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혜원면 구암리 무수(無愁)마을
광혜원면 구암리 무수(無愁)마을
  • 박종혁
  • 승인 2010.09.0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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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충신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명당터 무수마을

햇볕은 따갑게 내리쬐고 며칠 이어진 비로 높은 습도에 숨이 턱턱 막히는 오후.

말복과 입추, 처서까지 지나 가을의 문턱을 넘었건만 100년만의 더위는 산골마을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쳐 사람을 지치게 한다.

얼마전 우연히 길따라 올라왔다가 발견한 이 마을은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기자의 눈에도 너무나 아늑하고 포근해보여 자연스레 발길이 닿았다.

◆ 전란의 피해를 겪지 않은 천혜의 피난처!

광혜원 무수저수지를 지나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다 보면 양 옆으로 산등성이가 있고, 차한대 지나갈 시멘트 포장길과 개울 밖에 없는 좁은 통로를 지나야 한다. 병목안 이다.

병목처럼 좁은 포장길을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벗 삼아 올라가다 보면 천혜의 보금자리에서 근심 없이 산다는 무수(無 : 없을 무, 愁: 시름 수)마을이 아늑하고 포근한 자태를 드러낸다.

마을을 수호하고 액운을 막아주는 400여 년 된 군 지정 보호수인 느티나무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며 마을 입구에서 방문한 객을 맞이한다.

마을회관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이곳으로 낙향하여 뿌리를 내려 마을을 형성한 해주 오씨 오대남(吳大男) 公의 사적비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오대남公은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대왕의 호종군관(현재의 대통령 경호원)으로 의주에서 시어 하다가 선조 28년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 무수마을로 낙향하여 정착하였다. 이곳에서는 전란과 같은 근심을 겪지 않고 지낼 수 있다하여 '무수'라는 마을이름의 유래가 되었으며, 6·25전쟁당시도 전쟁의 화를 입지 않아 피난처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마을 원로들의 말이다.

◆ 무수마을의 유래
진천군청에서 북쪽으로 약 19.2㎞에 위치한 광혜원면 구암리 무수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鳩項里, 無愁里, 中岩里 일부를 병합하여 鳩項과 中岩의 이름을 따서 鳩岩里라 하였다.

마을의 새마을 사업으로 1973년 창고건립, 소교량 가설, 소하천 정비를 했고 1975년 14동의 지붕을 개량하고 1992년 구암교량 신설 및 1993년 구암 경노당 신축, 1994년 무수 부락 진입로 포장공사를 하였다.

무수는 병무관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80여 호가 살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조선 연산군 때 조정의 선비가 사화를 피하여 이곳에 와서 아무 걱정 없이 지냈다고 하여 무수라 명명한 것으로 설명하나 믿을 수 없다. 무술이라고도 하는 것을 보면, 무수는 무술에서 변형된 어형으로 추정된다. 무술에 대해서는 김유신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나 이 또한 크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전국에 무술이라는 골짜기 또는 마을 이름이 몇 군데 존재하는데 그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가술, 여술 등에 보이는 술과 같은 것으로 보이며, 산의 뜻일 가능성도 있다.(이상 광혜원면 홈페이지 마을유래에서 발췌)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느티나무 옆에 군에서 제작한 화랑벌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에는 구암리의 주요 마을 안내도와 지명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광혜원면 홈페이지와 마을 안내판등에 잘못 기재되어 있는 표현이 많이 있다는 주장이다.
무수(無愁):근심없이 지낼수 있는 곳→무술(武術):화랑들이 무예를 닦던 곳, 병목안:마을의 지세가 병목처럼 마을초입은 좁으나 마을에 들어서면 골(谷)이 깊고 넓다고 하여 생긴 지명→병무관(兵武館):화랑의 연무대와 병기고가 있던 곳, 사장골(射場谷):활을 쏘고 훈련하던 곳→사장골(死葬谷):화랑들의 시신을 묻은 곳, 등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지명의 유래를, 근래에 진천을 화랑의 고장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한자를 바꿔 지명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잘못 알려진 표기와 두 가지 이상의 지명으로 불리 우는 것을 바로 잡고 대대로 내려오는 지명을 제대로 알리고픈 마음이 오대남公의 14대손이며 이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오인석 이장의 바램이다.

◆ 무수마을의 이모저모
예전에는 40여호의 가구가 약 3만여 평의 전·답에서 주로 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살아 왔으나, 도시로 진출하는 가구와 젊은 사람들의 출향으로 현재는 18가구 만이 남아 있지만, 무수마을의 풍족한 인심과 수려한 경관으로 외지 사람들이 집을 짓고 들어오고 있어 늘어나는 추세란다.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동네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는 절 '미래사'와 팬션을 방불케 하는 주택들이 하나 둘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그러나 마을에 몇 채의 빈집이 흉물스럽게 폐가로 변해 마을의 미관을 해치고 있어 조속히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고 있어 아름다운 마을에 미관을 해치고 있다.

