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대수 한나라당 중부4군 당협위원장
경대수 한나라당 중부4군 당협위원장
  • 정선옥
  • 승인 2013.09.0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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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Talk!


경대수 한나라당 중부4군 당협위원장. 지난 1979년 사시에 합격해 검사로서의 외길 인생을 걷던 그가 외도를 감행했다. 한 때 바다이야기로 대표되던 사행성게임장과 카지노 단속을 최일선에서 지휘했던 그가 갑자기 사표를 내던진 것이다. 검찰 내·외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검사로 살던 그가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고향인 충북 출신 후배들이 더 이상 설움 받는 일이 없도록 지역발전에 힘을 보태겠노라며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검찰의 꽃이랄 수 있는 검사장이라는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그 용기가 내심 부러웠다. 그리고 경 위원장이 그 같은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아니 용기를 낼 수밖에 없도록 그를 다그친 이유가 무엇인지도 궁금했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한가위만큼이나 풍성한 이야기거리를 기대하며 경대수 한나라당 중부4군 당협위원장을 자리에 초대했다.

Q 원래 어렸을 때 부터 검사가 꿈이셨나요?
A 어릴 때는 스스로 뭔가를 하고 싶다기 보다는 형님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 형님이 제게 검사가 되라고 하셨거든요. 정확히 검사가 하는 일이 뭔지도 잘 몰랐지만 중요한 고비마다 “내가 검사가 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겨냈습니다. 누구와의 약속이든 약속은 지켜져야 하니까요.

Q 형님 영향을 많이 받으셨나봅니다.
A 일곱 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제게는 둘째 형님이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형님은 언제나 제게 “네가 우리 형제들 중 제일 똑똑하니 너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Q 서울대 법대를 나오셨으면 공부를 꽤 잘하셨나봅니다. 어렸을 때 부터 공부를 잘하셨나요?
A 아닙니다. 초등학교 1학년 말에 성적표를 받았는데 우 하나를 제외하고는 나머진 모두 양과 가였어요.

Q 그럼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계기가 있으셨을텐데.
A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는데 형님이 책보를 싸라고 해요. 영문도 모른 채 주섬주섬 챙겨서 나갔더니 형님이 석유 한 병을 가지고 나오면서 제 손을 잡고는 다짜고자 아버님 산소엘 가자고 하셨어요. 버스도 없는 산길이었는데 한참을 가다가 형님이 책보를 풀어 놓더니 석유를 뿌리는 시늉을 하시며 절 보고 “대수야, 너는 공부하지 말고 형이랑 소나 키우고, 농사나 짓고 시골서 살자” 하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래서 “형님, 왜 그러세요?” 하고 물었더니 양, 가 투성이인 제 성적표를 내보이며 “너 이렇게 공부해서 경기고를 가겠느냐?”고 묻더군요. 그럼 내가 어찌해야겠냐고 물었더니 “성적표에 수만 있어야지” 하고 말씀하시는데 거기서 감히 말대꾸를 할 수가 없더라구요. 솔직히 그땐 경기고가 뭔지도 몰랐고, 형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도 잘 몰랐어요. 전기도 안들어 오는 시골에서 제가 경기고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아마 알았더라면 언감생심 경기고는 꿈도 못 꾸었을 겁니다.

Q 뜻밖이네요. 어렸을 때 부터 공부를 잘하셨을 것 같은데요.
A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죠. 그래도 비록 초등학교 1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충격을 받은 건 확실했어요. “아버님처럼 따르는 형님이 저렇게 심각하게 말씀하시는데 내가 더 잘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Q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셨고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까지 패스하셨는데.
A 대학에 입학해서 연애 빼고는 남들 할 건 다 해봤던 것 같아요. 데모도 많이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입학해서 처음 읽은 책이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어요. 가�� 몰라도 아마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말은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역사를 통해 현실을 보게 된 거죠.
1979년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임관 전에 군대를 가고 싶어서 형수님께 고기를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도 납니다. 제발 살 좀 찌게 해달라구요. 그 때 체중이 48㎏ 밖에 안나갔거든요. 너무 먹어서 설사병이 나기도 했었어요. 그렇다고 애국심이라던가 정의라던가 하는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군대를 다녀 와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81년도에 군대를 갔어요.

Q 그럼 '깡대수'라는 별명은 언제 얻게 되신 겁니까?
A 깡대수라는 별명은 초임 때 얻은 겁니다.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 때, 그 땐 제가 공안검사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옛날 이야기지만 당시만 해도 선배검사를 통한 청탁이 흔하던 시절입니다. 청탁이 들어오면 선배들이 급수별로 분류를 하라고 시키는데 그 서류들을 몽땅 한 급수로 분류를 해 놓으면 선배들이 무슨 배짱이냐며 난리가 나죠.
그 때 차석 검사님이 “너는 경대수가 아니라 깡대수”라고 하셨는데 그게 별명이 됐습니다. 어느 사회든, 어느 조직이든 원칙이 있어야 하고 공정해야 합니다.

