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 원 前도교육청 교육국장
전 재 원 前도교육청 교육국장
  • 강성진 기자
  • 승인 2009.09.16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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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교육에의 열정… 그리고 42년 발자취


"교육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는 작은 진리를 깨닫기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40년이 넘도록 교육자로 한 길을 걸으며 충북 교육의 힘찬 도약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고 지난달 26일 퇴임식을 가진 충북도교육청 전재원 교육국장.
퇴임식 자리에서 그는 “퇴직하는게 아니라 이임하는 것 뿐입니다” 라며 “자리에서는 물러나지만 교육자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일 뿐”임을 역설하면서 많은 교육계 인사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남겼다.

그의 퇴임식이 있던 날로부터 아니 이임식이 있던 날로부터 열흘이 지나서 어렵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첫인상은 상쾌하기 그지없었는데, 만나자마자 “진천읍 송두리 촌사람입니다”하고 소탈한 첫인사를 건네는 그는 나무랄데 없는 미남형이었다. 그러나 그 소탈함 가운데 배어나는 빈틈없는 인품의 면모에서 성실한 교직자 상을 한눈에 직감할 수 있었다.

아득한 세월의 수레바퀴를 더듬어 전재원 전 교육국장은 먼저 어린 시절의 고향이야기부터 들려 주었다.

1947년 4월 진천읍 송두리 텃골에서 태어난 그는 5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와 함께 살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진천상산초(48회)와 진천중(12회)을 나와 청주고(39)와 청주교대(5회)를 졸업한 그는 1968년 자신의 고향인 진천의 학성초등학교에서 4학년 담임교사로 교직에 첫 발을 디뎠다.

교사에게 초임학교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보고라고 했던가? 학성초 재임시절 진밭골, 사송정, 참샘골을 지나 5km가 넘는 출퇴근길엔 항상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떼를 지어 함께 손에 손잡고 학교를 오갔다면서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그에게서 더할 수없는 행복의 꽃이 피어난다.

전 교육국장의 가장 큰 재산은 훌륭하게 자란 제자들이라고 한다. 교사만의 행복이 바로 저것 아닌가… 제자들은 스승의 날이면 잊지 않고 찾고 있지만 전 장학관은 “다음부터는 전화나 한통 주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그가 교사재직 시 교실에다 꼭 붙여놓은 말은 '후회하지 않는 인간이 되라'였다. 스스로 열정을 다해 더 낳은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였다.

그의 41년 6개월 교직생활을 논하기에 앞서 꼭 들어야할 유년시절 이야기가 있다.

그가 상산초 3학년에 재학중이던 7월 어느날, 그땐 학생수에 비해 교실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복도에 교실을 만들어 수업하던 열악한 시절이었는데 사지마을에 사셨던 담임선생님은 항상 수업이 끝나기전에 수학문제를 내서 다 맞춰야 학생들을 집에 보내주곤 했다고 한다.

그날도 수학문제를 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인자한 할아버지 한분이 집까지 자전거를 태워 줬다고 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 할아버지의 따듯한 모습이 오랜시간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이 되었다고 했다.

시간은 흘러 그가 교사가 되고 상산초등학교 5학년 담임시절 국어교과서에는 '까마귀는 바람에 목욕을 하고 사람은 사랑에 목욕을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 옛날 어릴적에 그를 자전거에 태워줬던 할아버지의 사랑이 깊이 와 닿은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송두리에서 상산초를 오가는 출퇴근길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시간이 흘러 1988년 청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어느날 밤에 어머님께 드릴 빵을 사기위해 집주변에 있는 빵집(당시 무지개제과)에 갔는데 그곳의 여주인이 그를 알아보면서 “16년 전에 제가 학교가 끝나고 집에가는 어두운 밤길에서 선생님께서 자전거를 태워준 거 기억 않나세요?” 라며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살았다는 말을 들었을때 그는 비로소 교육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도 그는 강단에 설때나 신임교사 임영장을 줄때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자전거를 태워준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무지개 제과점 일화까지 자신의 40년 경험담을 들려주며 '교육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아이들을 머리로 가르치지 말고 가슴으로 가르쳐라” 라는 것을 당부한다고 한다.

그는 1992년까지 24년을 진천 상산초, 한천초, 성암초, 삼수초등학교 5개교에서 초등교사로 교편을 잡아오다가가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청주교육청, 충북교육청 사회교육체육과, 충북교육과학연구원, 충북교육청 초등교육과에서 장학사.연구사로 재직하게 된다.

그뒤 2001년 7월부터 충북교육청 초등교육과 장학관, 청주교육청 학무국장을 역임하다가 2005년 9월 그는 진천교육장으로 임명되면서 고향 진천의 교육발전을 견인하게 된다.

당시 전국에서도 유일했던 진천교육발전협의회를 구성해 '지역교육발전은 교육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행정기관과 사회단체, 군민모두의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슬로건으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교육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협력하는 의사소통의 장을 마련했고, 학교가 산학을 겸비해야한다는 그의 생각은 관내 기업체와의 일사일촌맺기사업으로 이어져 지역이 상생하는 일에도 전념을 다했다.

진천교육청의 교육지표인 '미래를 함께 가꾸는 진천교육'이라는 캐츠프레이즈도 그가 일구어낸 성과로 그 명맥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의 좌우명을 “서둘지 않고 꾸준히” 와 연잎에 빗물이 고이면 가득 차기전에 스스로 고개를 숙여 물을 쏟아 내는 연잎처럼 욕심없이 사는것 즉 무소유라고 소개하면서 교직생활 41년 6개월동안 죄를 지은게 한가지 있다면 바쁜 일을 핑계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냇가에 가서 멱감고 매운탕 한번 못끓여 먹어본것이라고 한다.

퇴임후 계획을 묻자 “미래를 미리 준비한다면 현실에 소홀 할 수 있다” 며 “딱 정해놓고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동안 미뤄둔 가족들과의 서해안 동해안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소박한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자기가 직책을 떠날 때는 그림자까지 가져가야한다”는 전 교육국장은 나는 퇴직하는게 아니라 이임하는 것이라며 교육현장에 있든 아니든 난 교육자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할 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고향 진천과 충북의 교육발전을 위해 마지막 꿈을 꾸고 있는 그에게 행운이 함께하길 기원하며 오랜 대화의 시간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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