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진 전 청와대 국정 상황실장
이상진 전 청와대 국정 상황실장
  • 유재윤
  • 승인 2008.06.1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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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대담을 마친후 소식을 듣고 달려온 진천중학교 8회 친구들과 함께
사진은 대담을 마친후 소식을 듣고 달려온 진천중학교 8회 친구들과 함께

약력
◑ 상산초등학교 졸.
◑ 진천중학교 졸.
◑ 중동고등학교 졸.
◑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
◑ 대통령 비서실
쪾 국정 상황실장
쪾비서실장 보좌관
쪾정무 2 행정관
◑ 서울특별시
쪾의회사무처장(관리관)
쪾내무, 문화, 산업경제국장
쪾감사, 공보관, 시장비서실장
◑ 학계
쪾극동정보대학장
쪾대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쪾서경대 행정학과 교수(현)
◑ 사회단체
쪾(사)서울문화사학회 회장
쪾(사)한국수필가협회 회장
쪾(사)산업개발 훈련원 이사장
쪾아리수포럼 총재

친화력과 통솔력이 뛰어나고 합리적사고로 1968년 5월 서울시에 9급으로 입문하여 2001년 1월 퇴직시까지 공무원생활을 해오면서 서울시 공보관, 감사관, 산업경제 국장, 문화국장, 내무국장, 시의회 사무처장(1급)을 역임하였으며, 2번에 걸쳐 청와대에 발탁되어 대통령비서실 실장보좌관, 대통령 비서실 국정상황 실장 등을 거치면서 진천지역발전을 위해서도 헌신적인 활동을 하고 계시는 이상진 교수를 이상훈 본사발행인이 지난 6월15일 진천교육청 정자에서 만나 그간의 활동사항과 앞으로의 계획등에 대하여 들어보았다.

▲ 최근의 근황은 어떠하신지요?
학술연구활동으로 2002년 음성군 소재 극동정보대학장으로 근무 하다가 2003~2005년 대전대학교에서 사회문제론, 사회복지학, 노인복지를 강의 하였으며 2006년 ~ 현재까지 서울에 있는 서경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로 행정학, 정치사회론을 가르키고 있으며 2004년 ~ 현재까지 (사)서울문화사학회 회장을 맡아 문화재를 답사 연구하면서 문화재 지킴이 운동을 전개하고 학술 대회를 개최 학술지를 발간 하고, 사회복지활동으로는 2006년부터 기능장애인협회 중앙회 상임고문으로서 장애인의 복지 증진과 권익 보호를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2001년부터 대한노인회 서울연합회 고문으로 있으면서 경로당 등 노인지도자를 대상으로 좥노인사회 참여와 역할좦 등의 교수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문화 예술활동으로 2005년부터 중견 미술가들 모임인 인싸이트 포럼에 운영위원으로 참여 국제훼스티발 개최 등 문화 증진에 기여하고 있으며, 2004년에 서울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문학인)의 2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시, 수필, 단편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모아 년보로서 문학지를 4년째 발행하고 있습니다.

▲ 태어나서 학교 들어가기 까지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한 말씀 하신다면?

저는 해방되기전인 1944년 7월 20 일 진천군 이월면 동성리 잿뜰부락 외가댁에서 이철우 씨와 이태주 씨의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고 이철우)이 청주 금융조합에 은행원으로 취직이 되시어 일곱살 때까지 청주 역전 영정학교(지금의 주성 중학) 앞에 살았습니다.
6.25 나던 해에 부친께서 진천 금융조합으로 전근을 오셨으며 그 해 저는 삼수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3개월 있다가 청원군 초정약수 근처의 작은 할아버지 댁으로 피난갔다가 국군의 북으로 진격 할때 다시 진천으로 돌아와 학교를 다녔습니다.

▲ 학창시절 생활과 꿈, 잊지못할 일화가 있다면?

삼수 초등학교는 남녀공학으로서 남·녀가 각각 한 반씩 이었습니다. 4학년까지 반장을 쭉해왔는데 5학년들어 우리반 아이들이 다시 나를 반장으로 뽑았는데 그 때 새로 부임하시어 우리반 담임이 되신 선생님이 한사람이 계속 반장을 하지말고 돌아 가면서 하라고 선거도 없이 다른 학우를 지명하는 바람에 집에 와서 많이 운 기억이 있습니다. 5학년 2학기때 옆에 있는 상산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전학한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학생들이 뽑는 어린이 회장 선거에서 제가 당선이 되었습니다. 상산초등학교는 당시 조금 큰 학교라서 남자반 2학급, 여자반 1학급인데 어릴때부터 아버지께서 써주신 원고를 가지고 웅변 연습을 한 탓에 아마도 다른 학우들보다 적극적이고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이러한 기적은 서울에 올라와서도 연결이 됩니다. 진천중학교를 마치고 1959년년에 서울로 유학 중동고등하교에 입학 하였습니다. 1학년 때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등 권내에 들었는데 그런데 이때 이미 자유당 정권의 장기 집권 음모로 사회가 아주 불안 하였고 대학생 선배들이 학교로 찾아와 시국 얘기를 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2학년 올라가서 학생 회장 선거가 직선제로 시행, 당선 되었습니다. 3학년 올라가서 5.16 혁명이 발생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정치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나 계기에 대하여...

