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섭 진천군의회 의장
신창섭 진천군의회 의장
  • 정선옥
  • 승인 2010.01.2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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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Talk! 스물네번째 손님


지방선거가 4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하반기 의장을 맡으면서 그동안 감춰두었던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의회를 이끌며 곧 다가올 선거와 맞물려 연초부터 세인들의 최고 관심사로 떠오른 신창섭 진천군의회 의장을 초대해 그간의 의정활동과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그의 취중진담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술을 전혀 못한다던 그는 연신 권하는 술잔을 미처 다 피하지 못하고 주량을 훌쩍 넘기고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모습으로 오히려 나를 당황케 했다. 여섯 시간이 훌쩍 넘는 장시간의 인터뷰에도 그가 보여준 뛰어난 집중력과 막힘없는 달변은 그가 왜 세인들을 매료시키는지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주었다.


Q 술을 잘 못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동안 취중토크에 초대된 분들 중 몇 분이 술을 거의 못하신다고 했었지만 그래도 평소 주량 보다는 조금씩 더 드시는 편이고, 말미에 기분 좋게 취했다는 말씀들을 하시곤 합니다. 의장님 평소 주량은 얼마나 되십니까?
A 술은 전혀 못한다고 봐야지요. 소주 두 잔만 마셔도 얼큰하게 취하거든요. 그래도 열이면 열 사람 분위기는 다 맞춰줍니다.

Q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니셨네요.
A 비록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긴 했지만 고향인 진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서울·경기 지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진천군 출신의 학생들을 모아 '재경진천군학우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았었습니다. 그 모임이 대학교까지 이어져 대학 때도 학우회 회장을 했었지요. 사회생활을 하던 30대 초반에는 '재경진천중학교 총동문회'를 결성했는데 이 모임에는 진중 22회 출신까지 참석을 했었지요. 서울에서 체육대회도 하고 나름대로 많은 교류를 했었습니다. 그 동문회도 회장을 했었고 '재경진천군민회'를 탄생시키는 산파 역할을 해 초대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고, 진천에 관련된 일이 있으면 무조건 참석하고 봤지요.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했나 봅니다.

Q 대단하시네요. 사실 하나의 조직을 결성하고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많은 조직의 산파 역할을 하셨다니 과연 조직의 귀재십니다.
A 조직을 만드는 법을 일찍 터득했던 거지요. 여담이지만 제가 군 생활을 증평 37사단에서 했거든요. 원래 군대에는 사조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조직을 만들었다간 당장 영창감이지요. 그런데 37사단에 진천사람이 꽤 많았어요. 그 사람들로 모임을 만들어 거기서도 회장을 했습니다. 조직이라 봐야 별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하루 날을 잡아 외박을 종용해 백곡저수지에 모여 일상적인 얘기나 하며 선·후배 관계를 돈독히 하는 정도였지요. 좋지 않습니까? 돌이켜 보면 저는 지속적으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추구해 왔던 것 같습니다.

Q 그럼 그 때부터 정치에 뜻을 두셨던 건가요?
A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저 고향 사람 만나는 게 좋아서 그런 모임을 자꾸 만들고 참석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모임들을 자주 갖고 동향인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막연하게나마 '나도 진천을 위해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Q 하지만 생각이 있다고 해도 평생 다져놓은 생활기반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A 늘 진천에 와서 살고 싶은 생각은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사실 쉽지 않았습니다. 부를 대단히 많이 축적해서 고향에 내려와 봉사활동이나 하면서 편히 지낼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그렇다면 다른 생활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마음 먹었다고 해서 적당한 때에 내가 일할 수 있는 역할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때마침 이월농공단지관리소장 자리가 비었다고 하는데 그 자리라면 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Q 고향에 내려온 것을 후회해 본 적 있으십니까?
A 진천에 내려와 산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수입 면에서도 기존에 일하던 회사에서 받던 연봉의 절반밖에 안되는데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고향이니까 가능했던 겁니다.

Q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A 집사람과 2녀 1남을 두고 있습니다.

Q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연애결혼 하신 건가요?

A 가끔 오해하는 분들이 계셔서 제가 분명히 연애결혼 했을 거라 생각하시는데 저는 중매결혼을 했습니다. 대학 동문이구요.

Q 의장님 스타일이 귀공자풍에 스마트해 보이니 그런 오해들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럼 선 보고 얼마만에 결혼하신 겁니까?
A 6개월 정도 만나다가 결혼했습니다.

