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위해 일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고향을 위해 일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 정선옥
  • 승인 2012.10.0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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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기 섭 前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33년 4개월.
송기섭 前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이 지난 9월 4일 이임식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기까지 그가 공직자로서 국가 발전이라는 일관된 목표를 향해 쉴 새 없이 달려왔던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의 길이다.
지난 1979년 건설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균형 잡힌 국토 건설을 위한 사회기반시설 확충,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을 위한 혁신도시 건설, 수질 개선과 수자원 확보를 위한 4대강 정비사업, 또한 가장 가까이 新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에 이르기까지 국토의 그림을 바꾸는 거대한 역사(役事)의 중심엔 늘 송기섭 청장이 있었다.

진천군 이월면이 고향인 송 청장은 고향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서울로 유학해 1979년 기술고시(14회)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서울지방국토관리청 도로시설국장과 대전지방국토관리청장, 국토해양부 공공기관지방이전추진단 부단장,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등 국토해양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자타가 공인하는 국토계획 및 도로 분야의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가다. 또한 보수적이고 경직된 공직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개방적이고 융통성 있는 CEO형 마인드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차관이라는 고위 관료였음에도 송 청장은 뒷짐 지고 업무 지시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먼지 풀풀 날리는 현장에서 눈으로 진행상황을 확인하고 실무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또, 그 자리에서 업무지시를 하기로 유명하다. 현장 책임자가 자칫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지만 공사 현장에서 큰 걸림돌이 되는 민원 해결과 사업계획 변경 등으로 인한 설계 변경 시 처리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실무자들과 좀 더 나은 방식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한다. 자연 그를 보는 실무자들이 분발할 수밖에 없지만 이는 부담이 아닌 자신의 발전으로 이어지기에 송 청장의 방문을 저어하는 이는 없다.

빠른 판단과 강한 추진력으로 현장에서는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그이지만 사실 송 청장은 청 내 직원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도 늘 '큰형님' 같은 존재였다. 지난달 있었던 이임식에서 식장이 눈물바다가 된 데에는 엄하지만 때론 큰형님같이 자상하고 따뜻한 그의 섬세한 마음 씀씀이와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는 진심을 누구나 알 수 있었기에 연출된 장면이다.

그는 이임사를 통해 "그동안 우리가 추구해 온 일차원적인 국가발전을 넘어 균형 잡힌 국토를 만드는 선도 기관인 행복청에서 공직생활을 마감하게 된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무엇보다 대전청과 공공기관지방이전추진단, 행복청 등지에서 근무하며 고향인 충청도를 위해 일 할 수 있어 행복했다”고 덧붙였다.

언제나 그가 좀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도록, 그리고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채찍질 해 준 것은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자부심과 고향과 고향사람에 대한 애정이었다.



3년 전, 추석 무렵 송 청장을 처음 만난 곳은 한 천막 농성장이었다.

국도 34호선 신설공사 구간 중 진천-증평 제2공구 도로공사 현장사무소에서 체불된 임금을 지급해 달라는 노동자들의 농성이 수일 째 이어지고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갈 무렵 어두운 농성장에 성큼 들어선 이는 당시 발주청이던 대전지방국토관리청의 송기섭 청장이었다.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퍽퍽한 살림에 절절한 사연들을 이어가는 동안 철야농성을 이어가던 이들의 눈시울도, 이를 보는 송 청장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그 역시 명절을 앞두고 어깨가 무거운 가장들과 똑같은 마음을 가진 아버지였다. 송 청장 역시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기에 남의 일이라고만 여길 수는 없었다.

그의 부친은 그가 8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상복을 입고 이리 저리 뛰어다니던 기억이 잊혀 지지 않을 만큼 철없던 나이였다. 진천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차비가 없어 왕복 50리 길을 매일 걸어 다녔다. 큰형님(송은섭 前 도의원)의 배려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늘 그를 따라다녔고 한 때 세상을 삐딱하게만 보고 삶 자체를 부정하던 시기도 있었다.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의 책을 끼고 살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었기에 그 힘든 시기를 이겨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그래도 안 되면 더 노력해서 한 단계 한 단계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

지금은 너무도 낙천적이 되었다는 그는 힘든 순간이 닥쳐올 때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성현의 말씀을 떠올린다. 물론 그날 할 일을 그날 끝내지 않으면 밥도 잘 넘어가지 않는다는 그이지만 이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결과에 수긍할 줄 아는 넉넉함도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에 대한 욕심은 차치하더라도 지식에 대한 그의 갈망은 공직에 있으면서도 영국 노팅햄 대학에 유학을 결심할 만큼 큰 것이었다. 노팅햄에서 석사학위를 받고도 올 초엔 아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 역시 그가 하는 일과 무관치 않은 환경계획과 교통공학이다.

타인이 보기엔 이미 이룰 만큼 이루고 가질 만큼 가진 그가 주경야독(晝耕夜讀) 하는 만학도를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일을 하면 할수록,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알아야 할 것이 더 많아진다고 한다. 자신이 가진 경험과 지식이 쌓일수록 자신이 봉사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란다.

물론 학문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가 탁상만을 곁에 두는 이가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공직자로서 그의 마지막 작품인 세종시는 도시 곳곳에 세계 최고,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사업들이 그득하다.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이라 할 수 있는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사업을 맡아 송 청장은 세종시를 세계적인 명품도시로 만들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세계적인 호텔, 백화점, 기업 등의 투자유치를 위해 피곤한 해외출장을 자처하며 발품을 팔았다. 청장이라는 고위 관료로서가 아니라 세종시라는 상품을 파는 세일즈맨으로서 말이다. 일에 대한 열정과 간절한 진심, 그리고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감히 시도되지도 않았을 일이다.

평생을 몸담았던 공직에서 은퇴 했지만 그의 열정마저 식은 것은 아니다.

The journey is the reward(여정은 보상이다.).

스티브잡스(Steve Jobs)가 생전에 했던 말이다. 여정은 목적지로 가는 과정이지만 자부심과 열정을 가진 자에게는 그 자체가 보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송 청장은 일선에서 그가 그랬든 국가 발전에 일조한다는 거대한 목표를 가지고 일하는 후배들에게 이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어 했다.

33년 4개월. 길다면 길다 할 수도, 짧다면 짧다 할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매 순간 그가 얼마나 열정적이었고 또한 자신의 일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공직생활을 접는 이 순간, 자신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람도 있었고 아쉬움도 남는 세월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일했고, 또한 열심히 살았기에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시간이 아깝지 않은 송 청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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