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정환 진천군의회 의원 당선자
염정환 진천군의회 의원 당선자
  • 이상훈 대표
  • 승인 2010.06.2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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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 Talk! 서른두번째 손님


어린 시절, 입학식이나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날이면 늘 가슴이 설레어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친구, 새 담임선생님. 이런 기대감 속에 이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잘 지내리라는 다짐 또한 새겼었다.
지난 6·2 지방선거 당선자들의 마음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오랜 기다림 끝에 당선의 영광을 차지한 염정환 군의원 당선자를 초대해 선거운동 당시의 이야기와 당선 후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등을 물었다.

Q 오랫동안 출마를 준비해 오신 것으로 아는데 우선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지난 지방선거 때 선거사무소까지 얻어놓았다가 출마를 포기하셨는데 그 이유를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A 덕산면엔 혁신도시라는 거대사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지역구에 군의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지역구도 아닌 광역선건데 덕산면에서 영향력 있는 후보자가 셋이나 나온다면 모두 다 낙선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출마 선언을 하게 되었던 겁니다.

Q 어려운 선택을 하셨습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데요. 이제나마 기다려 온 보람을 얻으셨으니 그 꿈을 맘껏 펼쳐보십시오. 선거운동 기간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A 사실 지난 2월에 집사람이 뇌경색으로 쓰러져 지금은 가료중입니다. 뇌경색 환자의 경우 건강상태나 감정의 기복이 심해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선거운동 기간에도 저녁 7시만 되면 집에 들어가 집사람과 식사를 같이 했어요. 아직 집사람 거동이 불편하다 보니 저녁시간은 거의 집에서 보냈습니다. 다른 후보들은 그 시간에 인근의 식당이며, 번화가에 인사하러 다니기 바쁜데 집에 있으려니 육신은 편할지 모르나 마음이 조급했지요.

Q 언제쯤 내가 당선되겠구나 하는 직감이 오셨는지?
A 후보자 등록 후 처음 지역구를 한 바퀴 돌았는데 다들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 주시더군요. 유권자들이 “이번엔 꼭 하셔야 됩니다”라고 이야기하시는데 “되겠구나” 하는 느낌이 왔어요. 제가 선거운동을 해 보니 마지막 유동표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본인이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에 따라 갈리는 것 같아요.

Q 당선자 발표 후 감회가 어떠셨는지?
A 10년을 준비했는데 덤덤하면서도 겁이 나더군요. 이제껏 준비해 온 것만큼 군민들에게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깨가 무겁습니다.

Q 이제 곧 제6대 진천군의원 임기가 시작되는데 앞으로 군의원으로서 어떤 분야에 중점을 두고 일을 추진하실건가요?
A 10년을 준비했지만 앞으로 제가 얼마만큼 일을 해서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의원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느냐가 남은 숙제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저는 20년을 농민들을 상대로 농약장사를 해 온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농업은 부가가치가 현저히 낮은 산업입니다. 정말 농민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의원으로서 농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 노력할 것입니다.
현재 덕산에는 200여 수박농가가 있습니다. 수박농장에서 시골 할머니들이 일당 5만원을 받아가십니다. 지역에 기업체가 들어와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수박농가가 하고 있습니다. 진천군은 아직 농업군입니다. 농업의 적극적인 육성으로 농촌지역의 경제활성화를 꾀해야 합니다.

Q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나요?
A 저는 5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이 밥상머리에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은 11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하시며 너희들 중 최소한 3명 이상은 고등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가난하던 시절이어서 형님은 농고를 졸업하셨지만 저는 겨우 중학교만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들에 나가 꼴을 베고 있으면 동네 어르신들이 저희 아버님이 자식농사 잘못 짓는다는 말씀을 가끔 하셨던 기억이 나요. 정환이는 머리도 좋은데 공부를 시켜야 한다면서요. 그래도 동생들 셋은 대학까지 공부했습니다.

Q 시골에서 농사만 지었다고 하셨는데 34살이라는 나이에 직업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는 않으셨을텐데요.
A 저야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당시엔 농사에도 비전이 없다고 판단해 34살에 장사를 해보겠다고 덕산면 소재지로 나왔습니다. 농약의 농자도 모르던 제가 겨우 조그만 가게를 얻어 농약장사를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게 10년을 일해서 조그맣게 집을 짓고 이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워낙 없이 시작했던 사업이라 집사람이 고생 많았지요.

