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 마인드로 치열한 삶 일구는 유쾌한 그녀
긍정 마인드로 치열한 삶 일구는 유쾌한 그녀
  • 임현숙
  • 승인 2015.08.28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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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한 경 초대 한국원자력여성 진천지회장

“50대 봉사자로 살기 위해 지회장 승낙”
'마음 나누면 남도 형제 된다'굳게 믿어

▲ 성한경 한국원자력여성 진천군지회장이 지난 19일 열린 2015 진천군지회 정기 원자력 교육 행사장 입구에 세워진 화환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 성한경 한국원자력여성 진천군지회장이 지난 19일 열린 2015 진천군지회 정기 원자력 교육 행사장 입구에 세워진 화환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작은고추가 맵다던가. 성한경(50) 초대 (사)한국원자력여성 진천지회장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그녀는 지난 3월 곽용희 한국원자력여성 충청북도회지부장으로부터 지회장 제의를 받고 덜컥 진천군지회장이 됐다고 한다. 혈혈단신 각 읍면을 뛰어다니며 단체를 소개하고 27명의 회원을 모집한 그녀는 내친김에 지난 19일에는 진천군에서 원자력 교육까지 진행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1년에 한두 번 중앙에서 직접 진행하는 교육이라 언제 가능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진천군 교육에 100여 명이 넘게 참가하면서 본부에서 그녀에게 거는 기대가 적지 않다는 것이 주위의 평이다. “치열하게 살았고 단 한 번도 내가 잘 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성 지회장의 유쾌한 삶을 들여다보았다.

자력으로 회원 모집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대단하다. 어디하나 빠지는 것 없이 단단해 보이는 그녀는 “어디서든 나를 원하면 봉사하겠다는 각오가 돼있을 즈음에 제의를 받아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뛰어다녔다”며 “최근 많은 사람들의 호응이 감사하고 얼떨떨하다”고 했다.

그녀는 “원자력에 문외한으로 시작했지만 교육을 통해 원자력을 올바로 이해하고 군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임무”라고 강조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등으로 원자력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이만한 에너지가 없고 대체할 만한 에너지도 없다”고 설명한 그녀는 “올바른 원자력 알리기와 함께 이를 통한 지역봉사, 장학금 지급 등 이웃사랑 실천도 병행 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원자력여성이 발족한지 5개월 남짓 현재 진천지회 회원은 총 27명이다. 여성만 가입이 가능하지만 정영수 충북도의원, 김종필 전 충북도의원 등 5명의 남성들이 특별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그녀는 “단체를 발족하고 회원을 모집하는 일이 만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소개 소개로 만난 사람들이 거절하지 않고 함께하겠다고 해 보람이 있었다”며 스스로 “인복(人福)이 있다”고 평했다. 그녀는 '마음을 나누면 남도 가족이, 형제가 될 수 있다'는 소신을 믿고 있다.

산업자원부 산하 (사)한국원자력여성은 국민들에게 국가의 원자력 정책을 홍보하고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지난 1995년에 설립됐으며 현재 전국 226개 시·군지부를 두고 있다.

사람에 가치를 두다

성한경 지회장의 고향은 덕산면 기지마을이다. “고향에서 친정과 시집식구들이 함께 살았지만 내 편이 많아 힘든 줄 몰랐다”는 그녀는 덕산은 물론 진천에서 꽤나 유명한 인사다. 그녀가 지난 1998년부터 23년 여 동안 작게는 할머니 쑥에서 수박까지 생산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전국에 팔러 다니는 '개별화물' 운송을 했기 때문이다. “1.5t 트럭 한 대로 시작한 개별화물이 4.5t 트럭 5대까지 늘어나면서 진천군 경제에 조금이나마 이바지 했을 것”이라며 웃는 그녀는 “사는 것이 힘들어 무엇이든 했지만 그러나 돈보다는 사람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살았다”고 속내를 보였다. 그녀가 지난해 개별화물사업을 정리하면서 같이 일하던 기사에게 트럭을 퇴직금으로 준 일화는 유명하다.

품격 높은 종갓집 맏며느리

그녀는 결혼 후 여주에서 살다 시가(媤家) 모두와 함께 진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가난한 종갓집 맏며느리로 대가족살림을 살면서 치열하게 살았지만 한시도 내가 잘 될 거라는 믿음을 버린 적이 없었다”는 성 지회장. 그녀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그 그룹의 5%”라며 “그 그룹에 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고 했다. 그녀는 현재 3만5000여 평의 농지에 농사를 짓고 있으며 기전마을에서 30여명의 형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잠만 따로 잘뿐 밥은 같이 먹는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한때는 1년에 19가마니의 쌀을 소비했다고.

그녀는 또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일기와 가계부를 썼고 글 쓰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고 말한다. 어릴 적 넉넉한 부모님 아래 살면서 내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 위해 쓰기 시작한 가계부를 한 번도 거른 적 없는 그녀는 “농사는 항상 예비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계부가 유용하다”고 강조했다. 돈 없다고 농사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의 답이다.

“이제는 여유를 갖고 50대를 봉사자로 온전히 살 것”이라는 성한경 지부장. 민주평통자문위원으로, 덕산 백화로타리 차기회장으로, BBS지도위원으로, 향군여성회원으로 살고 있는 그녀의 웃는 얼굴이 너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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