Q 검사 시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다면.
A 초임 검사 시절이었는데 학교 선배님 소개로 어느 회사 중역이 절 찾아오셨어요. 노사분규 건이었는데 찾아오신다고 해도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아무튼 신속히 처리가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없는 사이에 도자기를 선물로 놓고 가셨더라구요. 그냥 정중하게 돌려드렸어야 하는데 그 땐 초임이라 결벽증 같은 것이 있었어요. 인수증과 각서까지 받았으니 연세 드신 분이 불쾌하셨을 겁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선배님이 연락도 안하십니다. 검사는 청렴결백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나 봅니다.

Q 검사장 시절 그 유명한 바다이야기 수사를 총괄 지휘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좀 해 주시지요.
A 당시는 10억을 투자하면 100억을 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만큼 사행성 게임장이 유행할 때였습니다. 주택가에도 버젓이 바다이야기나 황금성 같은 사행성 게임장이 들어설 때였으니까요. 그 피해가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 대다수 선량한 국민들이 그 피해를 감당해야 합니다.
정말 사심없이 수사에 임했고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번지던 사행성게임장을 중단시킨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검사로서의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Q 검사장 출신이면 전관예우로 변호사만 하셔도 편한 생활을 하실 수 있으셨을텐데 굳이 정치권에 들어오신 이유가 뭡니까?
A 우리 충북이 대선 때만 되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권을 돌이켜 보면 분명 충북 출신들이 소외받고 있습니다. 저희 검찰만 보더라도 충북 출신 검사들은 많지만 검사장이 저를 포함해 3명 밖에 안되니 중앙정부의 고위공직자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저는 그 이유가 결코 충북 출신 인사들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역세가 약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충북 출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어서였습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지역발전이 더딘 내 고향 중부4군을, 더 나아가 충청북도의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은 두 가지 이유였습니다.

Q 지난 선거에서 낙선하셔서 충격이 크셨을 텐데요.
A 아는 신부님이 로마에 다녀오시면서 성수 한 병과 편지를 주셨어요. 편지에 하느님께서 바로 가지 말고 돌아가란 뜻을 전한 것이니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써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고장 진천지역을 다니면서 농민, 근로자, 상인 등 여러 사람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르신들을 만나 악수를 하다 보면 열 분 중에 한 분은 손가락에 장애가 있어요. 이것이 우리 농촌이 처한 현실입니다. 그들과 직접 악수하지 않고서는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내용이지요. 정책을 떠나 농민들의 어려움이 피부에 와 닿습니다.
저와 집사람 모두 지금의 시기를 '내 인생을 살찌우는 계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Q 국회의원 출마하실 때 사모님께서 반대는 하지 않으셨습니까?
A 물론 반대 많이 했지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당시 중학생이었던 막내아들 때문이었습니다. 한참 부모의 관심과 손길이 필요한 나이인데 어떻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겠느냐며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국회의원 출마 선언을 하고도 15일 동안 내려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집사람에게 “내가 태어나고 나를 키워준 고향을 떠나 이제껏 밖에 나가 수십년을 생활했는데, 이제는 고향에 돌아가 고향을 위해 일해보고 싶다”고 이야기 하면서 “여보, 변호사는 직업이고 국회의원은 봉사야”라고 했더니 아내가 15일 만에 내려왔어요. 지금은 제 아내가 오히려 저보다 더 열심히 지역을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집사람을 보고 저를 지지해 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Q 그럼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A 집사람은 제가 사시에 합격해서 법무연수원에 다닐 때 5촌 당숙모 소개로 만났습니다. 장모님이 당숙모와 함께 꽃꽂이를 배우셨는데 조카 자랑을 하셨나봐요. 장모님이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적극 추진하셨답니다.
그래서 선을 보게 됐는데 사실 그때까지도 제가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딱 이사람이다 싶은 느낌이 들어 두 번째 만났을 때 청혼했습니다. 저를 잘 이해해 줄 것 같았거든요.

Q 지금 끼고 계신 건 묵주 반지가 아닙니까?
A 맞습니다. 7년 전 인연이 닿아 카톨릭 신자가 됐어요. 성당에서 혼인 갱신식을 하고 교환한 묵주 반지입니다. 저도 그렇고 아내 역시 꼭 끼고 다닙니다. 물론 종교적인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처럼 설레는 마음도 있고, 부부 사이에 신뢰도 더 생기는 것 같아요. 저는 다시 태어나도 집사람과 결혼할 겁니다. 가끔 반지를 보면서 “인연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Q 처음 고향에 내려오셨을 때의 감회는 어떠시던가요?
A 막상 내 고향이라고 내려와 친구 소개로 어느 목장을 찾아갔는데 주인이 제게 하는 말이 “정치에 뜻이 있었으면 진작 내려와서 행사장에 찾아가 얼굴도 비추고 했어야지 제 누릴 것 다 누리다가 이제야 나타났느냐”며 모자를 눌러쓰고 휑하니 가버리더군요. 그때는 너무 충격적이었고 저의 진정성을 몰라주는 그분이 너무 섭섭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 자신에 대한 반성의 시간도 많이 가졌구요. 지금은 그 분이 친한 친구가 돼서 저의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고 있습니다.

