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진천군의회 의원
김기형 진천군의회 의원
  • 이상훈 대표
  • 승인 2010.07.0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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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대표기자의 취중Talk! 서른세번째 손님


지방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당선자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바쁜 한 달을 보냈을 것이다.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도 많고, 일일이 찾아가 인사를 해야 할 사람도 많고, 새로 시작될 의원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고민도 적지 않았을 터. 진천군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민주노동당 출신의 군의원이기도 하고, 농민운동가로, 법대 출신의 엘리트지만 자신은 땀의 가치를 아는, 땀 흘려 일하는 농민임을 자처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고 있는 김기형 진천군의회 의원. 나 역시 선거운동 기간 내내 그가 외쳤던 공약 보다도 김기형이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개원을 앞둔 7월 초입, 개원 준비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김기형 의원을 어렵게 취중토크 자리에 초대했다.

Q 주량은 얼마나 되십니까?
A 소주 한 병이 치사량입니다. 예전에는 소주 뚜껑으로 두 잔이면 취하는 정도였는데 많이 늘었어요. 사실 술자리에서 맹숭맹숭 자리 지키고 앉아 있는 게 쉽지 않아요. 원래 술을 마시면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하잖아요. 혼자 멀쩡하게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다가 결국 마지막에 다 챙겨 보내고... 선거를 치르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술이 많이 늘었습니다.

Q 아직까지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역민들의 정서가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은데요.
A 지난겨울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나고 다녔습니다. 저를 아끼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겠지만 안타깝다는 말씀을 많이 하시더군요. 차라리 당적을 포기하면 쉬울텐데 고생한다구요. 당을 고집하지 말고 당선돼서 네가 할 일 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탈당을 권하는 분들도 계셨구요.
민주노동당의 이름으로 의회에 진출하는 것이 힘들다 하더라도 제가 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저의 역량이 그만큼 부족한 탓이겠죠. 조금 불리하다고 해서, 불편하다고 해서, 이제껏 제가 걸어 왔던 길을 인정하지 않고 저의 신념을 버린다면 이제껏 제가 살아온 저의 인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지역사회에서 그런 문제들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저의 신념도 실현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에 대한 저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Q 다른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선자 신분일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하시던데 지난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A 이런저런 고민 많이 했던 한달이었습니다. 사실 여기저기 행사장을 많이 찾다보니 차분히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당선자 신분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인사를 다니는 일이었습니다. 다녀보니 비록 지역정치지만 의원들에게 거는 군민들의 기대가 컸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이제 진천이 바뀌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만큼 개인적인 부담도 큽니다. 내가 과연 이 많은 일들을 다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반면 해내야지 하는 책임감도 갖게 되구요. 정말 열심히 일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Q 진천군 농민회 회장을 맡고 계시는데 농민운동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A 지난 92년 2월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이전부터 학생운동을 해 왔구요. 대학교 4학년이 되면서 진로문제에 대해 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공을 살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상황이었는데 당시 우루과이라운드가 한참 부각되던 시절이었어요. 저 역시 농촌 출신이다 보니 농촌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가장 어렵고 힘든 자리가 내가 있어야 할 곳 아니냐는 생각을 했고 당연히 농촌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Q 언제쯤 '아, 내가 당선되겠구나!' 하는 감이 오시던가요?
A 처음 선거운동을 한다고 인사를 다니는데 열 명을 만나면 그 중 여덟, 아홉 명이 제게 탈당을 권유하더군요. 하지만 지역사회가 많이 바뀌어야 한다는 흐름이 있었고, 두 번째 선거다 보니 젊은 사람이 나서야 한다는 움직임들이 눈에 보이더군요. 젊은 사람들이 지역발전을 위해 결집되는 감이 오더라구요.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감을 갖고 출발했습니다.
다만 고령화가 진행되는 농촌지역의 특성상 어떻게 어르신들을 설득시키는가가 관건이었지요. 민노당에 대한 어르신들의 불신이 심각했거든요. 그래도 제 자신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그분들도 알아주시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민노당에 대한 강한 불신이 있다 하더라도 저를 보시고 저 정도의 신념을 가지고 가는 놈이라면 믿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실 수 있도록 저의 진정을 보여드린다면 힘들더라도 가능성이 있을거라 판단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어떻게 살아왔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라는 걸 보여주려 노력했습니다.

