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혜원면 월성리 월성(月城) 마을
광혜원면 월성리 월성(月城) 마을
  • 박민양 기자
  • 승인 2009.07.16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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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좋고~ 물맑고~ 인심 넉넉한… 이웃간 울타리도 없는 청정마을


진천군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광혜원면 월성리(月城里)는 본래 '담안'이라 불리는 마을이었다.

지형(地形)이 반달 같은 산에 둘러싸여 성(成)을 이루고 그 안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 '담안'이라 불렸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일부 지역을 병합, 이름을 월성리라 명명하였다.

월성은 약 140명 정도의 인구가 60여 가구를 이루며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65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60% 정도이고 논농사와 축산을 주요 생업으로 삼고 있다.

뒷산을 중심으로 가로로 길게 부락을 이룬 이 마을은 하루 2번(오전 10시와 오후 2시) 버스가 지나는데 월성교를 지나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 마을 자랑비와 작은 정자가 세워져 있고 양 갈래로 갈라진 두 길이 손을 벌려 객(客)을 맞고 있다.

주민들은 이 앞으로 흐르는 미호천의 물로 농사를 짓고 사는데 농번기 때는 항상 일손이 부족해 마을 사람들 모두 나와 서로 거드는 품앗이를 해 협동 경작한다.

이들의 협동심은 지난해 광혜원에서 열린 화랑 체육대회에서도 그 빛을 발하는데 마을 주민들의 단결과 협동으로 '종합 화합상'을 받은 것이 바로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어른을 공경하며 예의바르고 성실하게 살자'가 이 마을의 향약으로 거주하는 어르신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이를 실천하며 가족이나 친지처럼 지내고 있다.

■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유래
담안 혹은 장내(墻內)라 불리는 이곳은 300년 전 허씨가 큰 담을 치고 살았다 하는데 그 안쪽 지역을 가리키며 지금도 뒷산 정상에 오르면 다량의 깨진 기왓장들이 발견돼 유래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북쪽에는 고무래처럼 생긴 고무래 봉이 있고 서쪽에는 산봉우리가 '구슬'과 같다고 해 '珍珠(진주)봉'에서 변형된 '준주봉'이 있다.

마을 중심에 있는 '옻샘'은 깊고 맑은 물이 흘러 나와 지금도 주민들이 공동 샘터로 이용하고 있다. 옛날 아이들이 피부병으로 고생할 때 이 물을 받아 씻어주면 낫는다 해 귀하게 여겼으며 샘의 이름 또한 '접촉성 피부염 옻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는 찬물이 나오는 샘'에서 '옻샘'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 샘으로부터 20m정도 떨어진 곳에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은행나무 뿌리가 샘이 흐르는 물줄기에 뻗어 물을 맑게 정화시켜 줘 더욱 안심하고 마실 수 있고 이 샘물이 담안 마을 주민들의 건강 유지 비결이라고 말하며 샘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내보였다.

■ 유학의 본고장 담안 마을
예로부터 넓고 비옥한 토지를 소유하고 기와집이 많아 지나는 길손들이 여기가 한양이냐고 묻기도 했다는 이 마을은 배움의 본고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서당이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던 시절 勇齎(용재) 오순근 선생의 가르침으로 마을 주민들의 무지를 일깨웠고 용제 오순근 선생이 효친사상을 높이고 미풍양속을 전하는데 힘썼다고 한다.

현마을 주요 직급을 맡아 봉사하며 살고 있는 김학수씨(1회 졸업)와 차승철씨(2회 졸업)는 금상보통공민학교의 졸업생으로 초대 교장이었던 박광국 선생의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정신을 높이 평가해 존경하며 섬기고 있었다.

담안마을의 초대 면장이었던 박광국 선생은 1951년 전란 중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만승면 유지들과 뜻을 모아 '금상보통공민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으로 지내며 누구보다 가르침에 앞장서 학생들을 일깨웠다.

박 선생은 일제 단발령을 반대하며 유학 공부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멀리 다른 마을에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많은 학자들이 가르침을 받고자 도포 입고 갓을 쓰고 찾아와 마을 어귀에 진을 이뤘다고 한다.

전쟁 후 재정난에 시달리던 공민학교는 나라의 도움을 받아 광혜원으로 터를 옮겨 지금 광혜원 중학교가 되었다.

그러나 박 선생은 중학교에 만족하지 않고 당시 진천에도 고등학교는 농업 고등학교 밖에 없었을 시기에 교육청에 찾아가 고등학교의 필요성을 역설, 간곡히 부탁해 광혜원 고등학교가 설립됨으로써 많은 후배들에게 배움의 터를 마련해줬다.

이는 오늘의 광혜원 중·고등학교로 발전하는 모태가 되어 나라의 동량을 많이 배출한 담안 마을의 큰 자랑거리이자 자부심이다.

■ 장수마을 담안, 유능한 인재를 배출하는 담안
가끔 마을 일대에서 삼국시대 토기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담안이 삼국시대 부락이었을 가능성을 제시, 적어도 고려시대 이전에 형성된 부락으로 추측하며 유서 깊은 마을임을 자랑한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역이자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마을 최고령자인 권계준 할아버지는 슬하에 4남 2녀를 두고 올해 94세로 대화하고 걷는데 불편함이 없이 건강을 유지하고 계신다.

