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지만 열심히…진천을 위한 바쁜 걸음을 걸었던”
“소박하지만 열심히…진천을 위한 바쁜 걸음을 걸었던”
  • 오선영 기자
  • 승인 2008.12.05 13: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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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진천군의회 의장 이동우

한달 2500KM, 진천 구석구석의 현안을 놓치지 않았던 바쁜 발걸음

진천군 문백면. 일흔을 넘기신 어르신이 지키고 있는 약방이 있다. 작은 마을의 작은 약방인 '재생약방'의 주인. 그러나 그냥 평범한 동네 어르신이 아니다. 10여년 전까지 진천군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3대 진천군의회 의장을 역임했던 이동우 전군의회의장이다.

진천군 문백면 장월리에서 태어나 진천중학교 1회 졸업생인 그는 진천의 토박이다. 그의 고향인 문백에서 오랜 세월 약업사로서 지역의 버팀목이 되어오던 그는 91년에 주위의 추천으로 군의원에 입문했다. 그로부터 4년, 3년, 4년 간 3선을 통해 재임하면서 95,96년 진천군의회 3대 의장을 거쳐 진천군과 관할 면이었던 문백면의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활동했었다.

그가 재임당시 이루었던 문백면소재지를 기준삼아 인근부락 상수도 사업을 통한 식수해결을 이루어 내고,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땅이라 정리되지 못한 경지를 정리하여 농지를 시원하게 터서 일반경작이나 하우스경작 등을 대규모화 하는데 성공한 것도 잊지 못할 사업이라 한다. 한편 재임 당시 문백, 초평, 백곡 취락구조 사업 수립을 통해 농지전용의 토지를 주거시설이 들어올 수 있게 전용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퇴임후 현재까지 추진된 상황이 없어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취락구조 사업을 통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역인 '문백'의 주거환경 개선 효과 기대하며 부락자체의 성장이 늦춰지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군정질의를 통해 농다리 관광사업을 추진하며 문백·진천의 경계 원동 IC설치 등을 회상하며 어르신의 얼굴에 잠시나마 과거의 열정이 되살아 나는 듯 했다.
재임당시 아침 7~8시에 문백면장과 만나 추진상황을 체크하며 당시 면의 대표성을 띈 군의원 성격상 관할면 각 부락을 이틀에 한번꼴 방문하여 한달에2500Km씩 운행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내는데 당시 얼마나 이전군의장이 열심히 일했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토록 열심히 움직일 수 있었던 힘은 군의원, 군의장으로서의 보람이며, 가면 환영해주는 주민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부락민과 이장을 만나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하고자 부락의 문제 해결을 위해 하루에도 여러 번 군수와의 면담을 하고 배우는 자세로 일하였다는 그의 말에서 지역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느껴졌다.

일반인으로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을 처리하고 해결을 도울 수 있다는 군의원으로서의 보람을 느끼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지만 재정적 한계로 주민의 가려운 곳을 다 긁어주지 못해 못내 안타까움도 남는 다고 한다. 혐오시설인 납골당이 들어온다고 할 때에 주민들 원성이 자자하였지만 행정기관에서 합법적 절차로 이미 승인이 나 주민들에게 막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한 소리도 들었다고 회상하며, 당시 군의원에 대한 인식이 이야기하면 다 들어주는 만능인것처럼 생각했었다고 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군의원 재직 당시 이장으로 있었던 박종복이장은 “이 전의원님은 문백 구석구석을 다니며 정말 지역 현안을 해결하고자 열심히 활동했다”고 하며 “현재는 관할 군의원이 없어 김동우 전군의장님이 있었을 때가 그립다”고, “기관과 군민을 중재해주는 역할 잘 했다.”고 말했다.

부인 이영희(73)씨는 적십자 봉사단 활동을 통해 목욕, 청소, 김장, 반찬나누기 봉사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그런 아내를 차로 봉사지에 데려다 주기도하고 옆에서 지원한 이전군의장. 아내의 봉사활동에 대한 불만 보다는 오히려 같이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는 그는 경찰서 청소년 선도위원 등의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직접 봉사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아들 2명, 딸 2명 4남매에 손주 8명의 다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는 이전군의장은 가족에게 “화목하고 아끼고 서로 도와주는 사람들이 되어라”고 전하고 아내에게도 “고생많이 해 너무 미안하고, 뒷바라지, 봉사 등을 통해 힘이 되어줘 고맙다”고 전했다.

군의원 재임 당시 열심히 일한 만큼 스트레스도 많았던지 그때 병을 얻어 현재도 아산병원으로 통원중이어서 약방을 닫고 싶어도 무약촌이라 소화제 하나 사먹을 데가 없는 현실에 편히 쉬지도 못하는 그는 남한테 해코지 안하고 서운케 안하고 산 것이 자랑이라면 자랑이라고 소박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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