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기 기독교 한국 침례회 구름교회목사
김형기 기독교 한국 침례회 구름교회목사
  • 정선옥
  • 승인 2012.11.12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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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하고 친구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


김형기 목사(기독교 한국 침례회 구름교회)를 처음 만난 건 지난여름 진천읍사무소 앞 광장에 마련된 야외무대 위에서였다. 음악인들과 섞여 행복한 얼굴로 대중가요를 연주하는 그의 직업이 목사일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광혜원에서 8년째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그가 교회 밖에서 대중 앞에 선 까닭은 무엇일까?

광혜원 로타리 인근에 위치한 구름교회는 소박하고 아담해 교회라기보다는 편안한 가정집을 연상케 했다. 예고 없는 손을 반갑게 맞아주는 김형기 목사의 호탕한 웃음소리 역시 교회는 엄숙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교회는 어렵고 불편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처럼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성도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올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던 김 목사는 지난 2005년부터 매년 교회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고 있다. 자신이 가진 작은 인맥, 부끄럽지만 작은 재주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늘 감사하다는 김 목사다. 그래서인지 구름교회 음악회는 멀리서 일부러 찾아와 주는 뮤지션에게도, 이들의 음악을 함께 하는 지역 주민들에게도 감동적인 무대가 된다.

지금이야 매주 월요일이면 생거진천 종합사회복지관에서 고운소리봉사단원들과 어르신들에게 악기를 지도하고 덕산과 광혜원의 초등학교 특수학급 아이들에게 음악수업을 하는 그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지만 8년 전 고향이 평창인 그가 광혜원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에게 진천은 너무도 낯선 곳이었다.

고향에서 목회활동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진천으로 이끄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던 그에게 텅 빈 교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때만 해도 교회가 지하에 위치했던 터라 선뜻 교회를 찾는 이들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거리공연이었다.

가수와 개그맨이 꿈이었던 그인지라 다룰 줄 아는 악기도 몇 가지 있고,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저어하지 않는 그였으니 자연 터득한 방법일 것이다. 다룰 줄 아는 악기란 악기는 죄다 가지고 나가 다리 위에 늘어놓고 공연을 시작했다. 차츰 지역 주민들도 관심을 가져 주었다. 진천군자원봉사센터와도 그 때 인연이 되었다.

아직 진천에 오카리나가 생경하던 시절. 길을 가다 우연히 김 목사의 연주를 들은 자원봉사센터 직원이 오카리나 강의를 제의했고, 마침 충청북도 자원봉사자대회에서 연주할 기회가 생긴 덕에 지금의 고운소리봉사단과 만날 수 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오카리나로 시작한 악기 수업은 팬플룻, 기타, 휘슬, 하모니카 등으로 늘어났고, 그에게 수업을 듣는 이들도 고운소리봉사팀 외에 공무원들로 구성된 천상의소리팀, 그리고 별도의 어르신들로 구성된 봉사팀으로 늘어났다. 이 팀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지역의 사회복지시설을 찾아 아름다운 선율로 입소자들을 위로한다.

관내 초등학교 특수학급 아이들을 위한 음악수업도 그의 몫이다. 처음 만승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서 아이들을 지도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지역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왜 안 되겠느냐?”며 기꺼이 수락했다. 목사로서, 또 봉사자로서 지역에 씨앗을 뿌려 놓으면 내가 아니더라도 다음에 누가 오더라도 그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4년 간 무보수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금은 교과부에서 얼마간의 강사료가 지불돼 어려운 교회 살림에 보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김 목사도 교회 밖 활동에 대해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연 이런 상황이 우리 교회 실정과 맞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과 만날 기회를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것 같다”는 것이 그가 얻은 답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어른들을 가르치면서,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만나는 다양한 형태의 삶은 설교의 주제가 되고 감동을 낳고 공감을 이끌어낸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김 목사에게도 어려운 시기가 없지는 않았다. 새벽에 기도를 핑계 삼아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고 있을 때 뒤에서 한 성도가 기도 중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은 아무리 길어도 한 달 안에 끝날 문젠데 울고 있는 저 성도의 아픔을 생각해 봤냐?”는 말씀이었다.

그 순간 김 목사는 “인내하라”는 말씀을 떠올렸다. 상황이 계속해서 나빠지고 깊은 수렁에 빠져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을 갖고 버티는 것이 진정 믿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김 목사는 지금도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쓴다. 그날 하루 살면서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적는다. 소소한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기쁨이 너무나 많았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하고 친구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김 목사는 말한다. 또한 거리에서 노래하고 연주할 때 사람들이 자신을 목사로 봐 주지는 않겠지만 음악을 통해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고 더불어 자신도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사역이라 생각한다.

목회를 시작한 이후 언젠가 고등학교 은사를 찾아 뵀더니 “연예인이 돼서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와 찾을 줄 알았더니 목사가 되어 찾아왔다”며 웃으시더라며 더 크게 웃는 김 목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져야 할 만큼만 갖게 해 주시며 단련을 시키시는 것 같단다.

김형기 목사는 부인 이원미 여사와의 사이에 두 딸 보듬이와 포근이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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