출향인으로는 충북도청 체육과장을 역임하고 서기관 출신으로 지금은 정년 퇴임 후 노후를 즐기고 있는 오창환(70)씨, 영등포 세무서에서 과장을 역임하신 오세혁(75)씨, 내년 지방선거 출마 예정인 오한근씨 등이 있다.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노후를 준비하는 분들이 살기 좋은 부촌 담안 마을은 범재와 화재, 가뭄이나 홍수 등의 재난재해가 없다.

집과 집 사이 울타리가 없고 활기가 넘쳐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로 이주를 준비하는 도심지의 사람들에게 명소로 추천한다.

끝으로 마을 소개에 애써주신 주민 여러분과 마을 유래를 소상히 들려준 오인근씨, 마을의 유적지를 비롯한 이곳저곳을 바삐 움직이며 찾아가 안내해준 차승철 이장의 도움에 감사하며 이 마을의 소개를 마친다.

/우/리/동/네/이/장/님/

마을 공동 샘터 회관 청결히 유지관리

차승철 이장
차승철 이장





차승철 이장(63)은 10년째 담안 마을의 이장 직을 맡고 있다. 어르신들을 돌보며 소외되는 이웃이 없는지 주변을 살피고 편의 도모를 위해 마을 공동 샘터와 회관을 청결히 유지관리하고 있다.

차 이장에게 최근 고민이 하나 있다면 마을 어귀의 울퉁불퉁한 도로 지면일 것이다.

마을 어귀 노면을 보며 한숨짓는 그의 표정에서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과 웃어른을 향한 공경심이 엿 보이는 동시에 하루속히 그의 고민이 해결되길 바란다.

마을의 편의도모에 적극 협조 '감사'

조문자 부녀회장
조문자 부녀회장







봉사에 남다른 열정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조문자(67세)씨는 광혜원 적십자 봉사회, 진천군 생활 개선회, 농가 주부모임 회원으로서 6~7년째 활동해오고 있다. 1년 수입이 겨우 12만원인 마을 구판장을 운영, 폐품을 모아 마련한 수익금은 화랑 체육대회, 부락행사, 경로잔치 등의 경조사에서 알뜰살뜰 이용된다.

마을의 수족이 되어 물심양면으로 봉사하고 있는 그는 스스로 '봉사'라는 생각보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지금 자신의 여유가 즐겁
다 말하며 마을의 편의를 도모하도록 협조에 적극적인 부녀회 임원들에게 항상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마을 소일거리 마다하지 않아
김학수 노인회장
김학수 노인회장



김학수씨는 건강한 노후생활을 위해 마을의 소일거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또 동네 주민들 모두가 웃음을 잃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그의 소소한 바람이기도 하다. “우리 마을이 건강한 사람들이 많은 장수마을입니다. 권계준 할아버지는 올해 94세인데 아직 정정하세요. 마을회관에 작은 운동기구를 몇 개 구비해 놓는다면 마을 주민들이 다 같이 이용할 수 있어 더욱더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어 좋을 텐데…”라며 그렇게 할 수 없는 마을 여건을 아쉽게 생각하셨다.

서용택 반장
서용택 반장

송아지 직거래 장터가격 형평성 하루속히 이뤄졌으면

“농촌이 잘 살아야 나라가 잘 산다고 하는데 시골은 점점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소 축산업을 하고 있는 서 반장님은 1kg에 5,800원 밖에 안 쳐주는 소 값을 왜 마트에서는 2만원에 팔아 형평에 어긋나는 이익을 취하느냐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송아지 값이 겨우 2~300만원 하는데 이 가격으로는 소 여물주기도 힘들다 하며 직거래 장터나 가격 형평성이 하루 속히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우리마을 유적지

광 흥 사
광 흥 사
마을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광흥사는 인적이 드물어 한적한 사찰이다. 흥무대왕 김유신의 화랑도가 무예를 다졌던 곳이라는 설도 있고 영의정을 지낸 허적의 어린 시절 배움터라는 설도 있다.
마을 뒷산에 아직도 남아있는 기왓장들과 관련, '300년 전 허씨가 이곳에 큰 담을 치고 살았는데…'라는 담안 마을 유래에 입각해 허적의 정치 시기가 맞물리고 나고 자란 곳이 인근이므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어린 시절 글공부 터라는 설에 신빙성을 두고 그가 말년에 역적으로 몰려 그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라 입을 모았다.
한편 이곳에 보존하고 있는 석조여래좌상(불상)은 전체적인 형태나 조각한 솜씨로 보아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 발견 당시 목 윗부분이 없어 후에 다시 만들어 복원하였다.
▲ 허적은 누구인가?
허적(1610~1680)은 금천 소물 금곡리에서 태어나 1637년(인조1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경상도 관찰사·명조판서를 거쳐 1664년 우의정, 4년 뒤 좌의정이 되었다. 167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에 전임, 1674년 자의대비의 제2차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기년설을 주장, 채택됨으로써 영의정에 복직하여 남인정권을 이룩했다. 1678년 재정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를 주조, 사용케 했으며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후에 조부 잠(潛)의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푸는데 중종의 유악을 함부로 사용한 사건으로 대죄하던 중 서자 견(堅)의 역무 사건에 연좌되어 사사 당했다가 경신대출척으로 신원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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