무엇보다 마을 주민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라면 주민들의 건강과 원앙 같은 부부애다. 그래서인지 44명의 마을 주민 중 65세 이상인 18명의 노인이 모두 해로하고 있어 무수라는 지명이 괜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늘아래 첫 동네란 말 그대로 산으로 겹겹이 둘러 쌓여있는 마을의 무사(無事) 안녕(安寧)과 복(福)을 빌기 위해 대대로 정월초하루가 되면 제주(祭主)와 당주(堂主)를 뽑아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 산신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제를 올리는 제례당(制禮堂)이 있었지만 60년대 초반 공비들의 은신처가 될 수 있다하여 정부의 강제철거로 제례당이 없어졌지만 빈 터에서나마 제를 지내 마을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제례당을 다시 복원해 무수마을에 전통으로 내려오는 산신제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도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 무수마을 출향인 동향
광혜원면의 제 6대 면장을 역임한 이종록 씨를 비롯하여 현재 대법원판사로 재직하고 있는 남양우판사, 서울에서 의사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시우, 이명우 원장과 같은 출향인들의 고향사랑은 남다르다. 가슴속을 아련하게 만드는 고향의 정이 그리워, 마을회관 건립 시 기금 마련과 매년 고향 주민들을 위해 위안잔치를 열어주며 고향의 향수를 달래고 있다.

◆ 무수마을의 숙원 사업
무수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매우 협소하다. 1994년 포장되어 차 한대가 겨우 다닐 정도로 좁고 군데군데 파손되어 있다. 여름철 행락객들이 병목안 계곡으로 몰려 들때는 하루 세번 다니는 시내버스가 마을까지 오지 못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여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기도 한다. 마을 진입로 2차선 확·포장 공사는 지난 4기 군수 재직시 진입로 개설공사가 진행 되었어야 하는데, 이제 서야 토지보상이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내년에 공사를 시작할 전망이다.


우/리/동/네/유/적/지

해주오공 휘 대남 사적비
(海州 吳公 諱 大男 事蹟碑)

오대남 公은 조선조 중종29년(1534년) 서울 근교에서 태어나 선조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감찰을 거쳐 선조17년 평택현감과 진도군수를 역임하고 선조25년 임진왜란당시 선조대왕의 호종군관으로 의주에서 선조대왕을 모시다가 선조28년(1595년) 61세에 관직을 사직하고 광혜원 구암리 무수에 낙향하였다. 그 후 누차 선조대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아니하고 선조31년(1598년)에 서거하였다. 선조37년 임진왜란 공신 책록시 호종선무원종공신으로 가선대부예조참판, 시경련의금부사, 홍문관제학, 춘추관, 성균관사에 추종되고, 구암리 일대의 토지를 하사 받았다.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을 기념한 전공비인 북관대첩비가 일본으로 약탈되었다가 100년만에 반환되었다. 이 북관대첩비에도 오대남公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시 활약상을 가늠할 수 있었다.

현재 무수마을 뒷편에 500여년된 느티나무 근처에 당시의 움집터와 오대남公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동/네/사/람/들/

오인석  이장
오인석 이장
젊은 사람이 많이 들어와 번성하는 마을이 되었으면

처음 이마을로 들어와 근심 없이 인생을 보내신 조상들이 명명한 '무수'라는 지명을 바로 알리고, 수려한 경관과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우리 마을에서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인심좋고, 산 좋고 물좋은 곳으로 어느 마을 부럽지 않다.
많지 않은 인원이지만 마을 주민들이 합심하여 가족같은 분위기속에서 더 살기좋은 무수마을을 만드는데 노력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대부분이 노인인지라 “젊은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와 마을 대소사에 앞장서 번성하는 마을이 되었으면 한다”며 마을에 대한 강한 애착심을 보였다.




이광우 노인회장
이광우 노인회장
경로당 편의시설 유지할 보조금 실정에 맞게 지급되어야

“노인들을 위한 편의시설들이 유치되면 좋겠지만 경로당에 지급되던 보조금이 줄어 운영이 불가하여 있으나 마나한 실정이다. 선거 때만 선심 쓰는 정치 하지 말고 평상시 이러한 불편을 해소시켜 주었으면 한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주민들의 쉼터를 만들어 주었던 마을 회관 앞 은행나무를 하천 제방공사에 방해가 된다며 제거하여 안타까움을 표시하며 “다른 마을과 같이 그늘을 만들어줄 정자를 건립해 주민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숙자  부녀회장
김숙자 부녀회장
우리마을은 쓰레기장이 아닙니다

여름철 마을 입구 병목안 개천에 행락객들이 많이 몰려들어 쉬는 것은 좋지만 쓰레기를 그대로 버리고 가서 환경오염 및 아름다운 경관을 해치고 있다.
발생된 쓰레기를 각자 되가지고 가고, 쓰레기 수거업체에서는 쓰레기 수거 횟수를 늘려 미관을 해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또한 행락객들의 차량 때문에 하루 3번 들어오는 버스의 진입을 막는 일이 자주 생겨 급한 볼일이 있는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어 빠른 시일내에 2차선 진입로 공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강원  반장
이강원 반장
농로개설과 포장이 하루속히 이뤄지길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없고 노인들만이 농사를 짓고 있는데 포장이 되지 않은 농로로 인해 많은 불편을 겪고 있다.
농로개설과 포장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길 바라며, 마을 뒤편 무수마을의 식수원인 약수터 쪽으로 임도가 개설되어 있어 행락객들이 버리는 쓰레기로 식수원이 오염될 우려가 있어, 쓰레기를 되가져 가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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