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읍 벽암리 수암마을
진천읍 벽암리 수암마을
  • 안창규
  • 승인 2015.03.02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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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머물 만한 ‘생거진천’의 본향
포석 조명희의 출생지로 널리 알려져
도심화 가속 … 진천읍 중심으로 변모

▲ 봉화산에서 조망한 수암마을 전경. 지난 1990년 이후 도심화가 진행되면서 고층아파트 등이 군데군데 건설됐다.
▲ 봉화산에서 조망한 수암마을 전경. 지난 1990년 이후 도심화가 진행되면서 고층아파트 등이 군데군데 건설됐다.


진천이란 이름은 약 600년 전 조선 태종 때부터 불리어오는 지명이다. 고구려(금물노군), 통일신라(흑양군), 고려시대(진주)를 거쳐, 조선 태종13년(1413년)에 '진천현'이 됐다. 연산군 때 잠시 경기도에 속하기도 했지만 중종 때 다시 충청도에 속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천읍 벽암리 수암마을은 1990년 이후 도심화가 진행돼 이제는 마을 어디에도 시골분위기는 없다. 편안히 주차를 할 만한 공간을 찾기도 어렵다. 봉화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면 청주에서 광혜원을 거쳐 용인방향으로 내달리는 17번 국도 뒤로 멀리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칠현산-덕성산에서 흘러오는 한남금북정맥의 산줄기가 아련하다.

그 산줄기 앞으로 백곡호가 자리하고 있다. 그 너머에는 태령산-만뢰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충남 천안방향으로 흘러간다. 넓디넓은 벽암리-장관리 일대의 들녘이 시야에 들어온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풍요로운 들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벽암리 마을이다. 진천이 '살아서 머물 만한 고을'이라는 뜻으로 '생거진천'이라 불린 이유가 바로 이곳에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싶다.

진천군청과 진천읍사무소가 소재한 읍내리와 경계를 하고 있는 벽암리 수암마을은 지난 2013년까지만 해도 마을 이름의 유래를 담고 있는 수암(秀岩·빼어난 모습의 큰 바위)이 마을 입구에 있었다. 마을에서 제사도 지내던 상징이었는데 안타깝게 사유지 개발로 인해 지난해 사라졌다.

▲ 수암마을 입구의 포석문학공원은 조명희의 작품 활동과 조국 독립운동에 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 수암마을 입구의 포석문학공원은 조명희의 작품 활동과 조국 독립운동에 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됐다.
진천이 낳은 문학가 조명희

깨어 없어진 그 수암 바로 건너편이 진천이 낳은 문학가 포석 조명희(1894~1938)와 시인 벽암 조중흡(1908~1985)이 출생한 생가 터다. 시인 조벽암으로 널리 알려진 조중흡은 조명희 선생의 조카다. 두 작가는 한국 근대문학에서 확실하게 자신들의 족적을 남겼다. 지난 1994년 포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동양일보사와 충북문인협회가 '생가터 표지석'을 세웠다.

당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살고 있는 조명희 선생의 장남 조선인 씨와 장녀 조선아 씨를 초청해 자리를 함께 했다고 한다. 살아생전 조명희 선생은 아들과 딸을 부를 때면 늘 성과 이름을 함께 큰 소리로 부르며 조국을 생각했다고 한다. 이 표시석을 뒤로 하고 큰 길로 조금 나가면 포석문학공원이 조성돼 있다.

마을입구 귀퉁이 땅을 이용해 건립한 공원이어서인지 다소 옹색해 보인다.

조명희 선생은 민족주의 연극운동가로, 희곡작가로, 시인으로, 소설가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혹독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 더는 버틸 수 없어 1928년 러시아로 망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와 하바로프스크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재소 한인 문학 건설에 힘썼다. 1937년 소련은 스탈린의 명령으로 연해주의 한인 동포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무렵 소련은 사회 지도자급 한인 2000여 명을 체포해 처형했는데, 조명희 역시 친일파이자 반혁명분자라는 죄목으로 1937년 9월 체포됐다. 이듬해 5월 11일 조명희는 공개재판도 없이 비밀리에 총살돼 44세에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이후 조국에서도 이념의 희생양이 돼 작가로써 예우조차 받지 못했던 그를 생각하면 온갖 상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포석문학공원에 있는 그의 시 “경이”를 읊다보면 편안하게 보이던 진천읍내의 모습이 돌연 희뿌옇게 변하는 것 같다.

