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역쓰레기장으로 부터 초평의 산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광역쓰레기장으로 부터 초평의 산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 오선영 기자
  • 승인 2008.12.20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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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의회 제2대 윤찬근 의원


전쟁을 피해 안빈낙도(安貧樂道 :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김.)의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낙향한 선비. 윤찬근(71) 전 군의원을 접한 첫 느낌이었다. 95년에서 98년까지 2대 군의원으로 활동한 윤 전의원은 당시 초평면 군의원으로서 환경문제에 중점을 두고 진천·음성 광역쓰레기장 유치반대를 위해 힘썼던 초대 진천·음성 광역쓰레기 매립장 대책 위원장이기도 하다.

초대 광역쓰레기 매립장 대책위원장 이야기가 나오자, 윤 전의원은 10여년전의 빛바랜 기억들을 끄집어 낸다. “당시 엄청나게 유치반대시위를 했지. 주민의 의견 반영이 어려워 그 방법밖에 없었어”라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윤전의원. 지금의 하상 게이트볼장에서 1,500여명이 모여 반대집회를 했던 것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한다. 초평에서 진천읍으로 시위에 참석할 주민 이동을 위해 대절한 관광버스가 군의 압력으로 전날 계약이 파기되고 증평에서 관광버스를 급조하여 이동했던 일을 이야기한다. 하상주차장 궐기대회 후 진천군청으로 가두행진을 하며 35도의 무더위에 전경이랑 대치하다 군청에 진입하고 유리현관문이 깨지고, 대책위 대표 4명과 함께 이선기 관선군수랑 대담을 나눴던 일을 어제일 마냥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위를 해도 뜻이 관철되지 않자 광역쓰레기매립장 공사현장 아래에서 텐트를 치고 부락별 교대로 1달 넘게 천막농성을 했던일까지 그의 이야기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청정지역 초평에 쓰레기장이 들어서서는 안된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더불어 고지대이고 지표가 화강암이라 침출수가 세면 식수 오염까지 벌어질 것을 염려한 지역주민들의 반대였다. 그 선봉에 섰던 윤전의원은 귀농 후 초평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집회와 천막농성 등으로 뛰어다니다 보니 논은 벼와 피가 반반이 되고 농가 지원금으로 마련한 염소 50마리가 모두 도망간 형편이었다. 그렇게 반대를 해오던 소각장은 그가 군의원 재임당시 선진지 견학으로 다녀온 파리 오수처리장과 런던 생활스레기 소각장과는 괴리되는 곳이었다. 초평면민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처음에 침출수가 새는 문제가 발생해 재시공 들어가기도 하였다. 재시공에선 침출수를 막기위해 차수막을 2~3중으로 깔고 펌프로 끌어올려 정화조로 이동하고 자체 정화가 아니라 하수종말 처리장까지 하수관연결하기위한 15Km이상 관을 묻어 연결한 것도 모두 투쟁의 결과였다.

“모든 것을 진실하게 대하고 거짓없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가 군의원 활동은 물론 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지키고 싶었던 것은 고향 산천의 자연이었다. 초평 금곡리 수문 출신인 윤전의원은 내 고향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당시 최선을 다하였다. 자연을 중시하는 인생철학도 그의 활동에 힘을 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은 초평 하천이 쓰레기매립장 유치후 오염으로 고기수가 감소, 올갱이도 없어지는 등 자연훼손이 안타깝다고 표현한다.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낄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공부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초평초 25회 졸업하고 청주사범학교병설중학교로 진학후 졸업하고, 청주고를 졸업 하는 등 학창시절 공부도 우수한 모범생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할 당시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군대 제대 후 61년 제2회 국가 행정직에 합격한 후 도청 및 병무청 근무하며 20여년 공직생활을 이어왔다. 그렇게 천직으로 여겼던 공직생활은 딸을 잃는 아픈 사연으로 그만두고 이후 귀농해서 농사꾼의 길을 걸었다. 땅은 심는데로 나고 거짓도 없어 그의 인품에는 들어맞았지만 이론과 실제가 틀리고 농사경험부족으로 많은 어려움도 겪었다. 지금은 한사람의 농사꾼으로서 농자재값 인상 등으로 농사가 더 어려워 졌다며 '農者天下之大本'의 뜻을 새기며 농업경쟁력이 있어야 식량경쟁력을 키워 미래에 힘을 비축할 수 있다고 그의 생각을 밝혔다.

그렇게 못 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63세 때 방송통신대 행적학과 입학, 67세에 행적학사로 졸업하며 전국최고령자상 및 성적우수상 수상하며 대학을 졸업했다. 일반대학보다 졸업이 더 어렵다는 방통대에서 학사학위를 따기위해 15시간씩 공부 했다는 말에 기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아내의 공을 빼 놓을 수 없다. 아내 홍석화(67)씨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고생많이 시켜서 미안하다”며 “표현은 못했지만 많이 사랑하고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다. 홍성화씨는 초평적십자봉사단 회장을 역임하고, 진천군적십자봉사단 부회장 역임하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도 펼치며 슬하의 4형제를 훌륭하게 키웠다.

공직생활, 군의원, 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험을 하면서 그가 느낀 것은 “모든 것을 진실하게 대하고 거짓없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는 그에게 이번 초평장학재단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그는 교육의 변방에 있는 농촌의 지리적 위치, 경제력부족으로 소외된 지역의 교육현안을 지적하며 초평장학재단이 단순한 장학금 지급보다 초평의 교육여건을 개선하여 떠나지않고 찾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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