Q 그래도 그 짧은 시간에 그분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이 쉽지는 않으셨을텐데요.
A 선거운동 기간이 짧아 많은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깊이 있게 만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굴도 못보고 저를 찍어주신 분들이 많습니다. 명함도 많이 못드려서 지금도 한보따리나 남았어요. 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저의 본심을 보여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진정성이 어르신들을 설득시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Q 어릴 땐 어떠셨나요?
A 어렸을 때요?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는데 두 분이 늘 열심히 일하시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힘들게 일해도 어려운 살림이었지만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일인데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쇠꼴을 베러 나가시는 어머니를 쫓아간 일이 있어요. 그런데 그날따라 제가 어머니에게 물방개를 잡아달라고 떼를 썼어요. 어머니가 어렵게 잡아 주셨는데 제가 가지고 놀다가 그만 놓쳐 버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 바삐 낫질을 하고 계시는 어머니 옆에 가서 또 악을 써가며 울었는데 문득 어머니 얼굴을 보니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셨더라구요. 이유를 여쭤보진 못했지만 그 때 어머니의 삶이 너무 고단하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지금도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뒤로는 부모님께 옷 한 벌 사달라고 졸라본 적이 없습니다. 2남 2녀 중 제가 장남인데 자라면서 부모님 뜻을 거슬러 본 적이 없어요. 공부를 아주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적어도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요.
대학 가서 학생운동 한다고 경찰서를 하루가 멀다 하고 들락거리니 부모님 충격이 무척 크셨죠. 부모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의 길을 가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운명 같은 것이었지요.

Q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오실 때 부모님이 반대는 하지 않으셨나요?
A 왜 안하셨겠습니까? 대학 졸업 직후 고향에 돌아와 농사 지으면서 처음 1, 2년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부모님, 가족, 친척, 동네 어르신들 모두 반대를 하셨거든요. 하지만 이 길이 아니면 내 인생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어려운 곳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했구요.
처음에는 부모님과도 많이 불편하고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몇 년 지나니 부모님도 제가 갈 곳이 없어서 온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왔다는 것을 인정해 주셨어요.

Q 자식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A 저의 생각을 받아들여 주시고 불효의 길이 될지언정 저를 인정해 주신 부모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Q 그렇게 어렵게 농민의 길로 들어서셨는데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나요?
A 지금 기억으로는 부모님이 공부 잘 해서 힘든 농사짓지 말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길 원하셨던 것 같아요. 당시만 해도 법관이 최고라는 인식이 있었지요. 부모님도 그런 걸 원하셨고, 저 역시 그런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법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법대를 가게 됐구요.

Q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A 법학과에 입학을 하긴 했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수업 보다는 정독실에 가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 때의 습관이 있는데 통학하며 눈에 띠는 간판이 있으면 그 이름을 가지고 하루종일 글을 썼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어느 날 정독실에 구비돼 있는 책 중에 전태일 평전을 보게 된 겁니다. 저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 거죠. 그 책을 읽고 나니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 시대에 전태일 열사의 삶을 누구든 이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로 학생운동 하는 선배들을 만나게 되고 전공서적 보다는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Q 그럼 사모님은 언제 만나셨습니까?
A 제가 85학번이고 집사람이 87학번인데 학창시절에 제가 불교학생 동아리 활동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집사람이 그 동아리에 들어왔어요. 처음 보았을 때는 이성의 느낌 보다는 '참 순수하다'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후 집사람도 학생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접할 기회가 많아진거죠. 사실 87학번은 특별한 사상이나 의식이 있고 없고를 떠나 데모로 시작해서 데모로 끝난 학번입니다.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랬으니까요.
군에 입대하고 나서 몇 번 편지 왕래가 있었어요. 제가 원래 편지를 잘 안 쓰는 편인데 그때는 좀 많이 썼어요. 하지만 그때까지도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는데 제대 후에 함께 사회운동을 하다보니 같은 길을 가는 동지적인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것 같아요.

Q 부부가 같은 이상을 가지고 함께 길을 간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 아니겠습니까?
A 그럼요. 지금도 여전히 집사람은 존경하는 후배이자 신뢰하는 동지입니다.