마을 주변 이곳저곳 둘러보아도 이 시의 주제가 되었던 밤나무는 찾아 볼 수 없다. 이 시에는 밤나무만 담은 것이 아니었다. 그 곳에는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조명희 선생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밤나무를 소재로 한 편의 시 짓기를 원했을 것이다. 유년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염원과 우주 비밀이 이 시 속에는 담겨 있다.

조명희 선생의 조카인 조벽암 시인도 예사로운 분이 아니었다. 조명희 선생 형님의 아들인 조벽암 시인은 월북하지 않았다면 큰 문인이 되었을 분이다. 조벽암은 동네 이름을 빌려 자신의 호를 만든 분이니 고향사랑의 정도를 익히 짐작하여 볼 수 있다. 경성 제2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 진천읍 벽암리 수암마을회관과 한 음식점 사이에 수령 200년이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힘겹게 버티고 서 있다.
▲ 진천읍 벽암리 수암마을회관과 한 음식점 사이에 수령 200년이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힘겹게 버티고 서 있다.
이제는 진천읍의 중심지

포석문학공원을 뒤로하고 수암마을회관으로 발길을 돌리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마을 복판 음식점 귀퉁이에 힘겹게 버티고 서 있다. 수령이 200년이 되었으니 조명희 선생이 고향 진천을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까지 수십 년을 지켜보았으리라. 이 늙은 느티나무 아래 벽암리 수암마을 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회관은 언제부터인가 허름하게 방치돼 있었으나, 지난 2011년 덕산면 용몽리에 혁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이곳으로 이주한 이규철 노인회장이 많은 노력을 해 재정비 했다고 한다. 이제는 하루 2~30여명의 어르신들이 모여 하루를 보내는 깔끔한 동네 사랑방으로 탈바꿈했다.

65세 이상 어르신이 가입할 수 있는 수암노인회는 77세부터 100세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 할아버지 6명에 할머니 회원은 20여 명이다. 이중에 박안호(86) 할아버지는 86년 째 거주하시는 토박이로, 조상대대로 200년 간 5대째 이 마을에 살고 있다.

급격한 도심화가 진행된 수암마을이지만 그래도 중앙시장 주변 보다는 덜 복잡하다. 많은 군민이 이용하는 진천시외버스터미널도 지난 1995년 수암마을에 자리 잡았다. 진천성모병원과 군립도서관은 행정구역상 읍내리에 속한다. 전체 가구 수는 289호다. 60명 회원으로 구성된 “숫말 사랑계”가 조직돼 있다. 마을회관 지척에 청소년수련관이 최근에 문을 열었고, 조명희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조명희문학관이 내년 3월 개관을 목표로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우 / 리 / 동 / 네 / 사 / 람 / 들


이 규 철 노인회장
이 규 철 노인회장
방치됐던 마을회관…모범경로당 만들어

이규철(80) 노인회장은 지난 2009년 수암마을로 이사오기 전에는 충북혁신도시 건설로 없어진 덕산면 두촌리에서 5대째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그는 덕산 용몽리 농요가 지난 2000년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2003년 3월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는 데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

지난 2011년 이후 수암마을 노인회장을 맡아 방치됐던 마을회관을 재정비해 현재 매일 2~30명의 어르신들이 보람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모범경로당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재학  이장
이재학 이장
“도시마을 치고는 주민들 화합 잘된다”

지난해까지 9년간 진천군 재향군인회장을 역임한 이재학(63) 씨는 4년 째 수암마을 이장을 맡고 있다. 중국 연변에서 열린 '조명희문학제'에 두 차례 다녀왔다.

이 이장은 “벽암리 일대가 도심화되면서 수암마을이 번잡하고 소란스러워졌지만 무척 살기 편해진 것이 사실”이라며 “도시마을치고는 주민들의 단합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자랑”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네 중심도로가 차도와 인도 구분이 없어 보행인들의 안전이 항상 걱정된다”며 “도로 정비가 조속히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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