Q 아까부터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던데요.
A 제가 좋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대학 시절 외갓집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때 외할머니께서 제법 큰 개 한 마리를 키우셨거든요. 그런데 이 녀석이 저만 보면 짖어대는겁니다.
한 날은 느즈막히 막걸리를 마시고 집엘 왔어요. 그런데 이 녀석이 또 난리를 치지 뭡니까? 사실 저는 그 개를 싫어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녀석에게 다가가서는 머리를 두 팔로 꼬옥 감싸 안았어요. 저의 마음이 닿기를 바라면서요. 한참 발버둥치던 개가 갑자기 잠잠해 지더니 그 이후로는 저만 보면 반가와 하며 꼬리를 치더군요.
그 때 “아, 말 못하는 짐승도 내가 이렇게 진정성을 보여주면 그에 대한 답을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내 진정성을 몰라 주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상대에게 저의 진실한 마음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또한 그 사람의 진정성을 보려 노력합니다.

Q 물론 그런 위원장님의 진정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A 저는 법과 정의를 실천해 온 사람입니다. 일국의 검사가 원리원칙을 벗어나서야 쓰겠습니까?

Q 일각에서는 위원장께서 깨끗하고 도덕적인 것도 좋지만 현실정치와는 너무 거리감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하던데 정작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예전에는 국회의원라면 지역구의 발전을 위해 국책사업을 많이 따 오고, 예산을 많이 확보하면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논두렁밭두렁을 돌며 어르신들을 만나 막걸리 한 대접씩 마시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것이 과연 민심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무릇 민심을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겠죠.

Q 말씀이 많은 분이 아니어서 그런지 너무 유해 보인다는 이야기들을 가끔 하시던데요.
A 저도 검찰에서는 깡검사 소리를 듣던 사람입니다. 어떤 외압에도 원리원칙에 어긋남 없이 제 소신껏 법을 집행해 왔습니다. 여의도에 가서는 어깨 펴고 큰소리 칠지언정 지역에서는 군민들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얼마 전 절친한 홍준표 의원을 만났는데 절 보고 더 왜소해진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방송을 통해 보여지는 홍 의원 역시 체구가 작은 편인데도 카리스마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Q 공천신청을 한나라당에 하셨는데 그당시 세종시다, 쌀값문제다 해서 한나라당이 인기가 없지 않았습니까? 굳이 한나라당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A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충청북도가 전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국회의원이 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지역발전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집권여당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을 택했던 거지요.

Q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십니까?
A 밤 늦은 시간에 다규멘터리 프로나 종교채널을 시청하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그래도 안되면 지금은 폐교됐지만 모교인 장풍초등학교를 찾아갑니다. 만감이 교차하죠. 거기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어 옵니다.

Q 지난달에 있었던 한나라당 충북도당위원장 경선에 불참을 선언하셨는데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A 지난 지방선거에 한나라당이 전국적으로 참패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한나라당이 국민들에게 다가서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당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그래서 도당위원장 경선부터 축제로 치러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도당위원장 경선이 이런 저의 뜻과 상관없이 일부 언론에 당파 싸움으로 왜곡돼 비치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미련없이 경선에 불참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도당 운영에는 적극 참여해 쇄신과 개혁을 통한 진정한 화합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Q 마지막으로 진천군민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A 진천군이 빠른 속도로 발전을 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여러가지 여건을 종합해 보았을 때 우리 진천군은 앞으로 충분히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의 땅입니다. 당면한 현안사업들이 조속히 진행되어 진천군이 전국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없는 강군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부족한 점이 많지만 앞으로 우리 진천군의 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뛰겠습니다.

「 Pacta sunt servanda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
경대수 위원장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는 말이다. 감기몸살이 심해 전날 잠을 설치고도 오늘 취중토크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침 일찍 친구 병원을 찾아 주사를 맞고 약을 먹었다는 경 위원장은 피곤함이 얼굴에 역력한데도 긴 시간 동안 진행되는 인터뷰에 너무도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그런 경 위원장을 보고 있노라니 사람의 마음은 큰 재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진정성으로도 움직일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 자기 책상 한 번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경대수 위원장.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아무리 지금 처한 상황이 어렵다 하더라도 절대 기죽지 말 것, 포기하지 말 것, 용기를 가질 것, 가슴을 펴고 자신의 꿈을 향해 당당히 전진할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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