Q 농사는 주로 어떤 농사를 지으시나요?

A 수박농사를 주로 짓는데 선거 때문에 수박을 심지도 못했어요. 큰일입니다.

Q 수박농사를 지으시면 대단위로 하실텐데 농사와 의정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힘들지 않으시겠어요?
A 의정활동과 농사를 병행하기는 현실적으로 힘이 듭니다. 부모님이 도와주시지만 집사람 고생이 많아요. 새벽이나 딱히 공식적인 행사가 없는 휴일 아니면 농사일을 할 시간이 없어요. 그렇다고 농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구요. 농사를 위해 의원으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내년부터는 근처에 있는 하우스만 직접 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해요.

Q 농민운동을 해오셨는데 정치에 대한 생각은 언제부터 하시게 된 건가요?

A 사실 전 정치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습니다. 평소 지론이 운동을 하는 사람은 운동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2004년도에 농민회 쪽에서 정치세력화에 대한 방침을 세웠어요. 농민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한계들을 제도권 안에 들어가서 극복해 보자는 것이었죠. 순수한 농민운동과 제도권 진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초에 민노당에 입당을 했지요.

Q 민노당의 당론과 군민의 의견 사이에 대립이 발생할 경우 당론을 따르실 건지, 아니면 군민의 의사를 존중하실 건가요?
A 민주노동당은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노동자와 농민이 정책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당입니다. 때문에 군민들의 의사와 당론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다수의 군민들이 생산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들이고 그분들이 지향하는 바와 민노당의 정책적 흐름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당의 이념이 군의원 활동에 저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Q 일각에서는 원 구성도 하기 전에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정책연대를 통해 한나라당을 배제시킨 것 아니냐, 정당정치도 중요하지만 지역발전을 위해 구성된 의회인데 일부를 배제하는 것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 정치적 목적을 가진 야합이다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요.
A 이번 협약의 중심은 말 그대로 정책 연대입니다. 민주노동당이 추진해 온 정책들을 민주당과의 협력을 통해 제도화 시킨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좀 더 큰 틀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Q
정당공천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의회정치는 정당정치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정당공천제가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현실적으로 대립되는 부분이 있지요. 하지만 적어도 지역의 기초의원은 당을 넘어서서 전체가 협력하고 지역발전을 위한 장을 함께 그려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진천군의회 의장으로 출마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A 저는 출마의사가 없습니다. 요즘 원 구성이 초미의 관심사이기도 하고, 의장을 하겠다고 나선 분들도 계십니다만 자신의 의지나 정책을 충분히 공개하고 설득시킬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정당을 초월해 집행부를 제대로 견제하고 의회를 통솔할 수 있는 지도력과 능력을 겸비한 의장이 선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Q 처음 당선됐을 때의 기분은 어떠셨나요?
A 당선이 결정됐을 때 사실 제가 당선되었다는 기쁨 보다는 이제껏 저를 도와주신 분들에게 보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업을 포기하다시피 해 가며 저를 도와주신 분들도 많습니다. 이번 선거에 있어 가장 큰 성과라면 그런 분들을 알게 되고, 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성과요 보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마음을 내어 도와주신 분들에게 제가 보답하는 길이라면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그 마음 변치 말고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분들입니다.

Q 다음 목표가 있으십니까?
A 주위에서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부담스럽습니다. 현재로서는 주어진 4년간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겁니다. 그 4년간에 대한 평가로 저의 다음 진로가 정해지겠지요.

Q 1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까요?

A 저는 10년 후에도 여전히 땀 흘려 일하는 농사꾼이고 싶습니다. 생산적인 노동을 통해 흘리는 땀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Q 진천군의회 의원으로서 진천군민들에게 하실 말씀 있으시다면?
A 지역정치의 주인은 우리 군민들입니다. 군민을 지역정치의 중심으로 세우는 역할을 군의원이 해야 합니다. 지역 주민들과 소통의 기회를 많이 만들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지향점을 받아 안아서 제도화 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지역 정치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민들이 지역정치의 중심이 될 수 있게끔 하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나를 알려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일게다. 딱히 친분이 있었던 사이도 아니건만 술자리가 끝나갈 즈음에는 소탈하지만 바위처럼 굳은 신념을 가진 그를 응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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