군 제대 이듬해인 67년 2월 서울에 올라가 대학에 복학 하라고 하시면서 등록금을 마련해 주시었습니다. 복학하기위해 학교에 올라갔으나 수척하신 아버님 얼굴과 진천 농고를 졸업했으나 형을 대학에 다니게 하려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둘째 동생을 생각하니 도무지 등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이제 철이 들었으니 정치 꿈은 접겠습니다. 공무원에 들어가 자력으로 학업을 마치고 행정가로서 꿈을 실현 하겠습니다. 걱정 하지 마세요”라고 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리고 곧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하면서 공무원 입시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응시 자격 기준이 전문대(2년) 졸업자와 종합대학 3년 수료자만 7급 시험에 응시할 수 있지 대학 2년 수료자는 9급 시험만 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9급 시험에는 수학 과목이 들어 있는데 고등학교 졸업 한지가 벌써 6년이 넘었는데 새삼스레 인수분해서부터 1,2차 방정식을 풀기가 여간 만만하지가 않았으며 더구나 그때는 입시 학원도 없을때라 순전히 독학으로 외우다시피 해서 68년 3월 서울시 9급 시험에 응시 하여 다행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할 수 있었으며 제1차로 1968.5.1 종로구청 비파동사무소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직업 공무원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 고향에서의 학창 시절 생활과 꿈 잊못할 일화가 있으면?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6.25 직후라서 폭격 맞은 집들의 잔재들을 지형지물 삼아 전쟁놀이를 하던 기억도 납니다. 또 정월 대보름이나 8월 한가위(추석)에는 어머니가 싸주시는 시루떡이나 송편을 이웃집에 나눠드리고 친구들과 제방뚝에 나가 큰 보름달을 맞으며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빌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새로 지은 강당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마의태자'라는 가무극을 공연했습니다. 도그머리에 사시던 최석하라는 분이 연출을 맡고 우리 출연진(중학생) 모두 성공회 별채 큰 방에서 한 달 이상 단체 합숙을 하면서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주인공 마의태자 역을 제가 맡았는데 처음 배우는 창법이 어려워 목이 쉬기도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생활 이었습니다.

▲ 고향 친구 분들 중에 특히 기억에 남거나 만나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특별히 생각나는 어릴적 친구는 3명을 꼽을 수가 있는데 우리집에는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제가 독방 하나를 사용했기 때문에 친구들이 자주와 얘기도 하고 같이 공부하다 자기도 했습니다. 미국에 이민간 S군은 문학 소년으로서 소낙비를 흠뻑 맞으며 김소월의 시를 목이 터져라 부르다 엎어지는 것이 꿈이라고 했고 서울에서 음식점을 크게 운영하는 P군은 돈을 많이 벌어 부자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고 진천농공단지 소장으로 있으면서 고향을 지키는 친구 J군은 신문 기자가 되겠다고 했으며 나는 정치가가 되고 싶다고 폼 잡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 생활신조나 좌우명은?
나는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 성경을 읽었습니다. 시편 제1장을 생활신조로 삼고 그 실천을 위해 진정한 마음올 노력하고 있습니다. 좥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여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좦 라는 소중한 구절입니다.

▲ 최근 재경 군민들과의 교류는?
충북협회와 진천군민회 서울시청 등 진천·음성출신자모임인 성천회, 진천친구들의 모임인 봉화회, 문학인 모임인 상문회 등에서 고향 분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다만 15년 전쯤 진천중학교 총동창회를 연임하면서 서울에 재경 진천중학교 동창회를 조직하고자 기별 대표들을 연락하고 1차 모임을 가졌었는데 당시 서울 600년 기념사업 일이 너무 바빠서 동창회일을 매듭짓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쉽습니다. 지금이라도 이에 대한 뜻을 가진 후배들이 있으면 적극 협조해서 추진하고 싶습니다.

▲ 앞으로의 바람과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면?

부존자원이 취약한 우리나라는 우수한 국민의 힘이 가장 큰 국가 자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인, 여성들을 포함하여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국민의 능력을 잘 개발하고 교육하여 국내·외의 산업현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고 우리 진천에도 그러한 교육기관을 세우거나 유치하고 싶습니다.

▲ 고향 발전을 위해 애쓰신 공로로 12년 전 상산신문에서 수여하는 군민대상 출향인부문 상을 수상하셨는데 고향발전을 위해 하신 일이나 앞으로 하시고 싶은 일이 있다면?

94년 진천대교가 노후되어 붕괴 위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무부와 충북도를 상대로 진천교의 상징성과 위험성을 역설, 국비 및 도비 10억원의 예산을 교부받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진천 도서관에 소장된 책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각종 서적 5,000여권을 수집, 도서관에 기증, 청소년과 군민들의 양서 구독기회를 마련해 주는 한편 서울문화사학회 및 전국의 사학자에게 상산고적회 등 진천의 문화를 피알하는데 일조하고 앞으로는 전국적으로 생거진천의 의미를 정립 진천군민 모두가 진천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작으나마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 진천군민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신다면?
옛부터 진천은 풍부한 문화유산과 경로효친사상이 뛰어난 고장으로 정평이 나있는 곳입니다. 나라가 잘 사는 것은 배불리 잘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경 제발전과 우리전통고유의 효문화가 겸비 삶의 질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겸양지덕과 교양이 결부된 지식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군민여러분 전체가 다함께 노력하여 대한민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선진진천이 될 수 있도록 다함께 노력했으면 하는 바램이며 저 역시 남은 여생을 그러한 밑그림을 그리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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