Q 제가 알기로는 30대 초반에 덕산면이장협의회장까지 하셨다고 들었는데 일찍 시작을 하셨네요.

A 제가 33살에 덕산면 이장협의회장을 맡았었습니다. 초창기 농협조합장 선거를 할 때에 선거운동을 하다가 이장협의회장을 맡게 된 것이지요. 지금이야 이장들이 젊지만 그 당시에는 60세가 다 넘었었어요. 젊으니 열심히 한 번 해보라는 뜻이었겠지요. 이장협의회장을 그만두면서 농약장사를 시작한 겁니다. 사회에는 빨리 진출했는데 워낙 어렵게 시작해 선출직에는 나오질 못했었죠.

Q 그러면 정치적인 꿈은 언제부터 가지고 계셨던 건가요?
A 정치적인 꿈이 특별히 있었다기보다는 90대 초반 정우택 지사가 국민당을 창당해 내려왔을 때 저에게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사실 저는 그때까지 당직생활을 안했었거든요. 그래서 거절을 했더니 3번을 쫓아와서 다음번에는 며칠쯤 오겠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예의가 아니다 싶어 그 안에 제가 찾아가겠노라고 답을 했어요. 그래놓고는 지인들에게 물었더니 제가 총대만 매주면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하기에 그 때 발을 들여놓은 것이 지금까지 온 거지요.

Q 슬하에 자녀는 몇이나 두셨나요?
A 2남 1녀를 두었습니다. 자식 자랑한다고 팔불출이라고 하실는지 몰라도 아이들이 너무도 잘 자라 주었습니다. 지금은 다 출가했어요. 선거가 끝나고 나서 들리는 이야기가 저를 싫어하던 몇몇간이 막내가 매일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90도로 인사하는 걸 보고는 감동을 받아 돌아섰답니다. 아이들이 성실하게 잘 해줬어요.

Q 자녀들이 그만큼 할 때에는 평상시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요?
A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집사람이 많이 아프니 아이들이 엄마를 위해, 그리고 엄마 몫까지 더 열심히 해준 것 같습니다. 형제들끼리 우애도 좋고 매사에 긍정적이구요.

Q 역시 가화만사성이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네요.
A 맞는 말씀입니다. 수신제가(修身齊家)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를 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밖에 나와서 일할 생각을 해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Q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만의 장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A 글쎄요. 저는 장점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점이 많은 사람이지요. 배운 것도 많지 않고, 어느 자리에서나 직설적이고,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포기하지 않고, 선거직으로 그다지 좋은 성격은 아니지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주변에서 “그 사람 성격대로 잘 할 것”이란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Q 너무 딱딱한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A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뭣하지만 집사람 상당한 미인입니다. 큰아버님 회갑이라 군대 휴가를 얻어 나왔는데 큰아버님이 선을 보라고 하셨어요. 아직 군인 신분이었지만 큰아버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그날로 선을 봤는데, 집사람을 보는 순간 가슴에 확 들어오더라구요. 집사람은 서울에서 간호사를 했었는데 인연이 되려니 잠시 집에 다니러 왔었답니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도저히 안되겠어요. 그래서 집사람 부모님을 찾아가 내일 당장 약혼식을 해야겠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처갓집에서 난리가 났었지요. 그래서 선본 지 24시간 만에 약혼을 했어요.

Q 장인, 장모님께서 그렇게 쉽게 따님을 내주실 때에는 사윗감이 퍽 마음에 드셨던 모양입니다.
A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씻고 있는데 장모님에 오셔서는 도저히 이렇게 급히 약혼을 못시키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장모님께 저도 오늘 군대에 복귀하면 1년 뒤에나 휴가를 나올텐데 제 얼굴을 보시고 딸을 주실만 하면 주시고 정 못주실 것 같으면 제가 포기하겠노라고 말씀드렸더니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Q 그럼 연애편지도 많이 주고받으셨겠네요?
A 주고받은 편지야 수천통이 되지요. 제대를 10개월 남겨놓고 결혼식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는 다시 복귀를 하고 집사람은 당시 서울에서 공부하던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저도 없이 혼자 서울로 상경했어요. 게다가 중학생이던 막내까지 서울로 불러올려 공부를 시켰으니 그 고생이야 말로 다 못하지요. 그래서 지금도 동생들이 형수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합니다. 집사람은 얼굴도 예쁘지만 마음은 더 고운 사람입니다.

