주시구요. 사람이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얼굴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센터에 오면서 예전에 스크랩해둔 자료를 뒤적여 봤어요. 오래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더군요. 잊고 지냈는데 예전에 다리 밑에 거지들이 움막을 짓고 많이 살았었어요. 집에서 밥을 가져다가 다리 위에서 내려주곤 했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 때 한 소년을 데려다가 씻겨서 아버님께 말씀드려 식당에서 심부름을 하도록 했어요. 그러면 제가 도시락을 아이한테 가져다 주곤 했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중학교 때는 '복지새싹회'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했었는데 그 당시 한국일보에 소개되기도 했었어요. 어린 학생들이 좋은 일을 한다구요. 고등학교 다닐 땐 학예회 준비를 위해 멀리까지 볼펜장사를 하러 다니기도 했구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어렸을 때는 참 순수하고 인정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이야 세상의 때가 너무 많이 묻었지만요.

Q 오늘의 자원봉사센터장이란 자리가 괜히 주어진 자리가 아니네요. 본인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줄곧 그 길을 걸어오신 것 아닙니까?
A 저도 이번에 깨달은 거지만 중·고등학교 때 받은 상들이 주로 선행상이더군요. 장학회장상부터 문교부장관상까지, 사실 우등상보다도 저에게는 선행상이 더 값지답니다.

Q
마지막으로 진천군자원봉사센터장으로서 진천군민들에게 한 말씀 하시지요.

A 이 자리에 오게 된 건 정말 행운입니다. 진천군자원봉사센터장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제가 군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남을 돕는 일이 직업인 사람이 흔치는 않으니까요. 이런 좋은 기회가 주어진 것에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일 할 것입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당부드리고 싶은 건 모두가 잘 살고 행복한 진천군을 위해 더 많은 분들이 자원봉사에 적극 참여해 주셨으면 합니다. 남의 불행이 결코 나의 행복이 될 수는 없거든요. 다른 누군가가 불행하면 자신 역시 진심으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봉사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 중 조금만 나누면 됩니다. 내 마음을 조금 더 보태고, 내 시간을 조금 더 쪼개고, 내가 가진 것을 조금만 더 나눌 수 있다면 진천군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낙원이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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