Q 사모님 자랑 좀 해 주시지요.
A 워낙 집사람 성격이 여성스럽고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어떤 자리에 가도 앞쪽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변에서 신창섭이보다 낫다고들 하시는데 제가 봐도 성품이나 소양 등이 저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Q 술을 못한다고는 하시지만 그래도 술을 가장 맛있게 마셔본 기억이 있으신가요?
A 대학교 1학년 때 진천다리 쯤에 길에서 막걸리를 팔았었어요. 막소주라고 해야지요. 친구들과 함께 많이도 아니고 마셔봐야 한 대접인데 코로 숨을 쉬는데 단내가 나더라구요. '이것이 술맛이구나' 했는데 그 이후로는 아직까지 그런 맛을 못 느끼고 '저 독한 술을 왜 마시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술이 참 달아요. 술자리라는 것이 보통 비즈니스가 끼고 사람을 상대해야 하니 스트레스였나 봅니다. 오늘은 자리가 편한지 술을 술답게, 기분 좋게 마시게 되네요.

Q 낙선의 경험이 한 번 있으신데 그 때 심경이 어떠셨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A 10대 후반부터 여러 고향단체를 조직해 활동하면서 어떻게든 진천과 관련된 일이라면 팔 걷어붙이고 올인했는데 떨어졌을 때는 마음이 정말 착잡했습니다. 끝나고 나서 사흘 정도 지나니 그제서야 그 정도 표를 받은 것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고 '선거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한 번 실패하고 나니 반드시 당선돼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선이 돼야만 지역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나름대로 머리를 짜내고 주민들의 품을 파고들어 가급적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 노력했습니다. 남자로서 내가 선택하고 목표한 일인데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Q 경험이 없으셨는데도 의장님은 빨리 극복을 하셨네요. 하지만 낙선은 가족들에게도 힘겨운 사건이었을 텐데요.
A 지금도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습니다. 2002년 처음 선거전에 뛰어들었을 때 '신창섭은 떨어지면 서울로 올라갈 사람이다'라는 소문이 무성했었습니다만 저는 진천이 고향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내려와야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집사람이 서울에서 도서대여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가건물도 하나 가지고 있었구요. 제가 내려오기로 결심한 직후 집사람 가게와 건물을 다 정리시켰습니다. 게다가 초등학교 5학년인 막내를 삼수초등학교로 전학시켰습니다. 남들은 진천에서도 서울로 올려 보낼 판인데 오히려 서울에서 진천으로 전학을 시켰으니 어찌보면 저 때문에 희생을 했던 셈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에게 고향이라는 걸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서울 사람들은 뿌리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저와는 정서도 많이 다르구요. 해서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던 거지요.

Q 자녀의 교육을 위해 부모가 직장을 바꾸는 것이 현실인데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A 아이들이 공부를 잘 했습니다. 막내가 진천중학교에 다닐 때도 선생님들이 아이의 실력이 좋으니 청주로 고등학교를 보내라고 하시는데 '내가 지역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내 자식을 외지로 보내냐? 내가 모범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진천고등학교를 추천했고 고맙게 아들도 제 뜻을 받아 주었습니다.
진천에서 나름대로 지역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에게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먼저 군민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앞서가는 사람이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결코 뒷사람들이 따르질 않습니다.

Q 고 오봉석 의장님의 별세로 후반기 의장을 맡고 계시는데 의원의 입장과 의장의 입장에는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A 제가 직접 해 보니 의장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중책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자기가 직접 해 봐야 그 중요성을 느끼는 법입니다. 의원은 군민의 대변인입니다. 그리고 그 대변인들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의장입니다. 당연히 많은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
제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이 신창섭 개인의 행동이 아닌 의회의 움직임으로 보기 때문에 그만큼 책임감도 따르고, 그에 걸맞는 소양과 능력, 행동을 갖추도록 해야지요. 바람이 있다면 더 열심히 해서 모든 군민들에게, 그리고 후세에 '아주 형편없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평을 듣고 싶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요.

Q 진천군의회의 팀웍은 어떻습니까?
A 잘 아시겠지만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별개의 객체이자 주체이고, 하나의 기관입니다. 생각도 다르고 본인이 추구하는 바도 다르지요. 의회에서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나름의 생각이 있기 때문에 잦은 간담회를 통해 의견을 조율합니다. 조율이 안 되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다수결로 결정합니다.

Q 의장님 개인적으로는 기초단체장이나 의원은 정당공천이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A 정당공천제도는 이 작은 나라에서, 이 좁은 지역에선 오히려 분열을 발생시킵니다. 정당공천제가 나라를 산산조각 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너무 정치적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 동네에서 이간질하고 싸움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국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정당공천제를 주장하지만 실은 국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영향력 건사와 이익만을 우선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런 사람들이 국회에 있어서는 안되지요.