Q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사모님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시네요.
A 정말 좋은 사람인데 저를 만나서 고생 많이 했어요. 뒤늦게라도 잘해주려 했는데 저렇게 몸이 좋지 않아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사실 선거운동 하면서 다른 후보들은 배우자들이 곁에서 함께 운동을 해 주는데 저는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가 가족사가 어려우면 당선이 힘들다고 이야길 하더군요. 하지만 내 집사람인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데 굳이 감출 이유가 없었습니다. 비록 집사람이 직접 나서주지는 못했지만 워낙에 착한 집사람 성품을 아는 주변 분들이 저를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Q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있으시다면.
A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사심없이 백의종군해 국가에 충성하신 분이지요. 인간의 본성으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역사에 영웅으로 기록되는 것이지요. 후세에 그런 영웅이 또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Q 군민들의 선택으로 이제 의회에 진출하게 되셨는데 당선이 확정되기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어떠셨을지 궁금합니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기도 했을텐데요.

A 그 기다림의 순간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개표시 시스템이 고장나 1시간 가량 개표가 지연됐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들리는 이야기가 2등이다, 3등이다, 안 될 것 같다는 등등의 이야기들이 들어오는데 그때의 불안함과 초조함은 1시간이 10년처럼 느껴질 만큼 힘들었어요. 개표가 끝나고 나자 큰아들이 저를 잡고 울더라구요. “아버지, 고맙습니다”라면서요. 지난 선거에 불출마 선언을 했을 때도 저녁에 큰아들이 술 한 잔 따라주면서 “아버지, 훌륭하세요, 존경합니다” 하고 울었는데 이번에 당선되고 나서 또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니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자지간의 정이 애틋하더라구요.

Q 제6대 진천군의회 의장선거 역시 불출마를 선언하셨는데요.
A 저라고 의장 욕심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욕심에서라면 저는 당연히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장이 되려고 군의원이 된 것이 아니라 군민을 위해 일하기 위해 군의원이 된 것입니다. 의장직에 연연하기 보다는 그저 열심히 일하고 의회에서 연장자인 만큼 중재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유권자들에게 의회의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취지로 다른 당선자들께도 군민들에게 의회 구성부터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말씀 드렸습니다.

Q 개인적으로 바람이 있으시다면?
A 제 나이 60을 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별다른 욕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지역 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지역을 위해 열심히 일해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이런 이야길 합디다. “아버지, 잘 하셔야 한다”고. 아비에게 경고하는 거지요.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가족의 중요성을 새삼스레 느끼며 “내가 잘못하면 가족들에게 못 할 일이다”라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밖에 나와 큰일을 하기 전에 가족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지요.
제가 살아온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마지막에 “우리 아버지 정말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해 주면 그것으로 만족할 겁니다. 지역 주민들에게 인정받고, 나아가 자식들에게 인정받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Q 진천군의회를 이끌어갈 군의원으로서 군민들에게 하실 말씀 있으시다면?
A 우선 염정환이라는 개인이 군의원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 모두가 군의원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민들이 많은 의견을 개진해 주시고 적극적인 참여를 해 주셔야 합니다.
유권자들이 저를 선택해 주셨을 때에는 진천군의회의 의원으로서 진천군을 위해 제대로 일 할 일꾼을 선택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꾼은 주인이 잘 부려야 일 잘하는 일꾼이 되는 겁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것이 일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민들과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권위적인 군의원이 아니라 주민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이며 허심탄회하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지역 현안도 들어보고, 같이 해법도 고민하는 주민과 더불어, 함께 일하는 군의원이 되고 싶습니다.
지역 주민들께서 저에게 지워주신 막중한 책임, 저를 지지해 주신 유권자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초대한 손님과의 오랜 대화 끝에 얻어지는 예상 외의 성과는 취중토크의 또 다른 묘미다. 그것이 고급 정보이거나, 아니면 귀를 솔깃하게 하는 가십거리일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터뷰이의 생각지 못했던 탁월한 재능이나 훌륭한 인품, 드라마 같은 인생사는 취중토크 진행자만이 느낄 수 있는 뿌듯함 같은 것이다.
염정환 당선자는 3시간을 넘게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언론과의 인터뷰라는 불편한 내색 보다는 오히려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렇게 남들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대의를 위한 희생, 사람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성품,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는 따뜻한 인간미를 골고루 갖춘 대인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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