Q 지방선거가 4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진천군민들은 의장님께서 군의원이나 도의원, 군수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계시는지 매우 궁금해 합니다. 어느 쪽에 마음이 있으신 건가요?
A 저도 그런 이야기를 주변에서 종종 듣습니다만 제 입으로 군의원 출마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미 신문지상을 통해 다 알려져 있듯이 개인적으로 군수와 도의원 출마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Q 그러면 군의원 출마는 아니시고 군수 아니면 도의원이신데 두 글잔가요? 아님 세 글잔가요?
A 두 글자는 아닙니다.

Q 그럼 세 글자인데 도지사 출마는 아니실 테고 도의원에 출마하실 거란 말씀이시네요.
A 하하하. 2월 초순 경 공식 출마 기자회견을 할 예정입니다.

Q 베드민턴이 수준급이라고 들었습니다만.
A 체력을 보완하는데 베드민턴 만한 운동이 없습니다. 일을 하려면 체력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지지 않고 운동합니다. 체력이 돼야 군민들을 위한 의정활동을 할 수 있지요.

Q 의정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꼽으신다면?

A 주민들, 특히 소외계층의 분들이 자력으로 할 수 없었던 어려운 일들을 제가 노력해서 해결해 주었을 때겠지요. 사실 정말 많은 민원이 들어옵니다만 그 중 70~80%는 해결을 했습니다. 하나하나 민원을 해결할 때마다 희열을 느낍니다. 내 힘으로 어려운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기쁨이 큽니다. 지역에 큰 이슈가 있을 때 의원들과 호흡을 맞춰서 지역발전에 도움이 됐을 때 역시 마찬가지구요.

Q 의정활동 하시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요?

A 진천은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곳입니다. 그런데 임기가 다 되고 보니 더 하고 싶었던 것, 다 못 한 부분이 많습니다. 내 현재 위치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지만 시행해 보지도 못하고 그만 두어야 한다는 자체가 매우 아쉽습니다. 지역에도 많은 도움이 됐을텐데 못해 아쉽고 주민들의 어려움 하나하나 더 돌봤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사실 드러나지 않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정말 어려운 이웃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다 발굴하지 못한 채 임기를 마치게 되어 아쉽습니다. 국가의 지원도 받을 수가 없고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정말 힘든 분들인데 말입니다.

Q 2012년에 우석대학교 개교가 가능할까요?
A 현재 2, 3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대승적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풀어나간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지역에서 당리당략은 필요치 않습니다. 어찌됐거나 지역발전과 군민의 이익이 최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대학교 유치는 우리 진천군민들이 너무도 오래 염원해 왔던 사업입니다. 온 군민의 역량을 결집시켜 사업을 추진한다면 반드시 가능할 겁니다.

Q 집행부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A 집행부에서 군민을 위해 하는 일이라면 의회에서도 적극적으로 밀어줍니다. 대신 그 일을 행함에 있어 파생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히 잡아줍니다. 군민에게 불이익이 돌아간다면 당연히 의회가 나서 막아야지요.

Q 선배로서 동료 의원들이나 앞으로 되실 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지요.
A 군수나 도의원도 중요한 자리지만 군의원도 매우 중요한 자립니다. 아직 군민들이 군의원이 뭐 하는 일이 있느냐고 하시지만 군정을 견제하고 승인하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군의원입니다. 판단력도 정확해야 하고 일처리를 위한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입장에서 조금 더 잘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앞으로 누가 되든 군의원이 되는 사람들은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본인이 얼마나 일을 하는가에 따라 우리 진천군이 발전하고 후손들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진천군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의원이나 의장은 군민들에게 욕을 많이 먹는 직업입니다. 그러나 때로 힘내라고 위로해 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시는 분들이 비단 제 선거구뿐만이 아니라 각지에서 많이 응원해 주십니다. 그런 분들 덕분에 욕을 먹더라도 저와 동료 의원들이 일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군민들의 그런 마음적 후원이 저 신창섭 뿐만이 아니라 진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의장의 힘은 주민들의 힘이며 제가 의장이 된 것 역시 주민들이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격려, 그리고 채찍 부탁드립니다.

운동 중에 가장 힘든 운동이 선거운동이란 이야기가 있다. 또한 선거는 가장 외로운 싸움이기도 하다. 신창섭 의장은 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전진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내 몸 하나만 챙기면 편할 것을 매번 굳이 험한 가시밭길을 택하는 이들이 있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은 더 잘 다져진 기반 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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